〈 2화 〉세일럼(2)
더 롱 테러는 기본적으로 턴제 로그라이크 게임이다. 매 회차마다 똑같은 클래스로 조합을 꾸린다고 해도 용사(캐릭터)의 이름은 매번 바뀌며, 던전의 구조도 바뀌고 드랍되는 보물(아이템)이나 아티팩트도 바뀐다. 정말 운이 겹쳐서 똑같은 클래스의 똑같은 이름을 가진 캐릭터를 영입한다고 해도 부여되는 4가지 기본 스킬 또한 그 구성이 다르다.
그래서 운빨좆망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상 어떤 클래스로 조합을 꾸리고 가느냐와 용사들의 배치, 스킬들과 소모 아이템의 적절한 사용, 그리고 물품을 얼마나 적절하게 챙기고 운반하냐에 따라 클리어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갈렸다.
용사대의 최대 가용인원은 4인.
정석조합은 탱커, 딜러, 힐러 플러스 알파였다.
물론 저난도에서는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딜로 찍어 누르거나 변태같이 4탱커 근육조합으로 가도, 정말 어지간히 불운하지 않는 이상 최종보스까지 노 데스 플레이가 가능했다.
하지만 보통 난이도만 되어도 4탱 조합이나 4딜 조합 같은 똥 조합으로는 노 데스 플레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어려움 난이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즉 어려움 난이도보다 더 높은 지금 상황에서 4명 중 3명은 탱커 하나, 딜러 하나, 힐러하나는 무조건 강제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4번째 동료는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갈리는데, 나 같은 경우는 안정 지향적이었기 때문에 알파 자리에 딜탱을 넣거나 보조힐러를 넣었다.
근데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존재했다.
여기선 내가 마우스만 클릭하는 제4의 벽 너머의 플레이어가 아니라, 나 자신도 직접 싸워야하는 용사라는 것.
즉 동료 용사를 모집하기 전에 나부터 클래스를 정해야만 했다.
‘일단 이게 꿈이든 아니든 진행은 해봐야지. 제한 시간 3일이라는 게 겁나게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그 이후는…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게임 자체가 하드코어 한만큼 어떤 사소한 거라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됐는데, 하물며 대놓고 제한시간이 적혀있었으니 이를 무시하는 건 그야말로 저능아 인증이었다.
적어도 3일간은, 튜토리얼과 이 세계에 오롯이 집중하기로 했다.
“용사대 이름은 뭘로 하시겠소? 가급적이면 중복되는 건 피하는 게 좋겠소만.”
“HAT로 하겠습니다.”
“흠. 중복되지는 않는군. 승인되었소. 이 종이를 용사지원소에 제출하면 한 명에 한해 무료로 동료 용사를 지원해줄 거요.”
“감사합니다.”
‘싱글 게임인데 중복은 무슨.’
개 같은 난이도.
게임에선 그냥 팀 이름만 끄적이면 되는 절찬데 여기선 등록비로 무려 은화 5개나 까먹었다. 등록할 때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말이다. 소지금은 삽시간에 금화 3개, 은화 9개로 격하.
잡화물품들 가격을 생각하면 아직은 충분해보이지만, 그 이후를 생각하면 정말 빠듯하기 그지없었다.
‘첫 동료 값이라고 생각하자.’
그 전에 일단 내 클래스부터 정해야했다.
“용사훈련소입니다.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는지요?”
“클래스를 정하러 왔습니다.”
“원하시면 간략한 설명을 해드릴 수 있는데, 어쩌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기존의 13클래스들은 모든 보정치까지 샅샅이 외우고 있었으나 이번에 DLC가 추가 되면서 신클래스가 3개나 추가되었기 때문에 얌전히 설명을 듣기로 했다.
<근접계열>
중갑기사Knight/수호자Guardian/성전사Paladin/광전사Berserk
<원거리 및 도적계열>
약탈자Plunderer/현상금 사냥꾼Bounty Hunter/보물 사냥꾼Treasure Hunter/암살자Assassin/석궁수Crossbowman
<보조 및 치유계열>
저주술사Imprecator/전투수녀Battle Vestal/치유수녀Curing Vestal/음유시인Bard
<특수계열>
늑대인간Werewolf/암상인Black Merchant/강화인간Reinforced Human
이번에 DLC로 추가된 신클래스 3종은 맨 밑의 특수계열 클래스들. 혹시나 다른 기존의 클래스들도 변경점이 있을 수 있었기에 제대로 설명을 들었다. 일단 변경은 없었다.
‘탱은 일단 아냐. 나 같은 쫄보가 맨 앞은 좀.’
탱커는 80% 이상은 1열(최전방)에 섰는데, 물론 모든 괴물들이 맨 앞부터 차례차례 공격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괴물들이 1열이나 2열을 자주 공격하는 건 사실이었다. 아예 어그로가 랜덤이었으면 탱커의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탱커는 일단 기각.
‘힐도 기각. 2힐 체제는 피 유지력은 좋지만 전투 능력이 달리는 문제가 있지. 운 없어서 연속 치명타라도 터지면 힐 주기도 전에 앞열이 쓸려나가고. 어려움 난이도에서도 그런 일이비일비재했는데 그보다 더 어려운 여기서 2힐 체제라.’
단순 맥시멈 힐량만 따지면 저주술사가원탑이었으나 문제는 이놈의 모든 스킬은 ‘저주’가 근본이었기 때문에 치유 스킬 또한 저주취급이었다. 거기에 최소힐량이 0을 뚫고 마이너스까지 내려갔다. 그래서 재수 없으면 저주는 저주대로 걸리고 힐도 못 거는, 즉 한 턴을 공짜로 날리는 최악의 상태가 벌어지는 로또 캐릭터이기도 했다.
‘꾸준한 힐은 치유수녀인데… 이건 여자밖에 못하잖아.’
심지어 이 게임은 같은 클래스라도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능력치 보정이 달랐고, 또 종족에 따라 종족 보정값이 따로 붙었다.(이거야 말로 진짜 운빨이었다.)
어찌됐든 1힐 파티로 안정적으로 굴리려면 힐러는 무조건 치유수녀를 픽해야하는데, 치유수녀와 전투수녀는 무조건 여캐였다. 난 남자니 하고 싶어도 못했다. 따라서 4열(최후방)에 서는 힐러도 기각.
남은 건 2열과 3열.
1힐 파티로 결정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메인딜러에 보조딜러 혹은 메인딜러에 딜탱 둘 중 하나였다.
전투력 상으론 물론 후자 쪽이 훨씬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도적 계열 캐릭터의 필요성이 급등했다.
매핑(지도 정찰), 함정 간파, 원거리 지원, 딜은 약하지만 다양한 유틸기 등등.
고난도에선 사소한 거라도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만큼, 도적 계열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사전에 위험을 차단하는 확률이 확 벌어졌다.
즉 도적 계열도 꼭 필요했다.
그리고 게임 속 도적계열의 취급은….
“메인딜러밖에 없겠네.”
아무리 직접 싸우는 게 무서워도 노예로 살긴 싫었다.
‘도적을 트헌(보물 사냥꾼)으로 가정하면 2원딜 체제로 내가 석궁수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석궁수는 꾸준한 데미지가 장점인 원거리 딜러였는데, 단점 역시 ‘꾸준한’ 데미지. 즉 엄청 센 스킬은 없었다.
‘그렇다고 암살자를 택하자니 몸이 완전 종이짝이고.’
‘광전사는 딜은 개센데 유틸성은 거의 전무인데다가 명중률이 개병신이고.’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소거하다보니,
현상금 사냥꾼/늑대인간/강화인간
이 3개 클래스로 압축할 수 있었다.
‘아 맞다. 늑인은 수녀랑 극상성이랬지.’
늑대폼으로 변신하는 경우 전 클래스 최강의 최대체력과 최대공격력을 자랑한다기에 고려를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수녀와 한 팀을 짤 수가 없었다.
수녀가 늑인을 진심으로 거부한다는 설정 때문에, 한 팀으로 편성하면 던전행을 아예 거절하고 둘 중 하나가 랜덤으로 용사대를 탈퇴해버린다고 한다. 여기선 어떻게구현됐을지 모르겠지만,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었다.
‘아. 뭐야. 강화인간 페널티 미쳤네?’
그리고 미처 못 본 강화인간의 클래스 특징.
멘탈리티(정신상태)가 불안정해지는 속도가 50% 감소하는 대신, 치유효과 또한 50%로 감소.
파티 유지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임에서, 아무리 기본 스펙이 뛰어나고 보정치가 훌륭하다고 해도 치유효과 반감은 엄청난 페널티였다.
‘쩝. 최고난도에서 쌍헌터 조합을 하게 될 줄이야.’
물론, 이 또한 계획에 불과하기 때문에 원하는 클래스가 안 뜨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건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정하셨나요?”
“예. 현상금 사냥꾼으로 하겠습니다.”
“네. 처리되었구요, 현상금 사냥꾼 스킬들 수료 받으시고 장비 지원소에서 현상금 사냥꾼 기본 장비 받아가시면 돼요.”
[클래스가 ‘현상금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Hendrik ‘유진’ TerrorHunter]
종족/성별 : 인간 남성
클래스 : 현상금 사냥꾼(Bounty Hunter)
레벨 : 1
최대체력 : 14(11+3)
공격력 : 2~10(7+3)
방어력 : 3(1+2)
속도 : 7(6+1)
기사회생/각성 :5%
정찰확률 : 16%
긍정적 특징 : *방랑자(속도+1)
‘와… 스탯 진짜 보잘 것 없네.’
언제 10레벨까지 찍을지 눈앞이 캄캄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게임을 하면서 어쩌면 제일 중요한 분기점이 될지도 모를, 첫 동료 뽑기가 있었으니까.
용사지원소에서는 총 10명의 동료 후보들을 보여주는데, 성별‧클래스‧특징‧종족이 모두 랜덤이었다.
그래서 공략에는 첫 동료가 시원찮으면 데이터 삭제 후 쓸 만한 캐릭이 나올 때까지 여기까지의 과정을 무한 반복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
그만큼 첫 동료 뽑기는 용사대의 행보를 결정지을 첫 번째 분수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난 그런인위적인 반복 따위 할 수 없었다.
“어서오십셔. 지원입니까?”
“아뇨. 모집입니다.”
“용사대 증명서 이리 주시고… 흠. 알아서 살펴보시고 말씀해주십셔. 기회를 킵하는 건 없으니 주의하시고.”
공손했던 훈련소 직원에 비해 다소 껄렁한 말투를 건네는 지원소 직원. 우락부락하게 생겨갖고 목소리는 얇은 게 꽤나 언밸런스하다고 생각하며 그가 내미는 용사들의 정보를 살펴봤다.
‘첫 동료는 탱커 아님 힐러.’
앞에 국밥 같은 든든한 탱커를 둬서 체력과 멘탈리티를 회복할 수 있는 휴식처까지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게 제1방안이고, 다소 내가 맞는 한이 있더라도 후방에서 힐러의 힐을 받으며 후에 탱커를 영입하는 게 제2방안이었다.
1방안의 장점은 내가 덜 맞고 안정적으로 딜링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2방안의 장점은 힐러의 레벨을 처음부터 빨리 키워서 장차 파티의 유지력이 진행도에 비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2딜러는 논외였다.
[카를로프Karlov]
종족/성별 : 인간 남성
클래스 : 약탈자(Plunderer)
‘거르고.’
첫 번째 용사는 클래스를 보자마자 바로 걸렀고.
[예리아Yeria]
종족/성별 : 다크엘프 여성
클래스 : 암살자(Assassin)
‘아. 개아깝네 진짜.’
두 번째 용사도 클래스를 보자마자 바로 걸러…야 했지만, 너무나 안타까웠다. 암살자에 최대 보정치가 붙는 종족이 바로 다크엘프였으니까. 여성 보정치 때문에 최대체력과 공격력, 방어력이 까이는 건 뼈아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족 보정치가 그걸 커버 가능할 정도로 유니크한 종족이었는데….
그렇게 3번째부터 9번째 용사까지 전부 하나같이 클래스에서 걸리거나 클래스와 종족이 역보정이 붙거나 개병신 같은 부정적 특징이 걸려서 전부 걸러야만 했다.
어려움 난이도만 됐어도 써먹을 수 있는 용사들이 셋 정도는 있었지만, 이건 최고난도였다.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결함이 있는 녀석은 결코 골라선 안 됐다.
초조한 마음을 애써 숨긴 채 10번째 용사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카야Kaya]
종족/성별 : 하프엘프 여성
클래스 : 전투 수녀(Battle Vestal)
“뭐…? 하프엘프 수녀라고?”
그리고 이 게임 시작하고 나서 처음 보는 종족과 클래스 조합을 목도하고 말았다.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