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세일럼(1)
솔깃한 이야기 하나 해줄까?
흔히들 어둠은 빛의 반대 개념이라고들 생각하지.
빛이없으면 어둡다고.
그건 맞는 말이야.
맞긴 맞는데….
꼭 빛이 없을 때만 어둡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
태양이 멀쩡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근처에 사람이 수 천 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 가장 어두운 곳에서 등장한 정체불명의 괴물은 그 존재만으로도 빛의 영역에 있던 우리를 순식간에 가장 짙은 어둠으로 끌어내렸지.
그 괴물이 뭐냐고?
글쎄.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그 어두워짐을 인지했다는 것 자체 하나만으로 지금 이렇게 그 때의 일을 회상할 수 있다는 거야.
아마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끌려갔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왜냐하면….
내가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거든.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하하.
안 재밌어?
하하하하하하.
이게 안 재밌어?
그야….
끼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아.
어서 와.
어둠을 뿌리는 공포를 무찌르는
용사님들?
“어우씨, 마지막 저건 언제 봐도 극혐이라니깐.”
의도는 모르겠지만 스킵이 불가능한 이 극혐 인트로를 본 게 벌써 몇 번짼지. 짧으니 다행이지만, 봐도봐도 마지막 저 좆같은 웃음소리만은 도저히적응할 수 없었다.
난 오늘도 어김없이 컴퓨터를 켜자마자 게임을 실행했다. 그 게임은 바로 턴제 로그라이크 RPG게임 <더 롱 테러TheLong Terror>.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괴물과 그 괴물을 숭배하는 괴집단에 의해 구석에 있던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고, 그 마을이 이상한 요새로 변질되었다는 것. 시간이 지나자 그 이상한 요새와 가까운 곳에서도 사람들이 미쳐가거나 사라지고 그에 비례해 끔찍한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 그래서 그 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정의감, 사명감, 욕망 등 다양한 감정과 목적을 가지고 그 요새에 찾아들었고 사람들은 점차 그 요새를 ‘던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
던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사람들은 용사라 불렀고 주인공은 그런 수많은 용사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주인공은 마음이 맞는 다른 용사들과 함께 던전을 돌파해 던전의 근원이 되는 공포를 처치하는 위대한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세계관을 대충 요약하자면 저랬다.
처음엔 세계관에도 당연히 흥미가 있어서 스토리도 꼼꼼하게 살폈으나, 그것도 플레이타임이 3000시간이 넘어가고 트라이 횟수도 몇 천 번이 넘어가게 되면 스토리 같은 건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요소에 불과했다.
고인물화가 되면서 집착하는 건 업적질과 타임어택 같은 자체 하드코어 모드로 게임을 더욱 더 매니악하게 플레이해서 클리어하는 것.
이 게임 자체가 상당히 난도가 높고 불친절하고 운빨좆망겜 소리 들을 정도로 운도 심하게 적용하는 게임이었지만, 취향만 맞는다면 말 그대로 시간을 녹여버리는 마법 같은 게임이었다.
그런 내 인생 최애게임이.
고인물짓도 슬슬 질려서 어떤 자체 페널티를 가지고 트라이를 해야 하나 아이디어에 한계가 올 때 쯤.
드디어 새로운 DLC가 등장한 것이었다!
상위 난이도 추가!
새로운 직업 추가!
새로운 던전 타입과 괴물 추가!
새로운 아티팩트, 아이템 추가!
즐길 거리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인트로가 끝나고 메뉴에서 DLC 적용을 끝마치고 난 뒤, 시작 버튼을 눌렀다.
“오.”
그러자 난이도 선택 창 맨 밑에 새로운 난이도 ‘The Longest Terror(가장 기나긴 공포)’가 음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고시발 고.”
얼마나 어렵고 지랄맞게 만들었기에 홍보영상에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는지 느껴보자고, 개발자님들.
<경고>
가장 기나긴 공포 난이도에서는 세이브, 퀵 세이브, 일시정지가 불가능합니다. 공략 완전 실패시 해당 데이터는 삭제됩니다.
가장 기나긴 공포 난이도 보정
- 괴물 최대 체력+++
- 괴물 최대 공격력+++
- 괴물 선제 공격(기습)확률+++
- 용사 정신상태(멘탈리티)---
- 용사 상태이상 획득 확률+++
- 용사 부정적특징 획득확률+++
- 용사 생과사의 경계 극복확률-
- 보물 획득확률-
- 보물 획득량-
“지랄났네. 대놓고 겁주고 있어 이거.”
그 전까지 난이도는 이런 경고창 따위는 없었다. 난이도 보정표만 있었을 뿐이었다.
근데 경고 내용도 내용이지만 난이도 보정표를 보니 이걸 깨라고 만든 건가, 개발자들이 신(新)난이도 만들다가 밸런싱하기 귀찮아서 밸런싱을 포기한 게 아닌가 싶었다.
- 상위 보물 획득 확률+
- 상위급 용사 조우 확률+
- 상위 아티팩트 획득 확률+
- 각성 확률+
그나마 긍정적 보정이 저거 4가지뿐이고, 그나마도 보정치가 다른 부정적 보정들이 극에 달한 것에 비해 말 그대로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뭐, 이러니까 도전의식이 안 생길 수가 없지.”
대놓고 깨지 마라고 게임 자체가 압박하는 수준.
그걸정면돌파하는 게 또 게임의 묘미이며 고인물의 사명 아니겠는가.
경고를 무시하고 진행 버튼을 눌렀다.
<경고>
한 번 실행하면 진행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왕 겁주는 거 제대로 주겠다는 거야 뭐야.”
가끔 어떤 게임에서도 하드코어모드를 진행하는 동안은 다른 난이도를 선택 못하는 옵션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이 난이도로 진행할 건데, 무슨 친절하게 경고를 두 번씩이나.
이 게임답지 않게 웬 친절?
다시 한 번 망설임 없이 진행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
“아 살 거야 말 거야! 안 살 거면 꺼져! 장사 방해되니까!”
“아, 아 예. 미안합니다.”
난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
난… 분명히 운빨좆망겜 DLC 최고난도를 진행하려고 했는데.
눈 떠보니 난 웬 시원찮은 가죽갑옷을 입고있고, 시원찮은 검을 매달고 있고. 거기에 냄새나게 생긴 험악한 아저씨한테 면박 받고 있는 것까지.
건물들은 왜 죄다 목조건물이고, 사람들은 다 외국인이고, 옷은 또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데?
혼란에 빠진 난 근처 가로수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은 굳이 빗대자면 중세 유럽 영지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고, 무기를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까 나한테 윽박지른 아저씨는 꽤나 으리으리한 판금갑옷을 입은 남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양손을 비비고 있었다. 판금갑옷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아저씨에게 금색 동전과 은색 동전 몇 개를 건넸다.
‘에이, 아니지? 설마 게임 키다가 졸았나? 내가 아무리 이 게임에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갈아넣었다고 해도 꿈속에서마저 이 게임 꿈 꿀 정도는 아닌데.’
처음엔 당황해서 못 알아차렸지만, 이렇게 멀리서 보니 저 아저씨… 던전으로 향할 때 필요한 잡템들을 파는 잡화상인과 똑같이 생겼다.
특히 아까 판금갑옷 남자가 랜턴, 랜턴기름, 약초, 붕대등을 배낭에 집어넣은 걸 보면 빼박이었다.
‘내가 미쳤지. 게임 좀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꿈을 꿔도이딴 암울한 세계를 꿈을 꿀까. 아무리 이 세계가 암울하고 끔찍하다 해도 그래도 게임 속 세계니까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직접 겪는다는 건 아무리 꿈이라 해도 사양이었다.
‘가만히 있다 보면 언젠가 깨겠지. 아 여기가 진짜 더 롱 테러 꿈이라면 기본 소지금도 있겠네.’
품을 뒤져보니 금화 4개, 은화 9개가 있었다.
“뭐야. 기본 소지금도 까인거야?”
그 직전 단계의 기본금은 금화 10개였다. 어설프게 4개 9개 있는 거보니 어떤 이유로 은화 1개를 까먹은 것 같았다. 아마 반절로 팍 줄어서금화 5개로 지급됐겠지.
참고로 금화 10개는 은화 100개와 같았고, 동화로는 1000개와도 같았는데 실제로 동화로는 거래를 안 했다. 현실에서 10원짜리 동전을 안 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여관이나 찾아봐야겠다.”
길거리 땅바닥에 앉아서 쉬는 것보단, 이왕 시간 때울 거 갑옷도 벗고 편히 쉬고 싶었다.
“어서오슈.”
“숙박 하루요.”
“혼자요?”
“혼자.”
“은화 5개.”
“여기.”
어차피 꿈속이니 나름 칼밥 좀 먹어본 용병 흉내를 내봤다. 여관주인은 뭐지 이 병신은 하는 표정이었으나 돈은 위대했다.
난 허름한 침대에 털썩 누워 꿈에서 깨고 어떤 조합으로 꾸려야할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잠에 들었다.
**
던전의 영향권 밖에서 던전과 가장 가까운 도시 ‘세일럼’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후에 이런 사람들을 모조리 용사라고 칭하는데, 어쨌든 용사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규모까지 확대되었다고 한다.
던전은 그 어떤 전쟁터보다도 끔찍하고 공포스럽고 위험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계속 찾아왔고 수요가 늘어나니 상인들 또한 늘어났다. 다른 도시들에 비해 가격은 바가지나 다름없었지만, 다른 도시까지 가는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밖에 없었으니….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딱 세 부류였다.
상인.
소문 듣고 이제 갓 유입된 불나방.
그리고 하루살이.
실력 없는 겁쟁이는 이 도시의 물가를 견딜 수 없을 것이고, 실력 좋은 자는 더 깊숙한 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와서 다른 도시로 떠나니까.
그러니까 난 굳이 따지자면 두 번째 부류에 속했고, 원래 게임이라면 튜토리얼을 통해 세일럼의 여러 시설을이용하는 방법이라던가 동료 용사는 어떻게 영입하고 관리하는지에 대해 나름 상세히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건 이 게임이 제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친절함이니까.
근데 내가 지금 왜 밑도 끝도 없이 ‘세일럼’의 설정을 되짚어보고 있냐면….
[Hendrik the TerrorHunter]
종족/성별 : 인간 남성
클래스 : 미정
레벨 : 1
최대체력 : 11
공격력 : 2~7
방어력 : 1
눈 뜨고 일어났더니 느닷없이 캐릭터 스테이터스가 눈앞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더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여전히 허름한 여관 방 안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진짜 이 게임을 끊던가 해야지.”
처음 프로필 작성할 당시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뭔가 있어보이게 지은 중2 갬성 듬뿍 들어간 캐릭터 이름에 더 롱 테러전용 캐릭터 스테이터스 까지.
정말 꿈속이 맞나? 아니, 아닌가?
그리고 그 혼란은 다시 한 번 갑자기 뜬 시스템 로그가 종식시켰다.
[Hendrik ‘유진’ TerrorHunter]
* The Long Terror, ‘가장기나긴 공포’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 최종목표 : 가장 기나긴 공포 난이도를 클리어
실패 시 : 한유진 사망
* 용사관리청에 가서 신규 용사대를 조직하기
* 용사훈련소에가서 클래스 정하기
* 용사지원소에 가서 첫 용사 동료 영입하기
* 용사훈련소에 가서 스킬 배우기
* 장비지원소에 가서 기초 장비 수령하기
* 잡화상에 가서 던전 탐사 물품 구매하기
제한시간 : 3일
“이게, 뭐야.”
단언컨대 더 롱 테러의 튜토리얼은 절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저 다양한 건물들을 한 번씩 강제적으로 클릭하게 만든 다음 그 용도를 알려주고, 마지막에용사지원소를 클릭해서 첫 동료를 무료로 영입하는 방식으로 끝을 맺는 방식이었을 텐데.
결정적으로 캐릭터 미들네임으로 들어간 ‘유진’이라는 이름과 실패시 한유진 사망이라는 페널티.
한유진은 내 본명이었다.
하하?
“…시발?”
감성은 이건 제발 꿈일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이성은 깨닫고 말았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한 번도 트라이하지 않은 악질적인 최고난도 ‘가장 기나긴 공포’ 속 세상에 떨어졌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