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첫경험씨리즈 <석류가 터질때>편, 2부
" 뭐라구? 다시 한번 얘기해 봐.. 빨리! "
" 쉬잇! 아빠.. 제발 목소리부터 좀 낮춰요..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놀라지
마시라구요.. "
" 아이구!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 놈의 새끼를 내가 당장... "
흥분한 강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걸 바지가랭이을 잡은 지혜가 울
쌍을 하고 애원한다.
" 아빠아! 제발.. 흥분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까딱하면 불쌍한 우리 유
라 죽어요...네에? "
" 으으으... 끄응! "
어저께 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비틀거리며 들어 온 유라가 방문을 걸
어 잠그고 누구의 얘기도, 방문도 허용안하고 아침까지 버티자, 서강표의
집은 하루아침에 초상집처럼 변해버렸다.
친구들이랑 베낭여행을 떠난 준호만 빼고 남은 식구들은 직장도 팽겨친 채
오전 내 유라를 설득한 끝에 조금전 언니인 지혜만 출입을 허용받아 갔다
온 것이다.
지혜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 벽쪽으로 누워있는 유라의 어깨에 손을 집는 순
간, 유라가 퀭한 눈으로 돌아보더니 갑자기 지혜한테로 안겨오며 울음을 터
트렸다. 한참을 서럽게 우는 동생을 따독여 자초지종을 듣고 난 지혜는 까
딱했으면 자기도 혼절을 할 뻔한 충격을 받았다.
TV뉴스나 신문사회면에서나 보았던 성폭행을 어린 동생이 당하다니... 그
것도 계속적인 협박까지 받고 있다고 하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언니가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만 했
다.
일단 동생을 이젠 아무 일도 없을테니 아무 염려마라고 따독여 주면서 안심
을 시킨 지혜는 유라가 지쳐 잠든 사이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궁금해하
는 연주에게 별일 아니라고.. 친구들하고 심하게 싸운 모양이라고 둘러대고
는 아빠를 밖에서 불러낸 것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 일은 아빠모르게 수습
할 수는 없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과연 예상대로 서강표가 길길이 뛰었지만, 지혜는 이미 그런 반응을 예상하
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빠를 설득해야만 했다.
" 그래 어떤 놈이라구?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봐... "
" 그게... 유라도 자세히는 모르는가 봐요... 그냥 비디오방 안에서 처음
봤는데, 처음에는 복면을 쓰고 있다가 나중에 벗은 모양인데 굉장히 험상궂
더래요... 대머리에 한쪽 눈은 거의 감긴 것처럼 붙었고.. 그쪽 눈아래 뺨
이 화상을 입었는지... 온통 우둘우둘한 게 흉칙스럽게 생겼대요.. 나이도
한 40가까이 되어 보이는데 정확히는 모른다고 하구요.. "
" 도대체 그 비디오 방에는 어떻게 가게 된거야? 유라가 그런데 다니는 애
가 아니잖아? "
"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협박받고 갔다고.. "
" 아니.. 협박받기 전에도 갔다며? "
" 네에.. 그건... "
" 이게 보통일이야? 아는대로 전부 이야기 해봐.. 빨리... "
" 이건.. 유라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약속한 건데... 아빠만 알고 계세요...
한 보름전에 미팅에서 소개받은 남학생하고 갔대요.. "
" 그럼 그 남학생하고 먼저 그 비디오방엔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
" 네에.. 아마 그런가 봐요... 그 장면을 촬영해서 협박했는가 봐요.. "
" 아이구.. 이 놈의 자식... 내가 그 동안 너무 믿고 내버려둔 게 잘못이지
... "
" 아빠아.."
" 그래... 알았어... 그런데 이 녀석이 왜 처음에 협박받았을 때 바로 이야
기 않고.. "
" 저도 그게 화가 나요... 저렇게 애를 망가뜨려 놓고 또 계속 협박이라니
.. 치가 떨려요... 아마 한번만 만나주면 끝날 걸로 알았나 봐요.. 아빠아
어떻게 해요? "
" 끄응... "
" 경찰에 연락하면 되겠지만, 잘못해 소문이라도 나면 우리 유라는.... 흐
윽! "
참고 있던 지혜가 울음을 터트린다.
" 으음... 지혜야.. 울음을 그쳐.. 운다고 될일이 아니잖니.. 니 말대로 냉
정하게 생각 좀 해보자... "
얼마 동안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던 지혜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고
개를 든다.
" 아빠! "
" 왜? " " 이에는 이라잖아요? 말을 들어보니 흉악한 놈인 것 같은데... 큰
삼촌을 한번 불러 보면... "
" 만기를? 으음... "
" 그래요.. 자꾸 많은 사람이 알게되는 건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삼촌이라면.. "
한 때, 조직폭력단의 행동대원이었던 만기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강표여서
동생의 좋지 않은 경력을 이용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면... 별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다음에 다시 오라는 날짜가 언제라고? "
지혜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만기의 눈꼬리가 험악지면서 목소리에 칼날이
선다.
" 이틀 뒤랬으니.. 내일 저녁이에요.. 내일 저녁 8시.. "
" 장소는? "
" 같은 장소래요.. 그 비디오 방 뒤 밀실... "
" 알았어.. 우리 시대엔 그래도 가릴 건 가렸는데... 더러운 놈... 내 이놈
을 그냥... "
" 삼초온.. "
" 왜? "
" 아시겠지만, 제발 뒷탈없이 조용하게 해결해 줘요.. 유라가 이왕 당한 건
되돌릴 수 없잖아요?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어서는 안돼요... 중요한 건 우
리 유라에요... 경찰을 부를 수도 있었지만, 소문안나게 해결하려고 삼촌한
테 연락한거에요... "
"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겠다구.. 내게 맡겨... "
이튿날 아침, 등교길을 지키던 만기는 정희수를 발견하고는 미리 봐둔 학교
강당 뒤 으슥한 골목으로 끌어냈다. 처음에 반항하던 희수는 유라의 이름을
대자, 고분고분 딸려 왔다.
" 니 놈이 한 짓을 모른다곤 않겠지? "
다짜고짜 멱살부터 치켜드니 또래중에서는 그래도 싸움깨나 한다는 희수도
대번에 자신의 적수가 아님을 알고 완력으로 대항할 마음을 버렸다. 나이는
약간 들어보이지만, 180Cm, 78Kg의 당당한 체격에 멱살을 치켜든 오른 팔이
무쇠팔뚝 같았던 것이다.
" 아저씨.. 하지만, 유..유라도 날 좋아 했단 말입니다.. "
" 퍼억!! " 한 주먹에 걸레처럼 나가떨어지는 희수... "
이 자식아! 좋아한다고 이제 여중학생한테 그 짓을 해? 일어나! 새꺄! "
" 아저씨..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할께요.. "
" 뻑!! "
" 엌!! "
옆구리를 채인 희수가 온 몸을 옹그리며 바들바들 떤다. 발길질 한번인데도
마치 차에 받친 것 처럼 숨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앞이 캄캄해 오는 것이
갈빗대가 두어 대 나간 것 같다.
" 일어나! 이 개같은 놈아! "
" 아.. 아저씨... 사..살려주세요.. "
얼굴표정과 목소리를 들어보고 어딘가 다친 것을 육감으로 느낀 만기는 더
패려던 손을 멈추고 바지춤에서 재크나이프를 빼 들었다.
" 철컥! "
" 아.. 아저씨.. "
새파래진 희수의 앞으로 닥아간 만기는 서슴없이 그의 바지혁대를 풀어 빼
내고 지퍼를 내린 다음, 오그리는 희수의 아랫배를 밟고는 나이프로 팬티까
지 찢어버렸다.
" 제.. 제발 살려주세요.. "
" 살려주지.. 하지만, 네 놈의 물건은 좀 끊어 가야겠다. 그런 물건은 없는
게 나아.. "
" 읔? 아이고.. 아저씨.. 그 것만은... 제발... 한번만.. "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애원하는 손을 걷어 차낸 만기가 한손으로 축 늘어진
희수의 심볼을 잡아들고는 나이프를 갖다 댔다.
" 아이고.. 사람 살려어!! 누구 없어요? 사람 살....읔! "
막다른 골목에 몰린 희수가 비명을 지르다가 다신 한번 턱주가리를 채이고
는 반쯤 세우고 있던 상체가 뒤로 벌러덩 나자빠진다. 다시 나이프를 희수
의 심볼에 댄 만기가 위로 치켜들자, 눈을 까뒤집은 희수가 그대로 혼절을
하는데, 고약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생똥을 지린 것이다. 기절한 희수를
잠깐 망설이는 눈으로 쳐다보던 만기는 결심한 듯이 나이프로 내려긋는데,
차마 자르지는 못하고 피부아래 5mm 정도의 자상을 내는 정도로 참고 만다.
" 악! "
찌르는 듯한 통증에 정신이 돌아 온 희수가 피가 번지기 시작하는 물건을
쥐고 신음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만기는 싸늘하게 한마디 더 내 뱉았다.
" 이 새꺄!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을 운 좋은 줄로 알어... 청춘이 아까워서
내가 참지만, 만약 앞으로 한번만 더 몽둥이를 잘못 휘두르고 다녔다간 그
땐 진짜 끊어버릴테니 그리 알고 행동 조심해... 개 새끼! "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119에 지나가던 학생이 다쳐 누워있다고 신고
하고는 그 자리를 떴다.
오후 8시 10분, 비디오방 길건너 골목에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30분전부터
지켜보았지만, 지혜가 이야기하던 인상의 사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한
만기는 단도직입적으로 쳐들어 갔다. 아직 초저녁이라 손님이 없어 카운터
에서 졸고 있던 파마머리가 우악스레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눈
을 치떤다. 덩치 큰 사내의 눈빛에서 뭔가 심상찮은 기미를 눈치 챈 것이다
. 바로 코 앞까지 닥아간 만기는 다짜고짜 파마머리의 머리채부터 끌어잡았
다.
" 악! 누구..... "
비명을 지르다 말고 파마머리가 숨을 훅 들이킨다. 눈 앞에 시퍼런 나이프
가 번떡인 것이다.
" 조용히 하는 게 신상에 좋아...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고분고
분 사실대로 말해! 한마디라도 거짓말을 하다간 바로 혀를 뽑아버릴꺼니까
... 알아 들어? 쌍년! ... "
" ...... "
정체모를 사내의 착 가라앉아 쉰듯한 목소리에서 살기를 느낀 파마머리가
공포에 질려 고개만 주억거린다.
" 대머리, 지금 저 안 밀실에 있지? "
" 어..없어요... "
" 가보면 알아.. 거짓말 아니지? "
" 네.. 네에.. 오늘 저녁 8시에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왔어요.. "
아마 대머리도 조심한다고 유라가 들어오는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
던 것 같다.
" 이름은? "
" 이름은 잘 몰라요.. 그냥 멍게라고 불러요.. "
" 그럼.. 지금 불러... 연락처를 모른다고는 않겠지? "
" 뭐.. 뭐라고 해요? "
" 이년아! 그대로 이야기 해! 내가 기다린다고... "
전화기를 끌어주자, 파마머리가 어디론가 연락을 하는데, 짙은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전화를 놓고 난 파마머리가 겨우 생기를 되찾
으면서 살색이 돌아왔다.
( 네 놈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제 볼장 다 봤어.. 간 크게 연락하라구? 여
기가 어딘줄 알 고... 어디서 빌어먹던 촌놈이... )
사실, 이 비디오방은 몇 안되는 조폭 직영가게였다. 수입은 크게 신통찮아
도 가끔 밀실도 이용하고 라이브포르노 테잎도 조달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강남고속터미널을 무대로 한 '승냥이'파의 비밀아지트중 한 곳이었던 것이
다. 파마머리도 젊었을 적, 포주노릇을 하다가 정부의 매춘 일제소탕으로
근거를 잃고 잠시 이 곳에 의탁하고 있었다.
" 손님 들어 있어? "
" 방.. 두 개..요.. "
" 내 보내...좋게 말해서... "
파마머리도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내를 하고나자, 잠시 후 연인인듯
한 두 쌍이 두 사람을 힐끗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이어 얼마 안가 문이 열
리는데, 먼저 스포츠머리에 잠바를 걸치고 몸매가 날렵해보이는 20대 후반
정도의 두 사내가 들어오고 그 뒤를 땅딸막한 대머리가 따라 들어오는데 한
쪽 얼굴이 온통 찌그러진 것이 첫 눈에 문제의 사내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만기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튄다. 대머리가 앞으로 나서지도 않고 양
쪽으로 갈라선 두 사내의 반 걸음쯤 뒤에 버티고 선채 먼저 입을 열었다.
" 날 보자는 친구가 자넨가? "
" ...... "
" 용건부터 말해... 넌 누구야? "
" 날 알 필요는 없고, 우선 네 놈이 가진 테잎부터 내 놔... 오늘 불러 낸
아이꺼 말이야.. 계산은 뒤에 하고... "
" 흐흥! 역시 오면서 짐작했던 대로군... 네가 오랜만에 날 즐겁게 했던,
예쁘고 싱싱한 그 애의 애비냐? "
" 이 자식이? "
흥분한 만기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자 앞선 두 사내의 무릎이 순간적으
로 살짝 내려앉는데, 동물적인 움직임이다. 만기도 속으로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 들면서 기회를 보아 선수를 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좋아.. 좋아.. 두세번 더 재미보고 거래를 하려 했는데... 이왕 보호자가
납셨으니, 아쉽지만 거래에 응하지... 내 놔... "
만기가 보복을 염두에 두고 한 '계산'이라 한 말을 거래로 짐작한 모양이다
. 일이 돌아가는 꼴이 예상밖으로 흐르자, 속전속결을 속으로 다짐한 만기
가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 돈이라면 없어... 좋게 말할 때 그냥 내 놔... 테잎말이야... "
" 얘들아! 들었니? 돈이 없으니 그냥 달래... 이거 좀 돈 친구아냐? 골통에
바람든 놈은 몽둥이 찜질이 특효지... 이거 봐 친구... 오늘은 인사만 좀
받구.. 내일 이 시간까지 큰 거 한 장 현찰로 가지고 와! 안 가져오면 모래
아침엔 확 뿌려버릴테니까... "
대머리가 한 발 뒤로 물러나자, 스포츠머리 둘이 얕보는 동작으로 한 발을
내 딛는 순간, 만기의 몸이 제자리에서 위로 잠깐 솟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발이 앞으로 쭈욱 뻗으면서 두 놈의 턱을 위로 차 올렸다. 왕년에 패싸움에
서 명성을 날린 '흑표'의 두발차기가 오랜만에 위력을 뿜은 것이다. 뒤이어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상황파악도 안된 대머리의 눈 앞이 '번쩍'하
더니 천장이 빙글 돌면서 테잎진열장 구석에 꼬꾸라져 버렸다.
아까부터 카운터에 턱을 받치고 촌놈의 비굴하게 비는 모습을 기대하며 흥
미진진하게 관전하고 있던 파마머리의 기억으로는 세 사람이 나가떨어지는
데 불과 2초정도 밖에 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제자리로
돌아 온 낯선 사내의 얼굴에 전혀 힘든 동작을 한 표정이 없는 것이다. 숨
소리도 크게 쉬지 않는다. 스포츠머리 둘중 하나는 이미 뻗어버렸고, 남은
하나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다 만기의 앞발질 한번에 다시 길게 드러누워버렸
다.
" 이 더러운 종자새끼.. 일어 나... "
" 퍼억! "
구석에 쳐박혔다 꾸물거리며 일어나는 대머리의 멱살을 잡고, 증오가 서린
만기의 펀치가 작렬하자.. 다시 꼬꾸라지는 대머리의 머리위로 테이프가 우
루루 떨어져 내린다. 그런 광경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파마머리가
정신을 차린 듯 카운터아래의 비상벨을 재빨리 눌러갔다.
" 처얼버억! "
" 어푸푸!! "
만기가 파마머리가 가져 온 물을 끼얹자 대머리가 고개를 흔들며 깨어났다.
남은 한쪽 눈두덩마져 퍼렇게 멍이 든 대머리의 얼굴이 밥맛없게 일그러진
다. 거기다 바로 눈앞에 새파란 빛을 뿜는 칼날을 보자, 어지간한 대머리도
공포로 흰 자위가 번뜩인다. 생긴 몰골 탓에 일찍부터 이 바닥에 굴러 왔지
만, 이런 괴물은 처음이다. 그래도 한 주먹한다는 행동대원 셋이 제대로 주
먹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뻗어버리다니...
" 셋을 셀동안 테잎을 가져와! 안 그러면 네 한쪽 남은 눈알마저 후벼 줄테
니까.. 난 성미가 좀 급해... 하나.. 두울... "
" 아..알겠습니다.. 드..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잠시만요 "
구겨진 몸을 억지로 추스리며 허겁지겁 안쪽 밀실로 향하는 대머리를 만기
도 뒤따랐다. 복도 구석 코너에 선 대머리가 벽을 한쪽으로 미니 소리도 없
이 컴컴한 밀실이 입을 벌렸다. 스위치를 켜보니 지하 아방궁처럼 널찍하고
장식품도 호화스럽다.
저 안쪽에 더블침대가 보이는데, 그 곳에서 조카인 유라가 몸쓸 짓을 당했
다는 생각이 들자, 허리를 숙이고 TV장식장 밑을 뒤지는 대머리를 그대로
찔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이값을 하는지 애써 참아내는
만기...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테잎을 받아 쥔 만기가 대머리를 앞장세우고
입구로 나오다가 흠칫놀란다. 어느새 들이닥쳤는지 10여명의 시커먼 양복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한 복판에 머리를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긴 갓 마흔 정
도의 점잖은 사내가 의자위에 앉아 있다.
앞장 서 가던 대머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면
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보스의 추궁이 겁도 난다. 평소
에 보스가 강조한 조직의 룰을 어긴 부분이 켕기는 것이다. 가운데 앉은 사
내의 양복과 코트사이에 걸친 흰 머플러가 산뜻하고, 올려다 보는 잿빛 눈
동자가 무표정하다. 직감적으로 상당한 거물임이 느껴진다.
" 선생! 우리 일단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우리 아이들이 실수를 했
다면 내 사과하리다. "
" ...... "
" 아시고 오신건지 모르겠지만, 난 이 종구라 하오.. 젊었을 적엔 '승냥이
'라 불리웠지요.. "
잠깐 망설였던 만기였지만, 이 상황을 그냥 얼버무리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자, 오래 묻어 두었던 자신의 정체를 노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
에 도달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난 서 만기라 하오.. 당신 말마따나 젊었을 적엔 남들이 '흑표'라 부릅디
다. "
" 억!! "
어떠한 사태에도 냉정을 잃지 않을 것 같던 승냥이파 보스 이 종구가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 정말.. 정말로 이십년전의 '흑표'... 종로의 그 유명한 '흑표' 선생이란
말씀입니까? "
" 글쎄.. 유명했던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로의 '타이거' 형님밑에
있었던 건 사실이오만.... "
" 형니임! 인사가 늦었습니다.. 승냥이 이종구 처음 뵙습니다. 절 받으십시
오.. "
이 종구가 그 자리에서 바닥에 두 손을 집고 이마를 갖다대자 벽쪽에 도열
해 있던 양복들이 동시에 바닥에 코를 박는다. 눈이 휘둥그래진 대머리도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엎드린 대머리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 이젠 죽은 몸인 것이다. 하늘 같은 대보스께서 저렇게 이마를 조아리는
거물의 가족에게 손을 댔으니...
" 어허! 왜 이러시오? 난 이미 그 세계에서 손을 뗀지 오래인 한낱 야인일
뿐이오.. 자.. 일어나시오... "
" 감사합니다.. 형님! 자.. 이리 앉으시지요.. 아니.. 참! 자리를 옮기십시
다. 이 곳은 너무 누추해서요... 야! 넙치! 이쪽은 네 구역이지? 가까운 곳
에 자리부터 펴! 귀한 어른이시다! "
미처 만기가 뭐라기도 전에 양복 몇이 바쁘게 뛰쳐나간다.
" 아니! 형님!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런... 이봐 족제비! "
" 넵! 형님! "
" 밖에 멍게 있지? 이리 끌고 와!! "
비디오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꽤 호화스런 룸살롱 VIP실 안이다. 허리를 잔
뜩 구부린 대머리가 들어오는데, 들어오면서부터 벌써 얼굴빛이 사색이다.
" 멍게! 네 이놈!! 이 분이 말씀하시는 게 전부 사실이냐?.. 양가집 여중학
생을 폭행하고 테이프까지 찍어두었다며? "
" 보스! 주.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
허리를 무릎까지 굽히는데 다리를 벌벌 떨고 있다.
" 이 노옴!! 내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어떤 일이 있어도 양가집 부
녀자나 미성년자는 건드리지 마라 그랬거늘... "
" ....!!.... "
" 흑표 형님! 그래 테이프는 받으셨다구요? "
" 그래! 내가 갖구 있네.. "
" 그것말구 또 있을겝니다.... 멍게!! "
" 네..네! 보스! "
" 몇 개 더 복사해 뒀어? "
" 하..하나 더 있습니다.. "
" 지금 당장 갖구와! 10분이내다.. 꺼져!! "
숨을 헐떡이며 바치는 테잎을 정중히 만기에게 건넨 승냥이...
" 이젠 없을 겝니다.. 그리고 형님! 모든게 저의 불찰입니다.. 제가 사과드
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 식구가 저지른 일이니 나머지는 제가 다
스리도록 허용해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 종구가 응접탁자에 양 팔을 집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 으음! 알겠네.. 다른 잡음만 없도록 부탁하고 난 기다리는 분이 계셔서
이만 일어서야겠네.. "
" 잠깐만요.. 형님! 잠깐만 말미를 주십시오.. 형님 보시는 앞에서 마무리
할 것이 있습니다. "
일어서려던 만기가 할 수 없이 궁둥이를 다시 내렸다. 이종구가 뒤를 돌아
다보며 눈짓을 하자, 어느새 준비했는지 탁자 맨 끝에 흰천이 깔리고 작두
가 놓여진다. 대머리의 다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후들거린다.
" ...발목!! "
차가운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양복 둘에게 겨드랑이를 잡힌 대머리가 끌려
나오는데.. 거의 실신한 표정이다.
" 가만... 내가 자네를 동생이라 불러도 되겠는가?.. "
" 네! 영광입니다! 형님!.. 그리고 이왕 동생이라 불러주셨으니.. 가끔씩은
들리셔서 제가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간청드리겠습니다.. "
" 알겠으이.. 그러나 난 어디까지나 야인일 뿐이네.. 그리고, 동생! 나도
부탁하나 함세.. 사실 그 아이는 나하고 핏줄이 섞인 아이네.. 생각같아서
는 죽여도 시원찮은 놈이지만, 혹 나중에라도 그 아이가 이런 체벌을 알게
된다면.. 그리 좋아할 것 같지는 않네..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도 뭣하니 작
은 걸로 바꿔주면 안되겠나.. "
" 아!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됩니다.. 알겠습니다. 형님!..
멍게 네 이놈! 좋은 형님을 만난 덕분으로 알아라.. 족제비! 저 놈의 오른
손 검지를 잘라서 형님께 바쳐라.. "
만기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강표는 앞에 놓인 검은 테이프 두 개를 착
잡한 표정으로 내려다 본다.
" 이번엔 동생의 신세를 졌네... 자네.. 부탁하나만 더 함세... "
" 네.. 형님 말씀하십시오.. "
평생을 형에게서 구박만 받던 만기였던지라 이번 일은 비록 조카는 안됐지
만, 뒷수습을 위해 쫓아 다니는 발걸음은 무겁지만은 않았다. 처음으로 형
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 이제 우리 유라의 마음상처를 다스리는 일만 남았네... 해서... 이 번일
은 자네와 나, 지혜 셋이만 알고 무덤까지 가져가야하는 비밀로 해 주게...
제수씨까지도 말이네... "
" 아무렴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형님! "
" 유라야... 유라야?.. 언니야... 잠깐 일어나 봐... " 오
늘도 점심때 억지로 죽 반그릇만 넘긴채 까부라져 누워 있는 유라를 간신히
일으킨 지혜는 창가로 데려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꺼멓게 탄 눈으로 바라
보니 앞 정원에서 아빠가 뭔가 태우고 있다. "
모두 깨끗이 해결됐어.. 유라야... 지금 태우는 게 널 찍었다는 테이프란다
. "
바라보고 있던 유라의 눈에 또 눈물방울이 맺힌다.
" 이번 일은 나하고 아빠만 알고 아무도 몰라... 엄마나 준호도 모르고 있
어... 아빠가 직접 나서서 전부 해결하셨단다. 아빠가 고생많으셨어... 그
러니 이제 아빠를 봐서라도 과거를 잊고 빨리 정신을 차려주었으면 해...
예전의 밝고 명랑한 우리집 막내 유라로 말이야... "
돌아선 유라가 지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 언니! 하지만, 난 예전의 유라가 아니잖아... 어떻게 하면 좋아.. 흑..흑
..흑... "
" 괜찮아... 뭐가 달라졌니?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어... 넌 길가다 폭행을
당한거 하고 꼭 같은 거야.. 육체적 상처야 얼마 지나면 다 아물어.. 문제
는 니 마음이야... 유라 네가 스스로 네 자신을 학대하고 번민하면서 그 일
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으려는 그게 더 큰 문제란다.. 언니가 하는 말, 이해
가 되니? 유라야? "
지혜는 억지로 고개를 꺼떡이는 유라를 꼬옥 안아주었다.
이틀후, 유라는 다시 몸을 추스려 학교로 나가서, 동급생들이 모두 얼마나
아팠냐고 걱정해 주는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제자리로 차츰 돌아 온 자신을
느꼈다. 아니, 한가지 변화가 있었다. 유라는 잘 몰랐지만, 유라의 나흘간
의 결석과 희수의 입원으로 무언가 감을 잡은 선영이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떠나버린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어린 유라에게 그 엄청난 사건은 그렇
게 쉽게 잊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날밤도 유라는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자마자 다시 그 날의 악몽이 테이프를 재생하는 것처럼 되살아나 비
명을 지르며 일어나고 말았다.
" 저... 서유라누나가 누구에요? "
학교 정문을 얼마 앞두고 명희랑 걸어가는 유라의 앞에 왠 꼬마하나가 가로
막는다.
" 응! 난데... 왜 그러니? "
" 어떤 아저씨가 이거 주고 오래요.. 혼자 보래요.. "
흰 봉투를 하나 쥐어주고난 꼬마는 그대로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희수와
의 뜨거운 데이트가 있은지 이틀 뒤다. 무언가 별로 좋지않은 느낌이 들어
호기심을 보이는 명희를 떨치고 일부러 화장실까지 가서 펼쳐 본 유라는 그
만 종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