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은채린-- >
*사파 마두가 가장 두려워 하는 건 정파 무인이고, 정파 무인이 두려워 하는 건 사파 마두이지만, 무림과 연이 없는 일반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건 녹림십팔채였다.
녹림이라 하면 보통 사파의 궤에 넣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녹림은 일반적인 사파와 다른 구분점이 필요한 이들이었다.
스승이 없고, 독문 무공도 없다. 일단은 무림 안에 속한다 보긴 하지만, 무림과 관은 상호불가침이라는 관습은 녹림과 무
관하였다.
관군은 기회가 된다 하면 녹림 토벌에 힘을 기울였다. 녹림 또한 대항하거나 숨으며 관에 대한 대비를 착실히 하였다.
관이 녹림을 토벌하고자 하는 건 그들이 일반인은 물론 중원 전체에 대한 큰 해악이기 때문이었다.
녹림 산채가 있다는 산은 봉산封山하지 않아도 사람이 들어가지 않았고, 주변 마을은 오가는 사람이 끊겨 조용히 죽어가 폐가만이 남았다.
다른 문파와 다르게 이렇게 관과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는 녹림은 그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공포였지만, 지금 이곳 동천목산东天目山의 용골채龍骨砦는 피와 눈물을 흘리는 녹림도로 가득하였다.
*
"이것으로 모두 모였나."
"그, 그렇습니다···."
용골채의 채주는 절뚝거리며 걸어나왔다. 주변에는 포박된 산채원들이 엎드려 있었다.
채주에게 말을 건 여인은 백색 무복의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주위를 훑어보더니, 채주에게 말했다.
"산채원이 별로 없군."
"제 인덕이 모자라 그렇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많아 봤자 좋을 것 없는 쓰레기들이니 죄송할 건 없고."
채주는 울고 싶었다. 오십이 넘던 산채원 중 지금 이곳에 있는 건 단 여섯 뿐. 죽일만큼 죽였으면 그만해도 되겠건만. 이 여인은 팔다리가 부러져 쓰러진 부상자마저 한 곳에 모아 묶어두라 명을 내렸다.
채주는 그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섬광이 비칠 때마다 쓰러지는 산채원들. 이는 채주가 평생 살며 봐온 광경 중 가장 무서운 광경이었다.
자신 또한 무림인이고 어디 가서 꿀리는 실력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오늘 본 진짜 고수의 무위는 차원이 달랐다. 수십이 넘는 사내를 도륙하고도 피 한 방울 안 묻은 저 백색 무복. 허수아비를 베어도 보풀이 묻기 마련인데, 저 여인은 정말 차원이 달랐다.
"넌 왜 가만히 있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서걱―여인의 말에 채주가 대답했고, 채주가 대답하자 섬광이 일었다. 반으로 갈라진 채주의 하의. 채주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인은 채주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
"너도 묶여야지. 왜 가만히 있어?"
채주는 여인의 말에 토를 달지도, 반말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다. 두려움에 젖은 채주는 묶인 산채원에게 밧줄과 팔을 내밀었고, 반다경 정도 고생한 뒤에야 겨우 묶였다.
채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 여인이 포박 당하라 말할 때만 해도 활로가 보이는 듯 했다. 인근 관아는 모두 자신들과 한통속이다. 여인이 가고 나면, 사람을 잘못 잡았다며 알아서 풀어줄 게 너무나도 뻔했다.
하지만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손만 묶어 끌고 가기 쉽게 만들자 여인은 분노하여 채주의 상의를 잘랐다. 귀신 같은 솜씨 덕에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무서웠다.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고 옷 한 조각씩. 지금 채주는 알몸이었다. 앞으로 잘못을 더 저지르면 어떻게 될지 알고 싶지 않았다.
여인은 채주가 묶이자 다시 주변을 훑어봤다. 주변에 다른 누군가 있나 확인을 하는 모양새였지만, 이 동천목산에, 다른 곳도 아닌 용골채의 산채에 다른 누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채주는 여인의 눈에서 도는 스산한 기운을 느꼈다. 주변 시선의 확인. 걷지도 못하게 포박한 몸뚱이.
"아···."
채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무인 중 몇 명은 사람 죽이는 게 취미라고 들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게 취미인 놈도 있다 들었다.
채주가 보기엔 이 무인이 그 짝이었다. 살려둔 건 고문하기 위함이고, 주변을 살핀 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아아,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단칼에 죽지 못한 건 행운이 아닌 죗값의 셈이었구나.
채주는 절망하여 눈물을 흘렸다. 농꾼으로 살던 과거가 떠오
르고 첫 사랑이던 링링이 떠올랐다. 이게 바로 주마등이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여인이 말했다.
"세워."
"무, 무슨 말씀이신지···?"
채주는 눈물을 멈추고 갸웃거렸다. 세울 게 있어야 세우지 않겠는가.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채주는 그 끝을 확인했다. 양물. 지금껏 수많은 여인의 몸에 들어간 검붉은 양물이 섬섬옥수의 종착점이었다.
채주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다시 확인했다. 여인의 손이 향한 건 자신의 양물. 양물이 아니라고 쳐도 결국은 고환. 어쨌거나 자신의 음물淫物을 향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채주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여인에게 물었다. 그로서는 제발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물음이었다.
"여협의 말씀은 그러니깐 제 양물을 세우라는···."
"… 그렇다!"
채주는 속으로 깊은 탄식을 흘렸다.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 이 미친년은 사람의 양물을 잘라 수집하는 미친년이구나. 그냥 앙물도 아닌 핏대를 올려 빳빳히 선 양물을 좋아하는, 그런 미친년이구나.
채주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양물이 잘릴 생각은 없었다. 고문을 당하면 당했지, 양물이 잘리는 일은 최대한 늦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 이건 혼자서는 못 세우는 물건입니다요."
"···어떻게 해야 세워지는데?"
"손으로 훑던가··· 빨아주던가 하여···."
"미, 미친···. 저놈들한테 해달라고 해!"
여인은 다른 쪽을 가리켰다. 묶인 채로 신음하는 산채원들. 하나 같이 성한 곳이 없었고, 똑바로 생긴 놈이 없었다. 우락부락한 몸집. 팔다리는 물론 항문까지 털이 난 털복숭이들.
저런 놈들이 자신의 물건을 훑어서는 두드러기가 날 게 뻔했다. 채주는 죽더라도 그런 일은 막고 싶었다.
"남자의 물건은 같은 남자가 세울 수 없습니다···. 그, 음양의 이치라는 게 있어서···."
"······."
여인은 침묵했다. 채주는 그게 포기를 뜻하는 침묵이기를 바랐다. 채주 자신은 죽더라도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놈들도 그런 마음이라 장담할 순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 가냘픈 미동美童을 탐하던 산채의 부채주. 그도 살아서 묶여 있었다. 미동만 탐하는 걸로 보아 자신은 취향이 아닌 모양이지만, 목숨이 걸렸다면 분명 자신의 하물을 세워낼 놈이었다.
채주는 생각을 마치자 두려움에 몸서리 쳤다. 곱게 죽는 건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동성애자에게 하물이 세워지고, 여인에게 잘리는 건 경우가 달랐다. 차라리 그 반대였으면 모르겠다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씨발."
여인의 입에서 나온 짧은 욕지기. 채주는 조용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역겨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더니, 자신에게 다가왔다.
"죽기 싫으면 빨리 세워라."
"네, 네?"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채주는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하물을 향한 여인의 손. 부드럽고 작은 손이 자신의 하물을 휘감았다.
채주는 놀라 주위를 돌아봤다. 눈이 휘둥그레진 산채원들. 그들은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본다는 듯 자신과 여인을 보았다.
믿기지 않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럽게 훑어대는 여
인의 손. 수음手淫이 장기라는 창기도 이정도로 강렬한 쾌감을 주진 못했다. 산채원을 순식간에 토막낸 여고수가 쪼그려 앉아 하물을 만지다니. 이 놀라운 상황에 하물은 순식간에 고개를 들었다.
채주는 이제 잘리겠거니 싶어 머리를 떨궜다. 잘리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물건을 보았다. 태어난 이래 평생 함께 해오던 오랜 친구. 그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채주의 하물은 사라졌다. 여인의 몸속으로, 음문 안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채주가 고개를 들어 보려 하자, 여인이 말했다.
"보면 죽는다."
채주는 그 말에 쳐들던 고개를 다시 숙였다. 두툼한 음문은
위로, 아래로 역동했고, 그에 맞춰 급격한 쾌감이 머리를 흔들었다.
여고수라 그런 것일까. 많은 여인을 안았지만 이만한 쾌감을 얻은 적은 없었다. 부드러운 입구. 그와 대비되는 좁은 속살. 자신의 위에 걸터 앉은 여인은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승마라도 하는 것처럼, 원을 그리며 방아를 찧었다.
채주는 금방 사정했다. 짜내는 듯한 여인의 움직임에는 채주도 당할 도리가 없었다. 채주는 여인이 천천히 일어나는 걸 보았고, 여인의 안에서 뚝뚝 흐르는 정액을 보았다.
일어난 여인은 칼을 뽑았다. 사정의 여운도 가지 않은 채주는 담담히 그 모습을 보았다.
드디어 나를 죽이는구나. 그래, 나 정도면 나은 편이지. 나는 한 번 하기라도 했지, 다른 놈들은 구경만 했지 않은가. 이정도면 호강이다 호강. 그래, 곱게 가자.
서걱―여인은 칼을 휘둘렀다. 잘려진 밧줄. 채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인을 보자, 여인이 말했다.
"앞으로 자지중독 은채린이라는 이름을 단단히 기억하여라! 용골채를 박살낸 이 자지중독 은채린을!"
검을 든 늠름한 자태. 아리따운 곡선과 맑은 목소리. 천상의 선녀와도 같은 그녀는 몇 번이고 이리 말한 뒤 산채를 떠났다.
자지중독 은채린. 너희들의 몸에 난 상처를 볼 때마다 나를 떠올려라. 자지중독 은채린. 마인의 정은 모두 내가 취할 것이니.
지금 이곳 남성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잊지 말라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자지중독 은채린. 오늘의 일은 평생의 기억이었다.
*
"씨발씨발씨발씨발, 개씨발!"
아미파의 속가제자이자 정천맹 질풍대의 대주, 백룡검 은채린은 고함을 지르며 용골채를 뛰쳐나왔다.
검후를 넘을 천하의 기재. 우아한 자태와 귀신 같은 실력이라 찬양 받던 그녀의 입에서 나올 소린 아니었지만, 방금 그녀가 한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 산채를 궤멸시켰다. 그러곤 채주를 겁간했다. 좋게 말해도, 나쁘게 말해도 사실은 이와 같았다.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지만, 이 일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왜! 내가 씨발 왜!"
그녀는 질풍 같은 경공술을 발휘하며 산을 내려왔다. 후지기수를 넘어 절정의 자락에 닿았다는 그녀는 위명에 걸맞는 경공을 보였다. 날아드는 백룡처럼, 그녀는 산길을 날아 용골채에서 도망쳤다.
모조리 죽이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를 거역할 수 없었다.
길을 가다 마인을 만나면 쓰러트리고, 그를 겁간해라. 겁간하면, 자지중독 은채린이라는 위명을 기억하라 전하고 떠나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항주에 간 그녀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어째선지 기억을 제대로 할 순 없었지만, 그 뒤로 그녀는 이렇게 변했다. 마두를 만나면 그를 겁간하기 위해 칼을 휘두른다. 겁간이 끝나면 외친다. 자지중독, 은채린의 이름을.
============================ 작품 후기 ============================
* 많은 분들이 개그 에피소드가 아니냐 물었던 에피소드입니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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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은채린-- >
*은채린은 이변의 시작을 떠올렸다.
정신을 잃고 항주의 객잔에서 깨어난 그녀. 분명 무언가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기억할 수 없었다. 몸을 면밀히 살펴도 아무 흔적이 없어 착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사망광의 당사영을 찾기 위해 흔적을 살폈다.
그런 와중이었다. 겁도 없이 자신에게 소매치기를 시도한 청
년.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놓아줬을 그녀였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달랐다. 그녀는 청년의 멱살을 잡아 뒷골목으로 끌고 간 뒤, 그를 겁간했다.
그녀는 끝난 뒤에야 알았다.
자신의 입에서, 소매치기를 할 때면 자지중독 은채린의 공포를 떠올려라, 라는 터무니 없는 소리가 나왔다는 것을.
내가 무슨 일을 한 거지? 자, 자지중독? 백룡검이 아닌 그런 멸칭을 내가 스스로 말했다고?
겁에 질린 그녀는 청년에게서 도망쳤다. 자신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싶은 그녀는 방금 일을 잊기 위해 객잔에 들려 술을 청했다.
그리고 객잔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취객을 볼 때, 그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릴 땐 아까와 같은 상황이었다. 술을 마시면 날 떠올려라, 네놈의 하물을 네 번이나 사정 시킨 이몸의 위명을! 내가 바로 자지중독―
"씨발!!!"
그녀는 한을 담아 고함을 질렀다. 이렇게 한 명씩 겁간할 때마다 기억이 떠올랐다. 당사영의 흔적을 찾아 보고하려는 찰나 자신에게 다가온 남성. 평범한 사람 같았기에 지나치려는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 모두 그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진 몰라도 모두 그가 한 짓이었다.
하지만 딱히 무언가 할 순 없었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 명을 겁간할 때마다 기억이 돌아왔지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가 어디에 살고, 이 사술을 풀어내는 방법을 들을 정도로 겁간하면, 자지중독이라는 이름이 전 무림을 울리고 있을 테니.
결국 그녀는 대책 없이 떠돌고 있었다. 항주처럼 사람이 많은 곳엔 있을 수가 없었다. 범죄도 많고 소문도 빨리 퍼지는 도시는 도망쳐야만 했다.
은채린은 이를 아득 깨물었다. 정천맹의 떠오르는 신성이 누군가를 겁간했다는 소식이 돌면 죽는 수밖에 없다. 자신만의 오명이면 몰라도, 이건 사부와 사문 전체를 욕 먹이는 일이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뜬소문처럼 들리도록 노력했다. 한 곳에서 한 명 이상 소문을 말하지 않도록. 그녀는 당사영의 수색도 포기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대책도 없고 정처도 없는 여정만이 그녀가 살길이었다.
전력으로 경공을 발휘한 그녀는 산을 빠져나왔다. 한적한 대로. 중원의 어디에나 있는 넓은 평야를 걸으며 그녀는 대책을 강구했다.
소문이 덜 나게 하는 방법으로는 끝을 볼 수 없었다. 자신에게 생긴 변화. 짧은 악몽이면 몰라도 현실이라면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만 했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첫 걸음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문제를 알고 있다. 허나, 아는 것만으론 부족했
다. 언제고 이렇게 떠돌 수는 없으니 끝을 내야만 했다.
소문이 나지 않을만한 곳. 도심의 범죄자가 아닌, 깊은 산골의 악적들. 방금 만난 녹림 산채와 같은···.
"아!"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그렇다, 녹림이 답이었다. 이들만한 대상은 더 없었다.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느껴지는 이들이지만 그들이 적격이었다. 남자들만 가득하고, 산채에서 나오면 관에 쫓겨 죽으니 소문이 돌 수도 없다. 그들끼리는 몇 번 언급하겠지만, 녹림 안에서 무슨 말이 돌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은채린은 이제야 희망을 찾았다. 녹림십팔채. 방금 토벌한 용골채와 같은 산채를 더 찾아야만 했다. 호골채는 청수문에
서 토벌했다 들었으니 남은 산채는 열여섯. 이중 가까운 산채를 떠올린 은채린은 서둘러 발을 놀렸다. 백룡검의 이름에 걸맞는 신들린 움직임이었다. *
"하아, 어때, 이제 기억하겠는가? 내 위명을···."
"아, 알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채린은 미소를 지었다. 두 개의 산채를 더 궤멸시키며 성교를 하자 기억이 거의 다 돌아왔다. 수수께끼의 사내는 스스로를 왕사라 소개했다. 그녀에게 걸은 건 사술이 아닌 최면술이고, 이를 깨기 위해선···.
은채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아직 이게 남았다. 최면술이란 걸 깨기 위한 방법은 날 듯 안 날 듯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녀
는 생각에 잠긴 채였지만 하반신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익숙한 체위, 익숙한 움직임. 그녀는 왠지 모르게 한 산채에서 세 번 이상의 성교를 할 수 없었지만 횟수에는 문제가 없었다. 한 명과 여러 번 성교를 한다고 추가로 기억이 오진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깔린 사내의 정을 짜내기 위해 힘을 다했다.
"하아, 색욕이 차오를 때면 날 떠올려라···. 자지광란··· 은채린의 이름을···."
"알겠습니다! 분부하신대로 기억도 하고, 소문도 퍼트리겠습니다! 암 시킨대로 해야죠. 암, 암."
"좋다, 좋아···. 하아···."
그녀는 음문에 남성을 찔러넣는 사내를 보며 달띤 신음을 내었다. 산에 숨은 녹림도를 찾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근방의 소문을 들을 수 있으면 몰라도, 인적이 드문 곳만 다니니 더욱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찾다 보니 어느덧 산채를 찾으면 기쁨을, 성교를 하면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을 가득 채우는 충만감. 사내 위에 올라타 내려다 보며 느끼는 황홀감. 그녀는 이를 더 느끼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싸, 싸겠습니다."
"그래, 어서 가득 내 안을 채워라···."
사내의 말에도 그녀는 거부감 없이 토정을 받아들였다. 하반신을 스며드는 뜨거운 기운. 그녀는 여운에 잠겨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
"잊지 말고 내 위명을 퍼트려라. 그 누구도 감히 내 앞에서 정을 담고 다닐 수는 없으니."
"어이구, 좋다마다요. 다음에도 이곳을 지나치실 거면 이 아랫 마을의 구일을 찾아 주십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이고, 이게 왠 횡재람."
사내는 바지를 추켜올리곤 먼저 떠났다. 그녀는 그를 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벌써 세 번이나 정사를 치른 그에게선 다음을 기대할 수 없었다.
혈랑채를 궤멸시키고 내려오는 와중 발견한 산채의 잔당. 지게에 나뭇짐을 올린 것으로 보아 일반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예리한 눈으로 볼 땐 절대 아니었다.
물론 사내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 말하긴 하였다. 다만 그도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옷을 벗고 궁둥이를 흔들며 정액을 애걸하자 그가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 하루는 나도 혈랑채요. 이 말을 들은 그녀는 확신했다. 역시 잔당이구나.
그렇다면, 정을 받아야 하구나.
이런 과정으로 숨은 잔당마저 찾아낸 그녀는 뿌듯함을 느꼈다. 최면을 풀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결국은 모두를 위한 일 아닌가. 나도 좋고 상대방도 좋고 산채가 줄어드니 모두가 좋다. 이런 행복한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건 축복된 삶이자, 보람찬 삶이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지자 슬슬 도시로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한 둘 정도만 더 거사를 치르면 기억이 날 터. 소문이 무섭기는 하다지만, 극구 부인하면 어찌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결심한 그녀는 가장 가까운 소주에 들어섰다.
며칠 걸어 소주에 도착한 그녀는 가장 먼저 객잔을 찾았다.
항주와 더불어 사람 많기로 유명한 이 도시는 객잔 또한 사람들로 빼곡하였다. 그녀는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삶이다. 사람이 무서워 도망치는 건 제대로 된 삶이 아니다. 이렇게 주변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 소식도 듣고 하는 게 바로 진정한 삶―
"이보게들, 그 소문 들었나? 자지광란 은채린이라는 색녀가 나타났다네."
"어이구, 자네만 들은 게 아닐세 그려. 요즘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미모는 천하의 미인이고, 몸매도 죽여주는 색녀라니. 이것 참, 세상 참 좋아졌어 그래."
"하하, 나도 그 소문을 듣긴 들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실 같지가 않군. 그렇게 못난 것 없는 사람이 뭐가 부족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하고 교접을 해주겠나? 듣기로는 대단한 무
인이라고도 하던데."
"왜, 그런 것도 있지 않는가. 여인과 동침을 할수록 강해지는 무공이···. 그 여인도 비슷한 걸 배웠나 보지. 그래, 사내의 정을 받을수록 무공이 강해진다거나 하는."
"그렇다면 참 다행이군. 그 자지광란 은채린이란 여인이 미모가 뛰어나 가랑이를 벌리면 다들 해주는 거지, 끔찍한 추녀였으면 그럴 리 없지 않겠는가? 무림인이란 족속은 무공에 미친놈들이니 해주지 않으면 강간이라도 할 텐데···. 원, 소름이 끼치는군. 정을 탐하는 추녀라니. 당하면 어디 가서 말도 못하겠어."
은채린은 가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들의 말이 은채린에 대한 음담패설로 흘러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이변을 알아챈 건 점소이였다. 주문한 음식을 놓는데
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흐릿한 초점, 멍한 표정.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여기, 이보슈. 예쁜 소저가 그리 있으면 누가 잡아가오.
"잡혀가면 어떻게 되지?"
"어이쿠, 깜짝이야."
점소이는 조용히 울린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것 참, 대답을 할 거면 표정이라도 풀 것이지. 굳은 얼굴로 말하는 여인은 귀신처럼 보였다.
"그 뭐시냐, 험한 꼴을 당하지 않겠소? 아, 칼을 차신 것 보니 무림인이구만. 그러면 뭐 당하지 않겠고. 음식 맛있게 드쇼. 우리 객잔이 자랑하는 요리니."
"하, 하하하···."
점소이는 공허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무림인이란 족속 중 멀쩡한 사람은 드물어도 너무 드물단 말이야. 에이씨, 주인장한테 칼 찬 손님은 받지 말자 말이라도 해야지.
점소이가 이렇게 생각하며 다른 탁자로 갈 때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험한 꼴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꼴이지?"
점소이는 한숨을 쉬었다. 말 한 마디 잘못해서 무림인에게 트집 잡히는 것만큼 더러운 일은 없다. 점소이는 사실대로 말해주자 생각했다.
"그, 있잖소. 사내와 여인이 하는 일을 좀 강제로 당한다거나 하는. 소저는 물론 다를 것이오. 소저처럼 강한 무인은 감
히 남자에게 당하지 않으니. 이제 됐소?"
점소이는 여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얼른 사라졌다. 그가 투덜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은채린은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남자에게 당하진 않지. 남자 위에 탄 건 당한 게 아니야. 그래, 난 당한 적 없단 말이야.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꼴을 알아차렸다. 누런 정액이 군데군데 물든 반쯤 헤진 무복. 이 붐비는 객잔에서 자신의 주변에만 사람이 없는 이유를 드디어 알았다. 몇 날 며칠을 사내의 정을 찾아 떠돈 그녀에게선 다가가기 힘든 향취가 물씬 풍겼다.
무공이라, 내가 무공을 왜 배웠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껏 수없이 묻고 답을 들은 질문이지만 이번엔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백룡검 은채린. 자지광란 은채린.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이때 그녀 머릿속에 변화가 일었다. 돌아온 기억. 걸린 최면술을 풀기 위해선 호가장이란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녀는 다른 수를 찾을 수 없었다. 힘없는 걸음은 조용히 객잔을 빠져나왔다.
떠나는 그녀의 뒤로 사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은채린이란 이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지 않나?
자지광란 은채린을 어디서 또 들어?
그 뭐시냐, 있잖은가. 백룡검 은채린인가 하는···. 동일인물일 린 없지만 흔한 이름도 아니잖은가?
============================ 작품 후기 ============================* 추천-선작 비율은 1/2로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연재 초기부터 쭉 이 비율을 유지하니 좀 신기한 기분이네요. 의미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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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은채린-- >
*명예는 무림인의 모든 것이었다. 정파 무인은 당연히 그랬고, 명예보다 실익을 중시한다는 사파 무인도 명예를 경시하진 않았다.
무인의 명예는 곧 무명武名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소림의 고승도 무공이 부족하면 바깥의 중이지 무림의 승려라 보진 않았다. 이는 도인도, 상인도 마찬가지였다. 무인에게 있어 무명은 필요불가결. 무명이 없는 자는 무인이 아닌 자와 같았다.
고강한 무공이 곧 고명高名인 것은 아니었다. 사악한 마두의
무명은 그가 쌓은 죄악의 증거일 뿐 그를 빛나게 해주진 않았다. 색마의 무명도 피차일반. 색마가 여협을 정면에서 꺾고 취했다 한들 색마에겐 색마의 낙인만 찍혔다. 명예를 버린 자에겐 그 어떤 무명도 논외. 이는 무림의 당연한 법칙이었다.
무림은 중원과 동떨어진 세상이 아니었다. 중원의 무인들이 서로 엮인 관계와 인연. 그게 바로 무림이었다.
그렇기에 노인은 무인을 처리하고자 했다. 무림 멸망, 이는 다시 말해 무인 척결이었다.
노인이 이를 위해 택한 방법은 이랬다. 최대한 많은 여고수를 꾀어내고, 그를 통해 분란을 조장한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무림을 상대로 일전을 벌여 끝을 낸다.
이러한 방법은 무림인만의 방법이었고, 무림인다운 방법이
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무림인의 관계가 곧 무림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한번 낙인 찍힌 고수는 돌아오지 못하는 엄격한 법칙. 그렇다면, 낙인을 찍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매한 여협에겐 추잡한 탕녀의 낙인을 찍어 무림에서 배제한다.
강직한 도인에겐 취한 여고수를 붙여 색마의 낙인을 찍는다.
이걸로도 충분했다. 굳이 최면을 통한 완벽한 지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수족이 될 소수만 관리하며 최대한 많은 무인에게 오명을 남긴다. 명예가 모든 것이라면, 명예만 잃게 하면 되었다. 무인의 무기가 검과 주먹이라면 내 무기는 오명과 악명이었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이 바로 은채린이었다.
*백룡검 은채린. 아미파의 속가 제자이자 정천맹 최고의 기대주인 그녀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나는 당사영을 기다리며 안가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독공 고수의 집은 그 자체로도 함정과 같았다. 감히 먼저 들어가서는 말 한 마디 못 붙이고 죽을 게 분명할 터. 노인의 생명이 경종을 울렸지만 딱히 방도가 없어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런 와중이었다. 안가의 담벼락을 박차고 나온 한 명의 여
인을 발견한 건. 그 여인은 호된 기침을 뱉으며 내 앞에 쓰러졌다. 나는 여인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자초지종 상황을 설명하였다.
중독된 그녀는 자신이 죽은 뒤를 걱정하였다. 임무를 수행하다 죽는 건 감수했지만, 정보를 알아내고도 전하지 못하여선 무가치한 죽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내게 자신의 정체와 임무를 알렸다. 사자死者를 모욕하고 금지된 실험을 한 사망광의 당사영. 당사영의 안가를 알아냈으니, 최대한 빨리 정천맹에 전해달라고 그녀는 내게 부탁하였다.
내가 무림을 오명으로 덮기로 결심한 건 그때였다.
나는 은채린을 의원에게 보냈고, 그런 동시에 수많은 암시를
박아넣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암시였지만, 독에 당해 약해진 그녀는 쉽게 암시에 휘둘렸다. 나는 그렇게 은채린의 일을 정리한 다음에야 당사영을 만나게 되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한 선택이었다. 은채린은 결국 최면을 풀어내었다. 그러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리긴 하였으나, 풀어낸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녀를 취한 뒤 데리고 다녔으면 나는 죽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방법을 선택했기에 지금 살아서 은채린을 볼 수 있었다.
은채린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눈은 텅 비어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벌어진 입에선 헛웃음만 나왔다. 정천맹의 샛별이라 불리던 그녀는 처참하게 부서져 내 앞에 부복하고 있었다.
최면에 걸려 부복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얽매는 최면을 스스로 깨어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무슨 일을 겪
었는지, 그녀는 이미 폐인이 되어 있었다. 폐인이 된 그녀는 스승이 아닌 타인에게 무릎을 꿇으며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하라는 대로. 망가진 그녀는 최면이 걸리지 않았음에도 나의 말에 따랐다.
하지만 이래서는 쓸모가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백룡검 은채린이지 망가진 인형이 아니었다.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몽환향은 이미 피워져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엇다.
"은 소협. 제 눈을 보시지요."
예상외의 일. 은채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내리깔은 고개를 그대로 처박고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냈다.
숨소리를 들어보니 잠에 빠진 건 아니었다. 망가진 인형에겐
더 이상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걸까? 최면의 기본은 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나는 별수 없이 직접 그녀의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그 순간이었다. 은채린의 손이 내 목을 쥐었다. 그녀는 우악스러운 힘으로 나를 땅에 처박았다. 나와 그녀의 관계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나는 땅에 머리를 박고, 은채린은 내 위에 올라탔다.
나는 소리쳐 사람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를 짓누르는 괴력은 내 입을 바닥과 완전히 밀착시켰다. 몇 번 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재갈이 물린 것처럼 읍, 읍, 하는 신음성만 겨우 나왔다.
내가 싸늘하게 식은 심장의 고동을 느낄 때 은채린이 말했다.
"그래, 네가 왕사였군."
차가운 울림. 고작 한 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노와 살의가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가 당장 내 목을 부러뜨리지 않는 건 단 한 가지 이유. 내막을 속속들이 파헤치기 위함이었다.
안일해도 너무 안일했다. 검을 빼앗아도 미동하지 않았고, 부복하라 말하자 바로 따랐기에 완전한 폐인이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한번 최면에 걸린 은채린은 다시 최면을 걸기도 쉬었다. 그래서 앞에 두고도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안일함의 결과가 바로 이 상황이었다. 지금 은채린이 날 죽이고 도망치면 어떻게 되지? 스스로 최면을 풀어낸 그녀는 모든 걸 기억할 게 분명할 터. 자신의 오명을 감수하고 사실
을 전한다면, 양섬문은 은채린과 함께 몰락할 게 틀림없었다.
나는 뼈아픈 실책을 자책하며 은채린의 말을 들었다.
"호가장이 사술사邪術師와 관련되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군. 맹주와도 인연이 있는 곳인데 사술사의 근거지였을 줄이야…. 아, 이전의 나처럼 사술에 빠져 장악당한 걸까?"
말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눈을 한번만 마주 볼 수 있으면. 내가 안일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당연했다. 촌각의 시간만 있어도 은채린을 다시 제압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나는 은채린의 무위를 몰랐다. 그녀와 나의 차이는 촌각의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을 절대적인 차이였다. 중독된 그녀만을 생각한 나는 그 대가를 호되게 맛보고 있었다.
은채린은 나를 땅에 처박은 채 신속하게 혈도를 짚었다. 마혈과 아혈. 몸을 봉하고, 입을 봉한 그녀는 나를 들쳐 메었다.
그녀는 나를 들고 바로 정천맹의 분타까지 갈 생각인 것으로 보였다. 하긴, 그게 당연하였다. 지금 나를 죽이면 뒤탈이 없었지만 내막을 알긴 힘들었다. 이렇게 됐다면 내게 정해진 미래는 하나. 맹의 분타에서 고문기술자에게 고문을 당하고, 노인과 최면술에 대한 정보를 뱉고 죽는 것이었다.
참담한 마음에 울고 싶었지만 마혈이 제압당한 나로서는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물건처럼 들려져 이동하였다.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난 걸로 보아 장지문을 열고 뛰쳐나가려는 순간으로 보였다.
그때, 익숙한 말이 들렸다.
"멍청한 놈. 그렇게 제압을 당하다니."
나는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몸이 바닥을 보고 쓰러져 무슨 상황인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는 있었다. 저 목소리, 저 말투. 노인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나는 목청껏 외치고 싶었다. 노인장, 이미 한번 최면에 걸린 여인이오. 당신이 마무리만 하면 되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점혈 당한 아혈은 내 목을 틀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노인이 눈치가 있다면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여인을 이 방까지 들어오게 했다는 건, 한번 최면술에 걸린 여인이라는 소리였다.
"한패인가…!"
스르릉―은채린이 바닥에 놓인 검을 집었는지 칼 뽑히는 소리가 났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검의 울음. 나와 노인의 피를 탐하는 사나운 울음이었다.
"검수를 마지막에 상대한 게 언제였더라. 십 년 전? 십오 년 전? 오래도 되었군."
은채린은 검의 소리를 내었지만 노인은 실없는 소리만 내었다. 등신 같은 늙은이. 눈치 채지 못했으면 싸울 준비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노인은 호가장에 온 뒤로 한번도 검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나도 멋으로 검을 차고 다니는데, 노인은 그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인이 지금 하는 건 시간 끌기였다. 소란이 나면 은채린이 나를 죽일 수 있어 그러지 못하지만, 그 나름대로 시간을 끄는 와중이란 것이다.
나는 어서 호예린이나 강휘영이 와주기를 바랐다. 저런 무시무시한 고수를 혼자서 대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노인의 무운을 빌며 누군가 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콰광―!
갑작스런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은채린의 무공이 저런 위
력이었단 말인가? 나는 가공할 위력에 전율하고 말았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진 발소리는 내게 다가와 멈췄다.
"멍청하게도 당했군."
내게 온 것은 노인이었다. 그는 내가 한심했는지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잠깐. 노인이 먼저 내게 왔다는 건 은채린을 물리쳤다는 소리였다. 설마 그렇다면, 노인이 은채린을 이길 실력이 되었다는 말인가?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어, 어떻게…."
내 궁금증을 해결해주기라도 하는 듯, 은채린이 말을 하였다. 힘겨운 목소리는 간신히 저 말만 내고 끊겼다. 은채린은 의식을 잃은 모양이었다.
노인은 내게 걸린 점혈을 풀어주었다. 나는 간신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먼지 한 톨 없던 방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주변 집기는 모두 바스라졌고, 은채린은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을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노인을 보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평한 기색이었다. 일류고수인 은채린을 단숨에 제압하고도, 그는 평소처럼 심드렁한 표정으로 코를 후비적거렸다.
"잘 싸우는군. 다시 봤소, 노인장."
"뭘.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어색한 침묵이 나와 노인 사이를 채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이 노인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필요를 못 느끼니 불편한 건 없었지만, 과연 믿을 수 있는 대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헛된 생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노인을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은채린에게 최면을 거는 게 우선이었다.
"내가 최면을 걸겠소."
노인은 내가 최면을 거는 모습이 궁금했는지 바로 앞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무공으로 다시금 자신을 증명해냈다. 최면과 무공 모두 내게 앞선 자의 가벼운 여유였다.
무공이라면 몰라도 최면술은 나 또한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방금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나는 은채린에게 말을 걸었다.
============================ 작품 후기 ============================* 주말이라 이틀 쉬고 하루 더 쉬었습니다. 연참으로 갚지요 뭐.
* 당사영이 진법에 독을 설치했다는 설정을 급조해서 넣었습니다. 그에 맞춰 이전 연재분을 수정하긴 했는데 고작 한 줄의 서술을 넣은 거라 다시 볼 필요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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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은채린-- >
*
"은 소저, 내 말이 들리십니까?"
은채린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완연한 혼절. 의식을 잃은 은채린은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은채린의 눈을 열어 동공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윽고, 맥을 짚으며 목숨에 지장이 있나 확인하였다.
은채린은 의식만 잃었지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호흡이 안정적인 걸로 봐서는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거리낌 없이 일을 준비해도 되었다. 나는 품속의
산공독을 꺼내 은채린에게 먹였다.
최면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눈을 마주쳐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준비가 다 끝난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 충분한 준비가 없다면 아무리 최면술을 걸어도 통하지 않았다.
물론 준비는 이미 끝낸 상황이었다. 내공은 산공독으로 금제했고, 정신은 몽혼향으로 흐트려 놓았다. 은채린은 이미 한번 최면 도입이 된 여인이기에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확실한 최면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우선 나는 내가 걸어야 할 암시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은채린은 정천맹의 대주이자 아미파의 속가제자. 무공 또한 비범하긴 하였다만, 당장 필요한 건 은채린의 직책과 연줄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강휘영처럼 기억을 지워선 안 되었다. 이 인연들을 쓸 수 있도록. 기억을 조작하여 손에 쥐어야 했다.
하지만 은채린은 이미 색마로 이름을 날리는 상황이었다. 직책과 인연을 쓰긴 써야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써먹기 힘들었다. 분명 잠입하여 암약하기 훌륭한 직책이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은채린을 어떻게 써야 되는 걸까?
이 직책과 연줄을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을 고민해도 제대로 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에 빠진 사람의 시선은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한숨을 마친 나는 노인을 보았다. 그에게 대책을 강구하고자 본 것은 아니었다. 흐릿한 정신은 흘러가는 시선을 붙잡을 방도가 없
었다. 내가 넋을 놓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노인은 내 고민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기라도 했다는 듯 말했다.
"아까운가?"
"네?"
"이 여인이 아깝느냐 물었다."
나는 노인과 은채린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잠시 그렇게 시선을 돌리니 답이 나왔다.
"아깝긴 합니다만, 결국 그뿐이지요."
은채린의 무공, 직책, 연줄. 이것들은 모두 제대로 쓰면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동시에, 큰 의미
는 없는 것들이었다.
내 목표는 은채린도, 정천맹도 아니었다. 은채린을 노리는 건 정천맹을 노리기 위해. 정천맹은 노리는 건 무림을 지우기 위해. 결국 모든 것이 과정이라면, 버릴 건 과감히 버려도 되었다.
은채린을 연결다리 하나로 생각하자 답이 나오는 듯 했다. 결론을 내린 나는 은채린의 눈을 열어 최면을 걸 준비를 하였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은채린을 이 방에 불러왔을 때만 해도 해가 쨍쨍한 한낮이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
었다. 도대체 몇 시진이나 흘렀을까? 가늠조차 되지 않으니 홀로 물을 뿐이었다.
"두 시진 정도 걸렸다."
노인은 내가 묻지 않았음에도 말을 해주었다. 최면술을 자주 걸며 인간의 심리를 파악했기 때문일까? 이 노인은 묻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것처럼 대답을 해주었다.
어쨌거나 두 시진 정도라면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였다. 노인이 강휘영을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진. 간단하게 계산하면 자그마치 두 배나 되는 차이였다.
"그정도면 충분하다. 이 계집은 꽤 까다로운 편이니깐."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꼭 말을 들어야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내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않자 노인이 킬킬거렸다. 그는 내게 수고했다며 공치사를 건넸지만, 그 가벼운 태도에서는 한 치의 진심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노인을 상대하며 피로가 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말이야 이렇지, 피곤은 노인과 무관한 일이었다. 노인의 말대로 은채린은 상당히 까다로운 경우였으니깐. 그런 대상에게 암시를 걸고 피곤하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경우였다.
이미 한번 최면을 풀어낸 은채린은 신중히 암시를 걸어야만 했다. 암시 하나를 걸 때마다 반복하여 재암시를 걸었고, 혹시 깨어졌나 계속 확인을 하였다.
그런 과정을 두 시진이나 거쳐 일을 끝냈지만, 사실 지금으
로선 일을 끝냈다 말하기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나중에 최면이 풀린다면 결국 오늘의 일은 헛짓이 된다. 나는 최면이 풀어지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고민하던 나는 스스로 최면을 풀어낸 여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호예린은 자신의 부모에게 버림받는 게 열쇠가 되었다.
당사영은 자신이 자랑하는 개조술에 역으로 당하는 게 열쇠가 되었다.
그렇다면 은채린은?
최면을 걸어 파악한 은채린의 심층심리는 정파 무림인의 표본과도 같았다. 무를 사사로이 쓰지 않고 의를 위해 검을 드는, 그야말로 정도의 무인武人.
이런 유형이라면 명성에 먹을 칠하고, 무인으로 활동하지 못
하게 하면 끝이었다. 자신의 모든 걸 부정 당한 무인은 정신이 붕괴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은채린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붕괴된 정신을 다잡고,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기 위해 내 앞에 도달하기까지 하였다.
정파 무인에게 자신의 체면은 아무것도 아닌 걸까?
앞으로 무인으로 활동하지 못한다 하여도. 평생 노력한 결과가 헛수고가 된다 하여도 정말 문제가 없는 걸까?
내가 생각하는 무인의 약점은 사실 약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초조함에 나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자, 노인이 말했다.
"뭐가 그리 초조하지?"
"노인장, 당신이 보기엔 내 최면이 아무 문제가 없는 걸로 보였소?"
"괜찮았지.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최면 도입 자체는 문제가 없었소. 다만, 이 여인은 전에 최면을 걸었을 때도 이런 모습을 보여 이러는 것이오. 올곧은 정파 무인이라면 그만큼 자신의 명예를 귀중히 여겨야 할 지언데, 이 여인은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고도 최면을 이겨내었소. 최면이 잘못 걸린 게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오만…."
"올곧은 정파 무인? 누가? 이 계집이?"
나는 노인에게 내 능력을 보이겠다는 각오도 버리고 그에게 물음을 구했다. 자존심. 이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대계大計 앞에서도 자신을 뽐낼 건 아니었다.
그렇게 자존심조차 버리고 한 질문의 대답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노인이 날 놀리는 걸까? 은채린의 심층심리를 방금 같이 들었으면서도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난 은채린을 깨워 다시 물어야만 했다. 이미 암시가 단단히 새겨진 은채린이었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은채린. 네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게 무엇이지?"
"… 주인님의 명령입니다."
나는 아뿔싸, 하고 작은 신음을 뱉었다. 암시에 빠진 은채린은 내 명령을 삶의 기저로 삼은 상태였다. 나는 실수를 고치기 위해 재빨리 말했다.
"잘 말했다. 네게 가장 중요한 건 내 명령이지. 하지만 진정한 자신인 지금의 너일 때가 아닌, 백룡검 은채린일 땐 다를
것이다. 백룡검 은채린의 신분일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백룡검 은채린은 정천맹의 규율을 따릅니다. 하나, 정천맹도는 정천맹과 백도 무림에게 충성을 다한다. 둘, 정천맹도는 언제나 명예와 신의를 위해 싸운다. 셋…."
"그만. 정천맹의 규율 다음으로, 백룡검 은채린 자신에게 중요한 건 무엇이지?"
"백룡검 은채린은 정천맹의 규율 다음으로 스스로의 명예와 대아미파의 영광을 중요시 여깁니다. 이를 위해 백도 무림인으로서 모범이 되기 위해 행동합니다. 절차탁마하며 무공을 익히지만, 무공을 사사로이 쓰지 않는…."
"됐다, 그만 잠들어라. 자, 노인장. 당신도 아까 들은 것 아니오. 은채린은 당신도 알다시피 정파 무림인의 표본과 같은 여인이오. 하지만…."
"역시, 내 예상과 같았군."
노인은 제대로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
서린 웃음은 비웃음 같았으나, 그 비웃음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노인은 잠든 은채린을 비웃었다.
"그래, 이 계집은 자신이 정말 그런 줄 알겠지. 사문에서 배운 정파의 도리가 자신의 근간이고, 맹에 충성하며 백도 무림에 이바지하는 게 자신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겠지."
노인은 크게 한번 웃고는 다시 말했다.
"무예 단련에 힘쓰지만 그 무예를 사사로이 쓰지 않는다고? 언제나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절개를 지킨다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말 그랬으면 처음부터 최면에 걸리지 않았어야지! 네가 이전에 최면으로 지시한 걸 떠올려라. 넌 이 계집에게 남자를 겁간하며 해괴한 별호를 떠벌리라 명했다. 거기에 넘어간 순간 끝난 거야. 이년은 남자를 겁간하며 무예를 사사
로이 썼고 절개를 버렸다. 해괴망측한 별호를 떠벌리며 자신과 사문의 명예에 똥칠을 했다. 호가장의 계집조차 하루면 튕겨낸 최면을 며칠 몇 날에 걸쳐 충실히 따른 주제에 뭐? 올곧은 정파 무인? 그럴 리 없지! 이년은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거야. 다른 정천맹 놈들처럼! 다른 정파 무인처럼! 스스로를 기만하며 믿고 싶은 걸 믿는 무림인의 표본 같은 년이다!"
노인은 말을 하며 점점 고조되더니, 지금은 아예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예전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이 노인은 무인을 증오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파 무인을 증오하였다.
지금으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딱히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하지만 최면을 하루만에 튕겨낸 건 호예린이 특이했기 때
문이라 볼 수 있지 않겠소?"
"흥, 그건 호가장 계집의 존재의의를 반反하는 일을 우리가 해서 그런 거겠지. 아마 자신의 아비가 우리 앞에서 아양 떠는 걸 견디지 못한 걸 거야. 아니, 그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는 자신을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최면을 단박에 풀어내려면 그정도의 부정이 필요하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부정했다고 봐도 될 정도의 일이. 무림의 여인에게 절개는 꽤나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존재의의로 삼는 여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다면 다른 것이야. 자신의 명예보다. 사문의 명예보다. 절개보다 중요한 한 가지를 부정하는 일이 이 계집에게 생겼기에 최면이 바로 풀린 것이다. 자, 예상이 가는 게 있나?"
나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은채린이 최면을 풀어낸 이유를 따로 생각해보기 위해 그녀에게 지금까지 있던 일을 묻긴 하였다.
하지만 딱히 짐작이 가는 건 없었다. 소매치기를 겁간하고, 녹림도를 겁간하고, 끝내 색에 취해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무꾼마저 겁간하고도 멀쩡한 이 여인이,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부정 당했다는 말인가?
내가 혼자 생각해봐선 답이 없었다. 나는 잠이 든 은채린을 다시 깨워내고 그녀에게 묻기로 했다.
최면이 걸린 동안 있었던 일을 아주 상세히 들을 예정이었다.
============================ 작품 후기 ============================설정따윈 생각도 안 한 글인데 이번 에피소드를 쓰며 쓸데없는 설정이 생겼습니다.
대충 말하자면그냥 건 최면은 상대가 내공을 익혔을 경우 시간이 지나며 점점 풀립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반하는 일을 최면으로 시켰을 경우 곧장 풀립니다.
그 어떤 일도 시킬 수 있는 완벽한 최면을 걸기 위해선 상대의 정체성 자체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본문에 나온 내용을 굳이 조잡하게 다시 늘여놓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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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재개 알림.
-- >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깐 쉬었습니다.
곧 재개됩니다.
============================ 작품 후기 ============================연재가 되지 않는 동안에도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후원해주신 너무커요 님과 13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