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녹림-- >
*
"가진 것 다 놓고 꺼져!"
안휘성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날, 내게 들린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꾀죄죄한 옷차림의 거한이 서 있었다.
녹림도일까, 아니면 강도로 돌변한 약초꾼일까.
거한의 협박꾼이라면 녹림도라 보는 게 마땅하겠지만, 망태기만 들고 있는 내게 하는 짓으로 봐선 약초꾼 같기도 하였
다.
어느 쪽이든 한심한 족속일 게 틀림없었기에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하였다.
"내 망태기에 든 약재 중 비싼 것은 없소."
나는 이리 말하며 망태기를 들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천문동天門冬 몇 뿌리와 도라지 몇 뿌리. 산을 잠깐만 뒤져도 우수수 나오는 흔한 약재였다.
"가, 가진 것 놓고 다 꺼지라니깐?"
거한은 말을 더듬으며 재차 말했다. 이젠 더 헷갈린다. 말도 더듬는 멍청한 녹림도, 혹은 양심이 찔리기 시작한 약초꾼.
어느 쪽이든 지나칠 정도로 한심했다. 나는 호미를 들며 외쳤다.
"네놈이야말로 가진 것 다 놓고 꺼져라!"
자고로 싸움은 덩치가 아닌 기백으로 하는 것. 나는 그가 겁에 질려 도망치기를 바랐다.
"저 새끼는 진짜 못 써먹겠다니깐.'내가 기대한 거한의 달음박질 소리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렸다.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 돌아보니 꾀죄죄한 옷차림의 더벅머리 사내가 있었다.
"야, 나처럼 하라고. 나처럼."
이번에는 옆이었다. 방금의 둘보단 덜 꾀죄죄한 차림의 털보가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진 것 다 놓고 따라와."
나는 호미를 번쩍 들며 외쳤다.
"옷도 놓고 가면 될까요?"
*내가 약초를 캐는 산의 이름은 장소성과 안휘성의 사이에 놓인 청수산青秀山이었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약초꾼은 잘 찾지 않는 산이었지만, 소주에서 가장 가까운 산이었기에 사세부득이 정한 곳이었다.
산세가 험하지 않다는 건 상인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표행 또한 상인의 장삿길과 다를 바 없다. 이곳은 내가 며칠 전 표물을 운반하며 지나온 길이었다.
나는 그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근방 녹림패가 날뛴다는 곳이 이곳이야. 조심해.'
맙소사. 왜 이황의 말을 귓전으로 흘렸을까. 허튼 소리를 자주 하는 자였지만 도움이 되는 말도 하였는데.
나는 꽁꽁 묶인 채 그들의 산채로 끌려가며 지난 날을 후회하였다.
"야, 어떻게 이런 새끼한테 깔보일 수 있어?"
털보가 칼등으로 내 볼을 꾹꾹 찌르며 말을 하였다.
표정 관리. 이럴 땐 표정 관리가 중요하다. 괜스레 불쾌한 티를 보이다간 산채로 가는 도중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밉보이기라도 했는지 털보는 칼등을 더욱 깊이 찔러넣었다.
"어? 이렇게 찔리고도 처웃는 새끼한테 어떻게 깔보일 수 있냐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거한은 연신 굽신거리며 털보에게 사과를 하였다. 분명 사과는 거한이 하고 있는데 왜 아픈 건 내 볼일까. 멍이 든 볼은 이제 찌르면 터질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볼을 찔리며 한참을 걷자 목책이 박힌 산채가 보였다.
산세가 험하지 않은 산이라는 건 천연의 방책이 다른 산보다 덜하다는 말이다. 이 산채는 그 아쉬움을 대신하고자 했는지 목책을 촘촘하게 박아두고 있었다.
털보와 다른 사내는 산채에 도착하자 슬쩍 옆으로 빠졌다. 거한만이 내 옆에서 어벙한 표정으로 있었다.
"얘는 어떻게 할까요?"
"닥쳐···."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털보를 보자 불안해졌다. 잔인한 놈들은 조용할 때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그놈들은 살인을 하거나, 더 잔인한 놈들이 있을 때만 조용해지곤 했으니.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후자의 상황이었다.
"뭐야, 이 병신은?"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은 털보와 더벅머리는 바짝 굳어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내 옆의 거한이 멍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산채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길래 데려왔습니다!"
하, 이 눈치 없는 새끼.
이 산채에 처음 온 나도 대강 분위기를 알 수 있는데, 왜 이놈은 모른단 말인가.
털보와 사내는 한숨을 작게 쉬었고, 한숨 소리가 들린 즉시 그 두 명의 뺨이 좌우로 돌아갔다.
쩍― 쩍―채찍이 가죽을 가르는 듯한 소리였다. 털보와 사내는 터진 볼짝을 부여잡지도 않고 우는 듯 대답하였다.
"방원이가 저놈과 실랑이를 하고 있길래 같이 데려왔습니다!"
"이상입니다!"
쩍― 쩍―둘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호된 소리가 났다. 균형 좋
게 양쪽 뺨이 벌겋게 물든 그들은 감히 불만을 표하지도 못했다.
나는 저 둘이 도대체 누구에게 맞는 것인지 궁금하여 눈동자를 굴렸다.
헝클어진 머리에 호랑이 가죽을 덮은 여인.
저 녹림도 둘을 호되게 두들기는 여인은 무척 사납게 생긴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지금 내 눈과 마주 치고 있었다.
"뭘 봐, 씨발놈아."
쩌억―
나는 맞고도 신음 하나 안 내는 털보가 감탄스러웠다.
이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나는 타는 듯한 볼을 부여잡고 신음을 내었다.
"끄흐윽···."
"어쭈? 이젠 소리도 내네?"
쩌억― 쩌억―나는 당장 혼절할 것 같은 정신을 다잡으며 외쳤다.
"나, 나는 의원醫員이오!"
"어쩌라고!"
쩌억―나는 구사일생의 수를 간신히 외치고는 그대로 혼절하였다.
*정신을 차린 나는 볼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끄어억···."
젠장, 요즘은 왜 이렇게 얻어맞는 일이 많을까. 나는 너무 아파 주변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그런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아프지? 우리 채주의 손이 워낙 맵기로 유명해."
이게 맵다고? 그저 맵다는 말로 끝날 위력이야?
나는 이런 의문을 품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내게 말한 자는 아까의 그 거한이었다.
"이, 이게 맵다는 말로 끝날 정도인가?"
"무슨 무공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내가 기억을 잘 못해서···."
"병신 같은 소리를···."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는 순간 겁에 질렸다. 아무리 상대의 지위가 낮아 보여도 붙잡힌 나보다는 높을 것 아닌가? 나는 괜한 말을 한 것인가 싶어 실눈을 뜨고 몰래보자,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거한은 전신에 멍이 든 채로 꽁꽁 묶여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뭐야, 너 이 산채에 있는 거 아니었나?"
"그건 맞는데··· 네 말대로 병신 같은 소리를 한다고 잡아 두더라고."
참으로 병신 같은 소리였다. 나는 이자가 한심하게 느껴져 말을 하였다.
"이 산채는 산채원을 툭하면 잡아다 패는 곳인가 보지? 그럼 녹림십팔채의 일원은 아니겠군. 녹림십팔채는 어지간한 문파보다 정예라고 들었으니."
"아, 아니 어떻게 안 거야? 이곳이 십팔채 중 하나인 호골채인 걸···."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말하려 했으나 생각해보니 그럴 듯 하였다.
저 채주라는 자가 보인 무위. 단순한 따귀였음에도 내 정신을 잃게 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 정말 의원이야?"
"당연히 그렇지. 왜, 못 믿겠어?"
"나와 다른 형님들은 못 믿겠다고 했는데 채주님은 믿더라구. 채주님이 말하기를 의원이면 언제고 쓸 일이 있을 테니 가둬두라 하셨어. 그래도 다행이야. 너가 의원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죽었을 테니깐."
"네가 내 목숨을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어쨌든 사람이 죽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니깐."
"그걸 아는 놈이 어째서 녹림에 있는지 모르겠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약초를 캐러 오기 전 노인에게 배운 한 수. 그게 날 살리게 되었다. 노인처럼 눈빛 한 번으로 정신을 잃게 하지는 못했지만 사소한 암시를 새기는 건 나도 가능했다.
물론 이건 노인의 최면술과 같지는 않았다. 눈을 마주친 상대에게 날 향한 호감과 설득력을 높여준 것 밖에 안 되었으니.
구사일생의 수이긴 하였지만 일종의 도박수였다.
"그냥, 아는 형님들 따라 들어온 거야. 내 체질은 아닌 것 같더라구."
"확실히 그런 것 같기는 하다."
내 말에 거한은 히죽 웃기만 하였다. 나는 그의 모습이 아연했지만 딱히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자를 좋아했다.
이자는 말하자면 손해만 보고 사는 인생이다. 시장통에 나가면 누구나 아는 호구요, 집에서는 마누라에게 바가지만 긁히는 인생.
살인과 강도를 업으로 삼은 녹림에게만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라, 어디서도 어울리지 못하는 인생.
당장 나 같은 놈 상대로도 강도질을 못한다면 말을 다 한 것이다.
나는 이자와 통성명이라도 하며, 이 산채의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 속으로만 담아둬야만 했다. 입안이 터져 말을 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통성명을 하면 양쪽 모두 손해를 볼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자는 내가 죽으면 슬퍼할 것이다.
나 또한 이자가 죽는다면 안타까울 것이었다.
손해 보는 인생인 건 이자만 그런 게 아니다. 나 또한 그렇다. 내가 이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동병상련의 정을 느껴서였다.
약 한나절 정도 갇혀 있자 발소리가 들렸다. 구석에 누워 잠을 청하던 나는 긴장하여 몸을 움추렸다.
외딴 산채에선 의원이 필요할테니 당장 죽일 것 같진 않았
다. 그러나 녹림도의 생각을 일반인이 알 수 없는 노릇. 나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끼이익―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내는 날 산채로 데려올 때 같이 있던 더벅머리였다.
"일어나라."
나는 그의 말에 팔을 들어보였다. 꽁꽁 묶인 팔을 가지곤 땅을 짚어 일어날 수 없었다. 더벅머리는 내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퍼억―
"커헉!"
그는 당연하단 것처럼 내 배를 걷어찼다. 팔이 묶여 배를 부여잡지도 못한 나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일어나."
"크흑···."
나는 묶인 팔에 몸을 기대 가까스로 설 수 있었다. 그는 내가 괄태충括胎蟲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며 한껏 폭소하였다. 겨우 선 나를 본 그가 말했다.
"따라와. 채주님이 부르신다."
채주라면 아까 내 뺨을 친 사나운 여인이었다. 여인으로 이 사나운 녹림도들 위에 군림하다니. 아까 보인 그녀의 위용이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 못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의 무용을 본 입장에서는. 무용보다 더 공포스러운 사나운 성질을 본 입장에서는, 무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자가 채주든, 채주의 첩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악독한 성격의 인간을 만나선 절대 좋을 게 없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주었다.
유일한 구명줄이라면 아까의 암시가 통했다는 걸까.
나는 노인에게 배운 최면술의 오의를 떠올리며 채주의 처소 앞에 섰다.
채주의 처소는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잡초 외엔 아무것도 없는 야트막한 공터. 채주의 처소는산채의 다른 건물과는 동 떨어진 위치에 홀로 있었다.
일단은 여인의 몸이니 남녀를 유별한 것일까. 그녀의 무위로 봐선 과연 그런 걱정이 필요할지 의문이었다만, 어쨌든 내게 있어선 다행이었다.
채주의 처소에 다른 남자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 나는 마음 놓고 최면술을 쓸 수 있었다.
날 데려온 더벅머리는 처소 앞에서 멈추고 들어가지 않았다.
"들어가."
"혼자 말입니까?"
퍼억―이 산채 놈들은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성질 더러운 자식들. 꼭 단칼에 목이 달아나길 빈다.
처소에 들어서자 가벼운 옷차림의 여인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수척한 표정의 여인. 그녀는 천으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내가 인기척을 내자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산채에 오셨다는 의원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약간 몽롱해진 어조의 그녀가 말했다.
"채주님이 부르십니다. 채주 님의 방으로 들어가보시지요.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알겠다 대답하고 채주의 방을 찾았다. 채주의 방까지 가며 주변을 둘러봤다. 채주의 처소는 저택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 상당한 크기였다.
다만 그 크기를 채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상당한 흠이었다. 그 흔한 가구는 몇 없고, 사람은 아까의 여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채주의 방문 앞에 섰다. 장지문 틈으로 보이는 그림자로 봐선 채주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긴장감에 떨며 말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짧은 대답이었다. 나는 더벅머리에게 얻은 교훈을 떠올리며 재빨리 문을 열었다.
============================ 작품 후기 ============================슝슝 =====================================================================
< --1. 녹림-- >
채주는 비스듬히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손질을 자주 하지 않았는지 긴 흑발은 군데군데 뻗친 흔적이 있었다. 그녀는 녹색 경장 차림에 호피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찌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어떤 연유로 절 부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채주의 눈빛이 아주 약간의 시간 동안 흐릿해졌다. 노인은 최면술이 내공을 어느 정도만 익혀도 통하지 않는다 했다. 저 여채주는 아마 외공만 극한으로 단련하여 통하는 것 같았다.
"애들 몇 놈이 다쳐서. 고칠 수 있어?"
"상처를 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어떤 상처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한 놈은 피똥을 싸고, 두 놈은 저들끼리 싸우다 다쳐 칼에 베였어. 한 놈 더 다치긴 했는데 걘 곧 죽을 것 같으니 냅둬도 될 거야."
다행히 최면술은 어느 정도 먹힌 것 같았다. 아예 먹히지 않았거나 풀렸다면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려줄 리 없었다.
"치료에 쓸 약재는 있습니까?"
"금창약이라 부를 건 없고··· 다치면 씹어서 붙이는 약초만 몇 개···."
말을 하던 채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눈동자에서 흐릿함이 사
라진 채주가 말했다.
"너, 말이 왜 그렇게 많냐?"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평정심을 내보였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채주님의 수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채주님은 수하의 몸을 걱정하셔서 절 부르신 것 아닙니까?"
눈을 보며 최면술을 거듭 걸었다. 채주의 목소리에서 기운이 빠졌다.
"걱정까진 아니고···. 죽으면 사람 구하기 귀찮으니깐···."
"아까 절 끌고 온 거한은 녹림도라 하기 부끄러운 자였습니다. 그런 자조차 쓰고 있다면 인력난이 심각한 게 분명할 터.
채주님은 지금 있는 산채원을 한 명이라도 잃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채주님은 산채원을 잃으면 안 되고, 그러려면 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친 산채원을 고칠 수 있는 건 저 혼자 뿐이니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채주는 천천히 암시의 유도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자에게 당장 무언가 할 생각은 아니다. 다만, 순간 변심하여 내 목숨을 해치는 일만 막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심리에 내 말을 새기기 위해 다시 말했다.
"산채원의 목숨이 곧 채주님의 목숨과 같습니다. 제가 이 산을 오르기 전에 보았을 때, 관병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습니
다. 근처 문파에서 사람을 보낼 기미도 있었고 말이죠. 이런 상황에선 한 명의 산채원이라도 잃으면 안 될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한 명이라도 잃어선 안 되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선 제가 필요합니다."
채주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방금 한 말을 잊되 마음 속 깊이 명심하라는 암시를 걸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채주는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깜빡 잠에 졸았나 보군. 어디까지 말했더라···"
채주는 내 말이 심리에 새겨졌는지 아까보단 더 호의적인 모습으로 말했다.
"창고에 둔 약재를 챙겨 다친 애들을 치료해. 위치는 오면서
본 년이 말해줄 거고. 이만 됐으니 가봐."
나는 군말없이 그녀의 말에 따랐다.
약간의 시간이 소요된 끝에 나는 청소를 하는 여인을 찾을 수 있었다. 수척한 표정의 그녀에게 채주가 원하는 바를 말하였고, 그러는 동시에 그녀에게 최면술을 한층 더 깊이 걸었다.
채주보다 더 짧은 시간만 걸었지만 이 여인은 채주보다 깊이 암시에 걸렸다. 아마 무공도 무공이지만, 이 산채에서 타인의 명령을 받는데 익숙해진 점이 한몫 한 것 같았다.
여인과 같이 창고를 찾아 움직였다. 산채원들은 이미 말이 오갔는지 외지인인 나를 보고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 몇 명은 날 보고 놀라 무기를 꺼내려 했으나, 여인이 무어
라 말해주면 무기를 넣어두었다.
창고는 내가 갇혀 있던 움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움집보다는 나았지만 얼기설기 조잡하게 만들어진 창고. 나는 그곳의 자욱한 먼지를 헤치며 약초 몇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젠장, 이거야 원. 써먹기 힘들겠군."
약장수의 조수로 일을 하였다만 그게 약장수인 건 아니다. 제대로 된 의원의 조수도 혼자서는 힘든 마당에 그조차 아닌 나로서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처박은지 몰라도 말라 비틀어진 약초들. 나는 그것을 손에 들고 아연실색하였다.
"쓸만한 약재가 없나요?"
나와 같이 온 여인이 물었다. 나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그녀에게 설명하였다.
"천하의 명의라는 화타華陀도 이 약재만 가지곤 무언가 할 수 없을 겁니다. 새로 약재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환자의 상태가 위중합니까?"
"한 분은 그렇지만 채주께서 포기하라 하셨으니 의원님에겐 문제가 없을 겁니다. 배앓이를 하는 분은 늘 뱃병을 달고 사는 분이니 가만 두어도 큰 문제가 없겠고, 서로 싸우다 다친 두 분은 얕은 자상刺傷이니 피딱지만 가라앉으면 될 것입니다."
그녀는 조목조목 환자의 상태에 대해 알려주었다. 나는 청소나 하던 그녀가 이런 사실을 안다는 게 놀라 물어보았다.
"채주님의 시비侍婢로 있으신 분인지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군요. 원래 비슷한 일을 하셨습니까?"
"이곳에서 손이 많이 가는 일은 모두 제 일이니 모를 수가 없답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안색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파리한 인상, 움푹 파인 볼. 위중한 병자에게서 보이는 모습이자 가난한 농촌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런 모습의 아낙들이 내가 따라다닌 약장수의 주요 고객이었다. 늘 피곤하고, 머리가 어지럽다며 찾아온 그들. 그들은 자신들이 병들어 아프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단순한 과로에 불과했다.
약장수는 그들에게 씀바귀의 즙을 탄 샘물을 내주며 이틀간 푹 쉬라 당부하였다. 그러곤 삼 일 뒤에 마을로 돌아가곤 하
였다.
혹여나 약재의 부작용이 생겼나 확인하러 간 건 아니었다.
새 환자가 득실할 걸 안 까닭이었다.
약장수가 돌아오면 마을 아낙 대부분이 몰려와 약장수에게 같은 약을 달라 요청하였다. 아파도 비싼 약은 못 쓴다며 애처롭게 버티던 그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몇 푼 돈으로 병을 치료한 걸 보자 그렇게 애걸한 것이었다.
약장수가 약값을 많이 요구했으면 사람이 모일 리 없었지만, 약장수는 박리다매薄利多賣라며 싼 값을 고수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내가 하려했던 일도 약장수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한 약재 몇 개를 씹어다 상처에 붙인 뒤 가만 둘 생각이었다.
이것만으로 대다수의 환자는 알아서 병을 고칠 것이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정 문제가 심한 환자들은 혈골피란병血骨疲爛病이니 흉신난족비凶身難足腓니 하며 적당히 둘러대면 될 터였다. 천하의 화타도 고치지 못한다며 채주에게 최면술을 걸면 포기할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한 일이었지만 내막을 아는 이 여인을 보니 못내 불안해졌다. 이 여인이 안 하는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일에 치인 여인조차 알 병이면 이 산채에서 모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 아닌가.
내가 어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여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의원님이 보기에는 제 처리가 다소 미습해 보이실 순 있습
니다. 하지만 이런 산채에서는 이것 이상으로 무언가 하기 힘드니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여인은 내가 의원으로서의 사명감에 시달리는 것이라 착각한 것 같았다. 나는 일단 그런 쪽으로 흐름을 틀어두자 생각하며 말했다.
"이런 산채에서 제대로 된 치료가 힘든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고 몸을 쓰면 상처가 덧날까 걱정되어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분간 다친 사람들에게 몸을 쓰지 말라 일러두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산채 사람들은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채주께서 의원님의 말에 따르라 하였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요."
"그렇게 가만 두기만 해서 되겠습니까? 모든 상처가 가만 둔다고 낫는 상처는 아닙니다만···."
"정 약재가 필요하다 생각되시면 의원께서 약재를 따로 조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원이시니 약재 또한 보실 줄 아시겠죠?"
그녀의 말이 내가 원한 것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을 숨기며 엄숙하게 말했다.
"저 혼자 약재를 구할 순 없겠으니 한 명 내지 두 명은 붙겠군요.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전 오늘 당장이라도 약재를 구하러 가고 싶습니다. 다친 환자를 두고 제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죠."
"채주께는 제가 말씀 드리도록 하죠."
*나는 처음에 같이 묶인 거한이나 일이 없어 노는 몇 명이 같
이 갈 줄 알았다. 거한만 온다면 순조로운 탈출이 가능하고, 다른 몇 명이 온다면 약재를 찾기 쉬우니 어느 쪽이든 나쁠 게 없었다.
뜻밖에도, 나와 같이 약재를 찾을 사람은 채주였다.
"산채원의 목숨이 내 목숨과 같으니 내가 움직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채주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기라도 하는 듯 이리 말했다. 맙소사. 내가 건 최면은 이미 그녀에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나는 이 뜻밖의 행운에 감사하며 일을 진행했다.
처음 잠시 동안은 약초만을 찾았다. 나는 어느 정도 망태기가
채워지자 채주에게 말했다.
"이곳에선 더 찾을 약초가 없는 것 같으니 깊숙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도 산이고 더 들어가도 산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자상刺傷에 좋은 약초는 그늘진 곳에서 자랍니다. 이곳이 산속이기는 하다만 양지바른 곳이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산채원의 목숨을 살리려면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채주는 산채원의 목숨이 걸렸다 말하면 대부분의 일을 들어주었다. 나는 그녀의 높은 피암시성에 감탄하며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더 깊숙이 들어가니 사람의 흔적은 아예 찾아 볼 수 없었다.
하기야, 근방에 녹림이 날뛴다고 말이 도는 상황에서 누가 이리 깊이 들어오겠느냐마는.
나는 혹시나 하여 채주에게 물었다.
"혹시 주변에서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제가 듣기엔 사람 소리 같은데···."
"안 들렸어. 이런 곳에선 있어봤자 멧돼지나 곰인데, 그런 놈들은 내가 해치울 수 있지."
채주는 이리 말하며 자신의 도끼를 툭툭 건드렸다. 참으로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녀의 무위를 생각하면 만용이 아닌 자신감의 발로겠지만, 그녀는 아직 몰랐다. 자신을 해할 다른 방법도 있다는 걸.
"채주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부른 곳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채주는 이미 날 보고 있었지만, 이렇게 부르자 눈을 마주 보았다.
채주의 눈에 혼탁한 기운이 돌았다. 그녀의 성난 맹수 같은 기운은 흐려졌고, 점차 정돈되었다.
"왜."
평소 그녀의 말에 깃들던 사나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지금의 물음은 단순한 물음이었지만, 이제 곧 있어 명령을 기다리는 인형의 물음이 될 터였다.
나는 그녀를 그렇게 만들기 위해 일을 시작하였다.
"산채원의 목숨이 채주님의 목숨과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주변 관병들이 심상치 않고··· 몇 몇 문파들도 그러한 모습이니깐···."
채주는 내가 한 말이 정진정명 자신의 뜻인 것처럼 말했다. 나는 내가 곧이어 할 말도 그녀의 뜻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산채원의 목숨을 살리는 저는 채주님의 목숨을 살리는 게 되겠군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녹림도인 채주님은 무림인이시겠죠? 무림인에게 있어 은원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고."
"무림인··· 맞지···. 나름대로 별호도 있고···."
"그럼 전 채주님의 은인이군요."
"······ 넌 내 은인이지···."
"채주님. 제가 손을 치면 채주님은 방금의 대화를 잊지만 제
말을 마음속 깊이 기억하게 됩니다. 저는 채주님을 목숨을 살린 것과 같은 은인입니다. 은인에게 은혜를 갚는 건 당연한 일이고요."
"알았··· 다···."
짝―채주의 대답을 들은 나는 손뼉을 쳤다.
적막한 산을 울리는 한 줄기의 소리. 그것은 채주의 뇌리를 꿰뚫는 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채주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나를 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는 모습은 이미 사나운 인상을 지워내고 있었다.
"채주님. 저에게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
채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묘하게 낯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채주의 성격 문제도 있겠지만, 내가 주입한 최면이 아직 채주의 밑바닥까지 흔들지 못한 까닭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 채주에게 더욱 깊이 최면을 걸고 싶었다. 류찬희와 한 일보다 더욱 나아간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녀의 뼛속 깊이 날 향한 애정을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천성적으로 사나울 게 분명한 이 여인을 손에 쥐는 건 쉬이 진행할 일이 아니었다.
최면을 걸 땐 서두르지 말아라. 나는 노인이 몇 번이고 당부한 말을 떠올리며 약초 채집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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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녹림-- >
*
"채주님, 이만 내려가도 될 것 같습니다."
"뭐야, 벌써 끝났어?"
나는 어느 정도 약초를 캐낸 뒤 채주에게 말을 걸었다. 망태기를 그득 채운 건 아니었지만 더 캘 필요가 없었다.
채주는 망태기를 유심히 보더니 내게 말했다.
"반도 안 찼는데? 야, 너 애들 못 나으면 책임 질 자신 있어?"
"지금 다치신 분들을 생각하면 이정도로 충분합니다. 약초는 캐낸 다음 바로 쓰는 게 좋으니까요. 내일 쓸 약초라면 내일 캐는 게 나을 겁니다. 어차피 이곳엔 다른 약초꾼도 없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채주는 내 말에 따로 토를 달진 않았다. 그저 뾰로통한 표정으로 주변 돌멩이를 차는데 열중이었다. 잠시 그러던 채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씨, 내일은 나오기 귀찮은데."
설마 날 또 도우러 올 생각이었던 걸까. 채주라는 직책상 그다지 할 일이 많아 보이진 않았으니 합당한 결정이긴 하였다. 그러면서도 불만을 숨기지 않는 게 이 채주의 특이함이었고.
채주는 말로는 불만을 표했지만 결국 내 말에 따랐다. 나는 채주와 함께 산채까지 걸어가며 앞으로 할 일을 떠올렸다.
*산채로 돌아온 나는 채주의 시비와 함께 다친 산채원을 찾아 다녔다. 그들은 역시 다쳤다는 게 핑계였는지 매우 활발한 모습이었다. 내가 의원이라는 말을 들은 뒤에야 슬슬 아픈 척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참 가관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약초를 건네며 며칠 쉬라 일러두었다. 당장 죽을 것처럼 신음하던 그들은 쉬라는 말을 듣자 히죽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의 연기로 날 속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나는 그들의 약재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매일 산에 나갔다. 산에 나갈 땐 채주도 늘 함께였다. 매일매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채주에게 최면을 걸 수 있었고 결국 때가 오고 말았다.
"채주님이 부르십니다."
일을 다 끝내고 쉬는 와중, 채주의 시비가 나를 불렀다.
나는 구태여 무슨 일로 부르느냐 묻지 않았다. 이날, 이 시간. 내가 노린 때와 딱 맞아 떨어졌다. 나는 웃음기 만연한 얼굴로 그녀를 따랐다.
시비는 채주의 방 앞까지 나를 안내하였다. 나는 안내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를 붙잡았다. 갑작스런 내 태도에 당황한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자 진정되었다.
이미 채주보다 깊이 최면에 걸린 그녀는 내 꼭두각시와 같았다.
"처소로 누군가 들어오려 하거든 큰 소리를 내며 막아라."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나는 채주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채주는 간만에 몸을 정돈했는지 평소의 너저분한 머리는 어디 가고 곱게 묶인 머리를 하고 있었다. 녹색 경장에 호피를 덮은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저 사소한 정돈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끌어내주었다.
이제 와서 말하기는 우습다만, 채주는 지금껏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다. 여인보다는 맹수로 느껴지는 그 사나운 기세가 있음에도 미색은 숨길 수 없었다. 마치 가시를 숨긴 매화梅花처럼, 그녀는 사나운 기세조차 하나의 매력이었다.
채주는 말도 없이 문을 연 나를 보았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그저 다소곳이 앉은 채로 나를 올려만 보았다. 날카로운 눈매 탓에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붉게 물든 볼이 그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말은 하고 들어와야지."
맹야묘猛野貓 강소영姜素瑛. 녹림에서도 알아주는 외공고수이자 호골채의 채주인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이 부끄러웠는지 소매로 얼굴을 반쯤 가려버렸다.
"죄송합니다. 밤에 부르시길래 시급한 상황이라 생각되어···."
"······."
내 변명을 들은 채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뇌리에 새겨진 암시 때문에 나를 불렀음에도, 나름대로의 저항감이 거사를 막아내는 모양이었다.
채주는 한숨을 쉬며 품속에서 연초煙草를 꺼냈다. 방을 밝힌 초에 대어 불을 붙인 채주는 연초를 입에 물며 말했다.
"이게 긴장을 풀어주······."
채주는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자기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게 여간 싫은 듯 하였다.
나는 그녀의 저항감을 덜어주기 위해 말을 하였다.
"연초로군요. 제 아버지도 자주 피우셨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한 대는 꼭 피우셨죠. 피우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다던가···."
"그, 그렇지. 나도 마침 오늘 한 대도 피우지 않아서···."
나는 횡설수설하는 채주에게 다 안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여보였다. 채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폐부 깊숙이 연기를 채워보였다. 후― 하고 연기를 뱉어낸 채주가 말했다.
"여인 몇을 보냈는데 한 명도 취하지 않았더군. 무슨 이유 때문이지?"
채주는 내가 의원으로 자리 잡자 다른 산채원과 동등하게 대해주었다.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더 잘 대해준 면도 있었다.
남들은 순번을 정해 취하는 산채의 노리개 여인을 내 처소로 직접 보내준 것이다.
나는 그녀들을 가만히 돌려보냈다. 이는 내 목적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었지만 채주에겐 다르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강제로 안기는 여인을 취하는 취미는 없으니까요."
"······ 대단한 성인군자 납셨군."
채주는 차갑게 말하곤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속내를 털어놓으라는 것처럼. 그녀의 눈빛엔 단호한 의지가 감돌고 있었다.
"그렇게 거절을 하면 내가 못 이기는 척 풀어줄 거라 생각한 건가?"
"아뇨. 그런 것 까지는···."
"그럼 왜 다 거절한 거지? 일을 빼주겠다고 해도, 여인을 취하라고 넘겨줘도, 다 거절하니 방법이 없잖아."
채주는 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호의를 보였다. 약초를 다른 산채원에게 캐오라 한다던가, 여인을 내준다던가, 심지어 산채의 조장 직위를 주겠다고도 말했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걸 거절했다. 채주는 내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밀어붙였지만, 나는 그보다 더 강하게 거절할 뿐이었다.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 되었다. 은혜를 갚지 못한다는 부담이 저항감의 문턱을 넘고 말았다.
채주는 여맨 옷깃을 풀며 초에 바람을 불었다.
어두워진 처소. 어디선가 나는 달콤한 내음과 함께 채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취해도 좋아."
나는 채주의 말을 들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선 시간만 하염없이 흘렀다. 채주는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나는 문득, 못 들었다며 다시 말해달라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풍겨오는 이 은은한 분노는 생각을 그저 생각으로만 묻어두게 했다.
"다 들었습니다만, 조금 당황스러워서···."
"들었으면 할 일이나 해."
채주의 퉁명스런 말과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채주가 준비를 마치고 이부자리에 몸을 뉘인 소리였다. 나는 잠시 기다린 뒤, 조용히 말했다.
"채주님, 이건 경우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은은한 분노는 날선 살기가 되었다. 동침同寢은 채주의 마지막 문턱인 동시에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었다. 채주는 살기를 통해 내게 말했다. 같이 자지 못하겠다면, 죽어라.
하지만 내게 있어 이런 반응은 키우는 고양이의 앙탈과 같았
다.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채주님은 분명 취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지요."
"······."
긍정을 담은 침묵이었지만 살기는 점점 강해졌다. 좋다고 말했지만, 거절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서 선택해.
아무렴,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어떻게 취할지는 취하는 사람이 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무슨 의미지?"
"저는 밝은 불빛 아래에서, 채주님을 마주 보고 취하고 싶습니다."
"·········."
깊은 침묵. 그리고 긴 한숨. 채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다음에야 말했다.
"가만히 있어. 초에 불을 붙이고 올 테니깐."
드르륵―채주는 장지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채주를 기다리며 남은 계획을 점검하였다.
*채주는 금방 돌아왔다. 초가 아니라 화로를 들고 온 채주는 신경질적인 표정이었다.
"자, 네가 원하는 만큼 불을 밝혀봐."
아무래도 방금 간의 대화가 그녀를 토라지게 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안의 초 전부에 불을 붙였다.
어둠이 물러가자 채주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 밝음은 전에 보지 못했던 미약한 부분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붉게 물든 볼. 떨리는 눈초리. 채주의 목울대는 침이라도 삼키는지 작게 미동했다. 나는 그걸 보고 말했다.
"먼저 누우시지요."
채주는 말이 없었다. 어디 한번 원하는대로 해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런 태도에 질려 망설이지 않았다. 채주의 저 태도는
곧 자신에게 올 변화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태도였다. 어떻게 될지 아는 나에겐 그저 잔망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누운 채주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몽글한 가슴은 쥐는 모양대로 부드럽게 출렁였다.
"헛―"
채주에게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채주는 당당한 태도를 내던지고 화들짝 놀란 토끼처럼 변했다.
채주는 놀랐을 것이다. 이 사소한 움켜쥠이,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몸을 불태웠으니.
최면은 의식의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감정과 감각까지, 채주의 모든 것은 이미 자신의 의지와 달리 움직였다.
방금의 움켜쥠은 하나의 유발점이었다. 이제부터는 순탄대로다. 채주의 몸은 정해진대로 내 손길에 반응했다.
"아학―"
가슴을 쥐면 채주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흐앗―"
등골을 쓰다듬어도.
"하악―"
뺨을 매만져도 채주는 연신 반응했다.
일다경一茶頃 정도 어루만지자 채주의 몸은 땀에 흠뻑 젖었다. 채주는 몸을 숨기고 싶었겠지만, 이 환한 처소에선 그럴 방도가 없었다.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채주는 그저 내 손길
가는대로 꿈틀거렸다.
내가 처주의 비소秘所에 남성을 넣으려 하는 와중에도 채주는 달뜬 숨을 쉬고만 있었다. 나는 그런 채주의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 조용히 밀어넣었다.
이번엔 채주에게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의아하게 여겨 채주를 바라보니, 채주는 자신의 속곳을 입안에 쑤셔넣고 있었다.
실소가 나왔다. 그토록 많은 신음을 내질렀음에도, 그녀의 자존심은 지금 이 순간의 신음만큼은 막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가 지금 멈춰서는 그녀를 기만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몸을 움직였다.
*맹야묘猛野貓 강소영姜素瑛. 그녀는 평생 자신의 마음 가는대로 살았다.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기분이 좋을 땐 웃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충실했노라 장담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산채원이 멍청하게 불러들인 외지인. 의원이라길래 쓰임새가 있어 쓰긴 하였으나, 원칙대로라면 죽여야했다. 치료할 사람 다 치료했으면, 죽이는 게 산채의 규율이었다.
그러나 강소영은 그러지 않았다. 죽여야 한다는 규율이 있음에도, 산채원 몇 명이 넌지시 물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선 그녀 스스로도 설명을 할 자신이 없었다.
마음이 원했으니깐. 고작 이 이유였다. 하지만 마음대로 사는 강소영에게 있어선 이것이 바로 정언 명령이었다.
그저 살려두자는 생각은 어느새 변하고 말았다. 왕사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 의원. 포로 신세인 그가 산채를 위해, 자신을 위해 환자를 치료하는 건 늘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강소영은 그 짐을 덜어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썼다. 산채원도 돌려서 먹는 여인을 따로 보내준다던가, 일을 빼내준다던가. 나중에는 아예 정식 산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자 말을 꺼냈다. 왕사가 알겠다고만 답한다면, 분명 자신의 오른팔로 있었을 것이다.
거절.
왕사는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 시키는 일은 군말없이 했으나, 무언가 주려 하면 슬그머니 물러났다. 늘 이렇게 거절을 당하니 강소영은 마지막 수를 썼다. 이조차 받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를 죽여서라도 짐을 덜 셈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시비에게 왕사를 부르라 명했다. 왕사가 왔다. 왕사에게 자신을 취하라 말했고···.
'기억이 나질···.'
강소영은 이 순간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는 나신으로, 남성을 자신에게 밀어넣고 있는 왕사가 있었다.
왕사는 천연덕스럽게 강소영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야 정신 차리셨습니까?"
그는 말을 하면서도 하반신을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움직임. 이미 몇 번이고 드나든 곳을 다시 찾는 모양새였다. 강소영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자신의 안에는 뜨거운 무언가가 채워져 있었다.
'멈춰···.'
멈추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소영의 입은 신음성만 내보낼 뿐이었다.
왕사는 그녀의 심정도 모르고 거침없이 몸뚱이를 탐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극치의 쾌락이 그녀를 찾았다. 참을 수 없
는 교성이 그녀의 입을 뛰쳐나왔다.
멈추라는 말은 이미 뇌리에서 잊어졌다. 그녀의 다리가 왕사를 감쌌다. 몸을 떨쳐 내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탐하며, 서로의 몸이 맞부딪혔다.
한 시진··· 두 시진··· 왕사와 강소영은 드디어 지쳐 쓰러졌다. 중간중간에도 몇 번 그러긴 하였으나, 이번에는 회복될 기미마저 없는 완연한 탈진이었다.
강소영은 나신을 가리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극치의 황홀경.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 아래에서 조용히 잠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돌이켜봤다.
왕사를 안은 건 그녀의 의지였고, 왕사를 해치지 않은 것 또한 그녀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 뜻이 나오는 과정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당연하다 판단한 일은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그녀는 헐떡거리며 왕사에게 말했다.
"네, 네가··· 무언가를···."
강소영은 내심 왕사가 발뺌하길 바랐다. 분명 그녀의 감은 왕사에게서 느껴지는 불길함을 감지했지만, 운우지락을 나눈 남녀에겐 알게 모를 정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왕사는 그녀의 바람을 내팽개치듯 말했다.
"아, 정말 그 노인네의 말처럼 되는군."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채주님, 절 보십시오."
그녀는 알았다. 왕사가 자신을 보라 할 때마다 무언가 왜곡됐음을.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몸은 그녀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였다.
서로의 몸이 맞닿은 것처럼, 끈적이는 시선이 닿았다.
강소영의 눈에는 왕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로, 저 눈동자 깊이 빨려들어가는 듯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그녀는 눈에 빨려들어갔고, 어느새 주변은 모두 흑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흑색으로 가득찬 공간 속에서 한 목소리가 울렸다.
"―――!"
해가 밝았다. 강소영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키며 일어났다.
"···."
강소영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시비를 불러 씻을 물을 가져오라 말했다. 몸단장에는 취미가 없었지만, 얼굴을 씻는 건 이와 별개로 꼭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강소영은 평소의 일과를 뒤로 물렸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옆에 누운 남성을 일으켰다.
"무, 무슨···."
남성은 자다 깨어 상황을 분간하지 못했다. 강소영은 그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정신차려 임마. 나중에 또 해줄 테니깐."
얼떨떨한 표정의 남성도 그녀처럼 씨익 웃었다.
그녀는 그를 보며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정말 짜릿한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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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녹림-- >
나는 시비가 담아온 물에 얼굴을 씻었다. 딱히 씻을 생각은 없었지만 채주가 닦달하니 별 수 없었다.
채주는 이미 세안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몸을 숨길 기미도 없는 그 당당한 태도는 오히려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했다.
"흥, 흐, 흐흥―"
채주는 어울리지 않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 아침 햇살을 느끼며 옷을 입는 채주는 참
팔자 좋은 모습이었다.
"뭘 봐?"
채주는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짧게 말했다. 나는 그녀의 분노가 두려워 최대한 비굴한 모습을 취했다.
"그,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고, 바로 앞에서 옷을 입으시니···."
채주는 내 말을 듣자 빙그레 웃었다. 화를 낼 것 같은 태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웃으며 다가온 채주는 내 허리를 팡팡 두드렸다. 힘 좋은 채주가 이러니 허리에선 연신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채주는 날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
채주는 이 말을 남기고 밖을 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급히 얼굴을 씻었다.
그냥 건 최면은 불안하지만, 열락에 빠진 몸에 스며든 최면은 심상을 뒤흔든다. 노인이 말해줬기에 시도는 해봤지만, 채주의 저 변화는 예상밖이었다.
나는 채주 생각을 떨쳐내고 일을 준비했다. 내가 계획한 일은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
"다음―"
나는 다음 환자를 불렀다. 내 앞의 환자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날 호골채로 잡아온 털보. 그가 사나운 기색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야, 이게 뭐하는 짓인데?"
그는 자신의 성질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잔인하고 거친 성격을 이용해 얻어낼 걸 다 얻어내는 자였다. 나는 그가 껄끄러워 얼른 보내려 했다.
"한 분 한 분 말을 들어주기엔 환자가 많습니다. 다음―"
"야, 뭐하는 짓이냐고."
그는 거칠게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임시로 만든 탁자를 두고 그와 나는 실랑이를 하는 모양새가 됐다.
나는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채주님이 결정하신 사안입니다."
"채주가? 귀찮은 일 싫어하는 그 양반이 이 짓거릴 생각했다고? 똑바로 말해. 볼짝에 구멍 나면 말하기 힘들 테니까."
그는 그때 내 볼을 찌르던 비도飛刀를 꺼냈다. 그는 비도를 위협적으로 몇 번 휘두르더니, 탁자에 박아넣었다.
쿵―
비도가 박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세 치 길이의 칼날은 탁자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이를 불길한 표정으로 보자 그가 스산하게 웃었다. 다음에는 탁자가 아닌 내 얼굴이라 말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젠장, 최면술이 사내에게만 통했어도 이런 일을 없었을 텐데.
노인의 최면술은 무공을 익히지 않는 남성에게도 통했지만 난 아니었다. 내 최면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여성 뿐. 남성에게라면 아주 사소한 암시조차 밀어 넣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남자만 득실거리는 이 산채에선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래,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입을 다문 나를 보며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피비린내가 연상되는 비릿한 미소. 취미로 사람을 죽이는 자만 지어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손을 내저어 그를 막아내려 했다. 그는 내 손길을 가볍게 피하곤 탁자에 박힌 비도를 뽑았다.
"어느 쪽에 구멍이 나는 게 좋아? 왼쪽? 오른쪽?"
그는 이리 말하면서도 내가 선택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내 팔을 잡아챈 그는 날 무저항으로 만들었다.
"지금 니들 뭐하냐?"
순간, 방이 얼어붙었다.
싸늘한 목소리. 한기를 담은 채주의 목소리가 방을 얼렸다.
털보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환자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쭈? 두 번 말하게 하냐?"
"그, 그게 아니라···."
그는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는 이리저리 굴러가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채주에게 말했다.
"무공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무공? 쟤한테? 진짜?"
채주의 눈동자는 털보에게 떨어질 줄 몰랐다. 칼날이 나를 향하는 순간 바로 몸을 날릴 기색이었다.
지금 털보를 족쳐선 좋을 게 없었다. 내가 계획한 일을 위해선 산채원의 신뢰를 얻어야만 했다.
나는 채주를 말리기로 결심했다.
"네, 정말입니다. 좀 열정적으로 배우려고 하니···."
"······."
채주는 내 말을 듣고도 미심쩍은 모습이었다. 몇 번 혀를 차던 채주는 털보가 쥔 비도를 뺏어들었다.
"야, 위험하게 이런 거 들고 다니지 말고. 일 다 봤으면 다음 순번이나 불러와. 오늘 진료 안 받은 새낀 뒤질 줄 알라 전하고."
"예, 옛. 알겠습니다!"
채주는 털보의 비도를 손가락으로 구부렸다. 탁자를 관통하고도 아무 흠집 없던 칼날은 종이처럼 간단히 휘었다.
털보는 이 모습을 끝까지 보지도 않았다. 그는 대답과 동시에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다.
털보가 나간 걸 확인하자 채주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는 내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일은 좀 진행됐어?"
"절반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나는 채주의 명으로 산채원 전원의 진료를 보고 있었다. 남성은 물론 노리개 여인들까지. 이번 진료는 산채에 기거하는 모든 사람의 진료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는 내가 요청한 것이었다. 산채원의 진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몇 명이고 무엇을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이는 내게 꼭 필요하여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채주는 이런 내 요구를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요청과 동시에 떨어진 승낙. 그녀는 목적도 묻지 않고 기꺼이 허락하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채주의 이야기였다.
산채원들은 그러지 않았다. 누가 봐도 수상할 정도로 캐묻는 내 모습에 다들 불만을 표했다. 대부분은 채주의 명이라 하면 수그러들었지만, 방금의 털보처럼 험악한 경우도 있었다.
채주가 엄포했으니 이젠 별 문제가 없을까. 앞으로도 털보처럼 날뛰는 자가 있으면 곤혹스러웠다.
채주는 내 고민을 모르는지 방안을 서성였다. 나는 그녀가 언제 떠나려나 싶어 슬쩍 보자, 그녀는 새 의자를 꺼내오고 있었다.
"채주님?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할 일도 없으니깐 여기 있으려고. 왜, 싫어?"
"······."
물론 싫을 리 없었다.
*
"다 끝났습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채주를 깨웠다.
그녀는 정말 진료가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야 위험할 일이 없으니 고마웠지만, 산채원에겐 다른 모양이었다.
그들은 채주가 자신을 시험하나 싶어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었고, 다 끝난 지금은 완연한 어둠이었다.
"끄, 끝났어?"
아직도 반쯤 잠에 빠진 채주는 멍하니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몇 번 흔들었다. 잠깐의 실랑이가 있은 뒤 채주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일어난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웃음에서 불안함을 느끼며 뒷걸음 쳤다. 채주는 다가와 내 뺨을 잡았다.
"그럼, 어제 하던 일을 다시 해볼까?"
"그, 어제 하던 일이라면···."
채주의 웃음은 요부의 웃음이었다. 정精을 탐하는 굶주린 요부. 어제의 경험은 채주의 근간까지 바꾼 모양이었다.
나는 이제야 채주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오직 일을 빨리 치르기 위해. 일이 끝난 순간 날 잡아먹기 위해 바로 옆에서 기다린 것이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채주는 그에 맞춰 한 걸음 다가왔다. 이 좁은 움막에선 계속 피할 수도 없었다. 삽시간에 채주는 내게 바짝 붙어 몸을 밀착하였다.
"가만히 있어. 그냥 나한테 맡기면···."
그녀의 눈에 번들거리는 색광으로 봐선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영아."
채주.
아니, 채주였던 것이 말했다.
"네, 주인님."
그녀는 내 완벽한 지배 안에 있었다.
*최면 후암시. 한 번 암시에 빠진 대상을 순식간에 암시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다. 특정 단어, 특정 동작, 특정 상황. 어느
것을 열쇠로 하느냐는 달랐지만, 효과는 모두 같았다.
"···."
채주는 양팔을 몸에 딱 붙이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명하기 전까진 자세를 바꾸지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채주는 내가 이름을 부르면 당장 이 상태로 변했다. 이 암시는 지난 밤, 정신을 잃은 채주에게 단단히 걸어둔 암시였다.
나는 오막의 문을 열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둑해진 산채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일을 처리하자고 마음 먹으며 채주를 불렀다.
"소영아. 내가 말하는 것 중 틀린 게 있으면 바로 말해라."
이 상태의 채주에겐 존대를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채주가 알겠다고 말하는 걸 듣자 바로 말했다.
"내가 오늘 진료를 본 사내는 예순여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