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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490화 (1,485/1,497)

< 1490화 > 1490. 팔라딘: 악멸의 여정

타락자들이 일제히 본성을 드러냈다.

놈들은 내 눈을 속일 수 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타락자들은 모종의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고, 타락하지 않은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타락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달려드는 타락자를 죽이면서 상황을 살폈다.

성기사와 사제 중 타락자는 10%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녀의 경우 무려 80% 이상이 타락자였다.

"타락자를 죽여라!"

“헤리안느 여신을 위하여!"

성기사들이 타락자들을 향해 자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나는 끝까지 인간인 척 하는 수녀의 목을 베었다.

수녀.

교단에서 가장 철저한 규율로 신앙을 증명하는 여자들.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규율을 행하며 생활하는 그녀들이 가장쉽게 타락한다. 강력한 규율이 그녀들을 지나칠 정도로 순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은 그 무엇보다 더럽혀지기 쉬웠다.

"꺄아아아아아악!”

끝까지 인간인 척하던 수녀가 비명을 지르며 본성을 드러낸다. 타락자는 네발로 땅을 기면서 내게 순식간에 접근했다. 반사적으로 타락자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타락자가 위로 점프하며 내게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타락자의 손톱은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담담히 타락자의 머리를 왼손으로 잡아 터트렸다.

전투를. 아니, 작업을 이어간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타락자가 죽어 나간다. 도망치는 타락자에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이나 시체를 던졌다.

상황은 곧 정리되었다.

성기사들은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켰고, 사제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수녀들은 아직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혼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동료라 생각했던 자들 대부분이 타락자였으니 그럴 만 했다.

성기사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팔라딘이시여. 저는 교황청에 이렇게 많은 타락자가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내게 설명을 구하는가."

“이곳은 교황청입니다. 성물의 결계가 교황청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황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악마의 침입을 허용한 적 없습니다. 팔라딘께서 이 사태의 이유를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성기사 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단순히 성안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고 말하는 건 안 좋았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닐 테니.

"인간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악마가 있다."

"모든 악마가 그러합니다."

“그 악마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악마가 있다. 인간을 속이고, 인간 사회에 혼돈을 초래하는 악마. 한때, 그 악마의 속삭임으로 인하여 도시가 멸망한 적 있었다. 악마의 농간으로 신앙을 잃은 인간들이 서로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지."

“…갈텍스 도시를 말씀하시는군요. 그 일은 대악마 아리아스의… 설마! 아리아스가 교황청에 손을 농간을 부린 것입니까?!”

“아리아스는 형체가 있으나, 형체가 없는 대악마다. 교황청에 스며들 수 있는 악마는 아리아스 말고는 없다."

대악마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가 긴장했다. 사태의 심각성도 그들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아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리아스의 능력은 빙의다. 아리아스는 인간에게 방빙의하여 세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타락시킨다. 그대가 아리아스라면 누구에게 빙의하겠나?"

“……교황 폐하. 교황 폐하가 아리아스에게 당한 것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교황 폐하께서는 헤리안느 여신님의 가호가 있습니다!"

"아리아스는 대악마다."

"……."

이 세상에서 대악마의 위명은 대단했다. 그 이름만으로 성기사와 사제들이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대악마는 수 천년간 인간을 괴롭혀온 불멸의 존재이니.

"나는 대악마 아리아스를 죽일 것이다."

“…저희도 팔라딘을 따르겠습니다."

그때, 사자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팔라딘이시여! 다른 지역의 팔라딘께 지원을 요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귀환석을 이용하면 바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지역의 팔라딘에게 연락할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

“성법을 이용하면 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할 거다. 아리아스는 이미 지금 상황을 알고 있다. 아리아스가 마법으로 연락을 방해할 것이다."

“예?”

나는 뒤를 돌아봤다.

열린 입구를 통해 외성이 보인다. 외성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다.

“설마 이리아스의 입김이 내성에만 닿아 있다고 생각했나? 외성에 숨어 있던 타락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팔라딘이시여,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성기사가 경악한다. 검 자루를 꽉 쥐었다. 당장에라도 외상으로 튀어 나가고 싶은 모양이지만, 내성에는 아리아스라는 대악마가 있다. 또한 내성 곳곳에 타락자가 숨어 있을 것이다.

"외성에 있는 성기사와 사제들을 믿어라. 너희는 내성에 숨어 있는 타락자를 찾아내 처단하라. 나는… 아리아스를 처단하겠다."

"명령대로 행하겠습니다, 팔라딘이시여."

자잘한 것들은 모두 맡겼다. 그들은 내가 자세히 명령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모여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긴 복도를 걷는다. 복도는 깨끗했고, 벽에 장식된 조각품들은 화려했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볕은 따뜻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평화로웠다.

철컥철컥.

갑옷 부딪치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후후후후

가볍게 웃는 여자의 웃음소리는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는다. 어딘가 퇴폐적인 목소리는 노골적으로 나를 유혹한다.

시야도 변한다. 보이는 풍경들이 왜곡된다. 땅이 호수처럼 물결치며 흔들렸다. 그러나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은 변함이없다.

이건 환각이다. 아리아스가 내게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

'절대 정신이었다면 환각 따윈 걸리지도 않았을 텐데.'

신성한 정신도 마냥 쓸모없지만은 않다. 자잘한 저주는 아예 통하지도 않고, 정신 자체가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으니까. 환각은 보여도 내 정신은 멀쩡하다.

-여신은 아무것도 보상하지 않아.

-네가 여신을 위해 악마를 죽여도, 여신은 그저 침묵할 뿐이지.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널 황제로 만들어줄게. 모든 인간이 네 발아래 무릎 꿇게 만들어 줄게.

-그 힘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어. 우리처럼 불멸자가 되어 영원히 살아가는 거야. 네겐 자격이 있어.

“개소리 집어치워라, 아리아스."

-대단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은 그야말로 성기사의 모범이야.

-하지만 너는 인간이지.

-나는 느껴져. 강한 정신력으로 억누르고 있지만… 결코 없앨 수 없는 강렬한 욕구가.

-욕구를 절제하지 마.

-욕구를 절제할 필요가 있을까? 너의 그 욕구도 네가 원하는 것의 일부잖아.

-네 욕구를 받아들여. 욕구가 충족시켰을 때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으니까.

"귀만 간지러울 뿐이다. 네 말은 내 정신과 영혼을 흔들지 못한다. 네년이 교황에게 달라붙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곧 도착하니 죽을 준비나 하고 있어라."

-후후후후.

-무서운걸?

-교황을 죽일 생각이야?

-교황은 너희가 가장 존경하는 인간이잖아. 그래도 죽일 거야?

-교황은 욕구에 굴복했어. 귀족으로부터 황금을 받고, 매 끼니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지.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옷을 입고, 밤마다 수녀를 겁탈했지.

-너도 할 수 있어.

-내가 하게 해줄게.

-넌 그저 네 안의 욕구를 개방하면 돼.

"마음껏 지껄여라.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니."

시야가 일렁인다. 환각이 더 심해졌다.

여자들이 나타났다.

알몸의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귀를 때린다.

여자들은 복도 곳곳에 있었다. 저마다 모습과 매력이 달랐다. 다리가 매력적인 여자가 있는가 하면, 커다란 가슴을 내밀며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여자도 있었다. 수줍게 웃는 여자가 있었고,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요염한 여자도 있었다.

엉덩이를 내미는 여자, 보지를 활짝 벌리는 여자, 내게 손짓하는 여자. 나는 여자들을 전부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코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살냄새라고 해야 하나? 남자의 마음을 들쑤시는 냄새였다.

물론 이것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이게 네가 가진 욕구야.

-네 안에는 거대한 색욕이 있어. 너는 강력한 정신으로 절제하고 있지.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야.

-버티기 힘들지?

-버티지 마. 네 행복은 눈앞에 있어.

저 끝에 교황이 있는 화려한 방이 보인다.

성안(聖眼)이 내게 알려주고 있다. 저곳에 대악마가 있음을.

복도 벽에 줄지어서 나를 유혹하던 여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내 몸에 달라붙는다. 나는 갑옷을 입고 있는데도 여자들의 부드러운 살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육체는 여자들의 살결에 반응했다.

나는 팔을 휘둘러 여자들을 떨쳐내려고 했다. 소용없었다. 이 여자들은 모두 환각이기 때문이다.

그저 무시하고 앞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에 가까워질수록 여자들은 더 노골적으로 나를 유혹했다. 풍만한 가슴으로 내 어깨를 감싸고, 은밀한 부위로 내 허벅지를 비빈다.

문이 가까워진다.

여자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문 바로 앞에 섰을 때는 단 한 명의 여자도 내 곁에 없었다. 아리아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문을 밀었다.

쾅!

문이 열린다.

화려한 그랜드 홀이었다. 홀의 끝에는 인자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로 10명이 넘는 알몸의 수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은 수녀들로부터 흘러나온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수녀들의 음부는 파열되어 있으며, 복부는 파헤쳐져 있었다.

교황 하인스는 양손에 수녀들의 내장을 쥐고 있었다. 그의 인자한 얼굴에는 피와 내장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오! 발렌티어의 팔라딘이여! 잘 와주었다. 마침 식사 중이었지. 자네도 함께하겠나?”

하인스가 친근한 말투로 말한다.

나는 발렌티어의 성검을 들었다.

"타락할 대로 타락했군. 죽어라."

검을 휘두른다. 황금빛의 검기가 하인스에게 날아갔다. 하인스가 손바닥을 위로 올렸다. 황금빛 배리어가 내가 날린 검기를 막아냈다.

“나는 타락하지 않았네. 보게.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나. 내가 타락했다면, 신성력도 사용하지 못했겠지.”

"마법을 이용해 신성력으로 위장했다는 걸 모를 줄 아나. 아리아스! 기만의 대악마! 네년의 능력은 알고 있다!"

하인스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하군. 그대는 너무 위험하니 여기서 죽어줘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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