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9화 > 1489. 팔라딘: 악멸의 여정
이 세계에는 8개의 지역이 존재한다.
발렌티어는 8개의 지역 중 한 곳일 뿐이고, 각 지역마다 팔라딘이 담당했다.
즉, 나를 포함해 총 8명의 팔라딘이 있는 것이다.
'현실의 지구와 비교하자면 너무 작은 세계지. 어쩌면 다른 대륙이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고.'
다른 대륙의 존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로 인해 발렌티어가 안전해졌다는 거다.
발렌티어는 본래 대악마의 수톤으로 인해 8지역 중에서도 위험한 지역으로 손꼽혔다. 특히 최근에는 전대 팔라딘이 죽으면서 더 위험해졌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며 상황이 바뀌었다. 나는 내가 아는 정보를 이용해 악마와 타락자, 이단을 찾아내 깡그리 죽였다. 심지어 대악마까지 죽였다.
발렌티어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안전해졌다. 발렌티어의 사람들이 기뻐할 일이었다.
사람들과 달리 나는 살짝 초조해진 상태다.
성장이 멈췄다.
악마와 타락자를 죽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도시 중심, 철 십자가에 매달린 악마가 하나 있긴 하나, 이놈은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내가 시킨 대로 악마를 쥐어패고 있겠지.
'나태는 죄악이지. 한 번 더 이단을 색출해볼까. 주민들의 신앙심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누군가는 수련이나, 다른 지역으로 가면 되지 않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수련은 매일하고 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오후가 될 때까지 수련한다. 그러나 강해지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효율의 문제였다. 나는 1년 수련하는 것보다 10마리의 악마를 잡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건 내 뜻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말하자면, 팔라딘은 그 지역의 왕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팔라딘이 멋대로 다른 지역으로 들어가 악마를 사냥한다? 그 지역의 팔라딘과 교단 세력이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선 영토 침입이고, 침략이니까.
팔라딘이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려면 귀찮더라도 절차를 밟아야 한다.
"팔라딘이시여."
성기사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말하라."
“교황청의 전령이 도착했나이다. 접견실에서 팔라딘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드디어 왔군."
교황청의 전령이 무엇을 말할지는 알고 있었다.
발렌티어의 대악마 수톤이 부활이 1막의 내용이었다면, 2막은 교황청의 전령이 도착하고서부터 시작되니까.
나는 빠른 걸음으로 접견실로 향했다.
접견실의 문을 열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교황청의 전령은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교황청의 주교, 프란시스라고 합니다. 교황 폐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교황청의 주교가 직접 올 줄은 몰랐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교황 폐하의 전언은 무엇인가?"
“교황 폐하께선 팔라딘의 공적에 무척이나 기뻐하고 계십니다."
"팔라딘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고작 그 말을 전하려고 전령을 보냈을 리는 없을 텐데."
"교황 페하께서 발렌티어의 팔라딘께 직접 축복을 내리기로 하셨습니다. 또한 대악마의 처단과 발렌티어의 안정을 되찾은 공로를 인정하여 팔라딘 전용의 성물을 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내 전용의 성물이라…."
"어떠한 종류의 성물을 원하시는지요?”
"성검."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발렌티어의 성검이 있으나, 검 한 자루로는 불안하다. 발렌티어의 성검은 이미 부러진 바가 있으니, 새로운 성검이 한 자루 더 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다만, 팔라딘의 성검을 제작하기 위해선 성혈이 필요합니다."
"성혈이라면 피를 말하는 건가?"
"그러합니다."
"알겠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이것도 원작의 내용대로였다.
교황청의 주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돌멩이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교황청의 위치가 저장된 귀환석입니다. 교황청은 팔라딘님을 맞이할 준비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저와 함께 교황청으로 가시지요. 혹여 다른 바쁜 일이 있으시다면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어차피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지금 가도록 하지."
귀환석을 받았다.
신성력을 사용한다. 귀환석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귀환석의 빛이 내 몸을 감싼다. 주교 또한 귀환석을 사용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나와 주교는 접견실에서 사라졌다.
팟.
교황청 입구에 나와 주교가 나타났다.
20m가 넘는 거대한 하얀 성벽이 나를 맞이했다. 열려 있는 성문 입구에는 하얀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검을 뽑아 땅에 박으며 예를 표했다.
“발렌티어의 팔라딘이시여, 제가 교황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주교가 앞장서서 걸어간다.
교황청은 발렌티어 도시보다 작았다. 허나 발렌티어 도시 보다 훨씬 발전해 있었다. 시민들의 얼굴은 밝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린다.
교황청은 8지역 중심에 있으며, 악으로부터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곳이었다.
교황청에 생활하고 있는 시민들은 모두 그 출신이 평범하지 않다. 귀족의 방계, 사제의 혈족, 팔라딘의 후손, 타고난 기술자 등의 특별한 인간들만이 교황청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 중심에는 교황청 건물이 있었다. 성벽만큼이나 새하얀 성이었다. '백환' 세계의 왕궁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하얀 성이다. 성의 뒤편에는 30m에 달하는 거대한 조각상이 있었다.
전신 갑옷을 입고 대검을 바닥에 박은 상태로 위엄있게 서 있는 조각상.
“저 조각상. 굉장히 눈에 띄는군."
“디아로스 님이십니다. 처음으로 헤리안느 여신님의 계시를 받은 최초의 팔라딘이시지요."
"대악마 둘을 죽였다는 그분이신가."
“예. 그 또한 디아로스 님의 업적 중 하나입니다. 디아로스 님의 가장 큰 업적은 인류를 하나로 묶을 교단의 기틀을 마련하신 일입니다. 지금의 교단은 디아로스 님의 헌신이 있었기에 존재합니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조각상이 너무 커서 시선이 향했을 뿐이다. 최초의 팔라딘 같은 거에 관심 없었다.
교황청으로 향하는데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나를 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사람들이 날 반기는군."
"팔라딘께서 대악마 수톤을 처단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위대한 업적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교황청이 준비했나?"
"모두 자발적으로 팔라딘 님을 환영하고 있는 겁니다."
키이이이이잉.
나는 성안을 사용해 주위를 살펴봤다. 그러자 환호성이 더 터져 나왔다.
주교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악마와 타락자, 이단을 구분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들 중에 이단이 있습니까?"
“…없군."
있을 리가 있나.
나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면 내가 이단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위험을 감수하면서 내 앞에 나타날 이유가 전혀 없다.
"교황청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헤리안느 여신님의 성물의 결계로 교황청을 지키고, 저희 사제들은 100일마다 시민들과 함께 정화 의식을 실행합니다. 악마들은 감히 교황청을 노릴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곳은 성지입니다."
주교가 침을 튀기며 교황청을 자랑했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교황청이 지금까지 악마의 습격을 받지 않은 이유는 결계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교황청을 공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지역에서 충분히 잡아먹을 수 있다. 변태 같은 악마가 아니고서야 경계가 삼엄한 교황청을 노릴 이유가 없지.'
교황청에 들어왔다.
수많은 성기사와 사제, 수녀들이 나를 반긴다.
주교는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교황청이 준비한 이벤트였다. 자기들이 얼마나 나를 반기고 있는지 생색내기 위한 이벤트.
“못 참겠군."
"네?"
스톰브레이커를 소환한다. 촤르르륵. 창의 형태로 스톰브레이커가 조각조각 분해되더니 내 몸에 달라붙어 갑옷이 되었다. 이어서 나는 발렌티어의 성검을 소환해 앞에 있는 주교의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끄아아악?!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시끄럽다, 타락자. 마법으로 몸을 숨기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내 눈은 악마의 마법도 꿰뚫어 본다."
"전 타락자가 아닙니다!"
"심장이 파괴되고도 잘도 지껄이는군. 네놈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네놈이 타락자인 증거다."
주교가 양팔을 버둥거리며 뒷걸음질을 친다. 나는 왼손을 뻗어 주교의 목을 잡아당겼다. 주교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내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허나 내 힘이 놈보다 더 강했다.
"발렌티어의 팔라딘이 미쳤다! 대악마 수톤의 저주가 팔라딘을 지배하고 있다! 성기사들이여! 뭣릿들 하느냐! 팔라딘을 막아라! 사제들이여! 발렌티어의 팔라딘은 타락했다! 성법으로 팔라딘을 막아라! 수녀들이여! 사제들을 지원하라!"
성기사들이 대검을 들고, 사제들이 기도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허나 그들의 눈에 서린 당혹스러움이 행동을 망설이게 했다.
교황청의 주교와 대악마를 처단한 팔라딘. 어느 쪽이 더 지위가 높고 영향력이 큰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나서지 마라. 지금 나는 타락자를 처단 중이다."
"…팔라딘이시여, 프란시스 주교는 교황 폐하의 제자 중 한 분 이십니다. 그분이 타락자라는 증거는…."
성기사 한 명이 이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성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 눈이 증거다. 설마, 헤리안느 여신님께서 내려주신 이 성스러운 눈을 부정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허나, 이곳은 교황청입니다!"
“악마는 바퀴벌레와 같다.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하더라도 질리지도 않고 기어 나오지. 지금껏 교황청이라 무사했다? 그딴 안일한 생각은 버려라. 악마는 어디에나 있다. 교황청이라 하여 다르지 않다."
그 성기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성기사가 튀어나와 내게 검을 휘두른다. 나는 주교를 베어 죽이는 동시에 몸을 회전시켜 성기사의 검을 막았다.
“발렌티어의 팔라딘은 타락했다! 놈을 죽여라! 이곳은 교황 폐하께서 머무시는 곳! 교황 폐하를 위해 이단을 처단해야 한다!"
나는 대검에 신성검을 덧씌웠다. 황금 빛으로 빛나는 검이 성기사의 검과 갑옷을 단번에 베어낸다. 성기사가 무릎 꿇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성기사의 상처 부위가 꿈틀거리며 회복을 시작한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재생능력이다.
“들어라, 성기사들이여. 너희의 신앙이 향해야 할 곳은 교황이 아니다. 너희의 신앙은 오롯이 헤리안느 여신님의 것이다."
성기사가 본성을 드러낸다. 피부가 붉게 변하고, 주둥이가 짐승의 것처럼 튀어나온다.
나는 홀리 오라를 터트렸다.
내게서 발생한 성스러운 기운이 공간을 지배한다. 타락자는 성스러운 기운에 짓눌러 굼떠졌다.
"팔라딘의 이름으로 명한다. 성기사들이여, 너희의 의무를 다하라."
성검을 휘두른다.
타락자의 육체가 양단되어 피와 내장을 쏟았다.
"악을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