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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486화 (1,481/1,497)

< 1486화 > 1486. 팔라딘: 악멸의 여정

천천히 의식을 진행하던 제단을 둘러봤다. 제단 근처에 있던 악마들은 없었다. 그저 피로 얼룩진 제단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제단 위에는 사악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경험해봤던 마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다.

나는 제단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두려움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대악마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뿐이다.

콰직.

지나가는 길에 있는 바바로약스의 시체를 힘주어 밟고 지나갔다. 네크로맨서의 시체가 두려워 옆으로 돌아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단에 도착하기 전에, 변화가 일어났다. 제단에 모여있던 마력들이 살덩어리로 변해 아래로 툭 떨어진 것이다.

살덩어리는 살아있는 것처럼 꾸물거린다. 그리고 증식이라도 하듯이 그 덩치를 점점 키워갔다. 3m까지 성장하기까지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좋군, 좋아. 다시 태어나는 이 기분…. 오직 나와 같은 존재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분이지.”

살덩어리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살덩어리의 형태가 다시 변한다.

손가락.

무수히 많은 손가락이 꼬이고 꼬인다. 눈동자는 없다. 다리도 없다. 팔도 없다. 오직 손가락만이 꼬이고 꼬였다. 작은 손가락, 큰 손가락,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수천 개가 넘는 손가락은 마치 인간 같은 형태로 변했다. 날개까지 있었다. 물론 이것도 손가락으로 달려 있었다.

대악마 수톤.

이곳에 부활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성창을 꺼냈다.

수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아니, 눈이 없으니 그 의식이 내게 향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네가 발렌티어의 새로운 팔라딘인가?"

“넌 대악마 수톤이군."

"발렌티어에 새로운 팔라딘이 나타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벌써 이러한 힘을 가졌다니…. 대단하군."

"죽어 있던 놈이 귀가 밝군."

"죽어 있다 하더라도 내 눈과 귀는 여전히 열려 있다."

"눈도 귀도 없는 놈이?"

"눈이 있어야 세상을 보고, 귀가 있어야 소리를 듣고, 입이 있어야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상식이 너희 필멸자의 한계다."

나는 대악마에게 다가갔다.

대악마는 가만히 서서 말했다.

"제안이 있다."

"뭐지?"

"악마가 되어 나를 섬겨라. 네게 힘을 주마. 필멸자의 육체를 벗어날 기회를 주마. 그 여신에게 너는 너무 아깝군."

"널 죽이게 해준다면 고려해 보지.”

"단칼의 거절인가. 알았다. 이곳에서 죽어라, 여신의 종이여. 살려두기엔 너는 너무 위험하다."

수톤이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친다. 그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발산되었다.

‘놈의 공격은 둘째치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건 막아야 한다.'

공중에 나는 적을 상대하는 건 매우 성가신 일이었다.

'찰나.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3]

성창 로티스를 투창한다.

놈은 반응하지 못했다. 찰나를 썼다곤 하나, 아예 무반응인 건 예상 밖이었다.

'방금 막 부활했으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거겠지.'

다시 말해.

'운이 좋군.'

성창은 놈의 날개를 찢어발겼을 뿐만이 아니라 폭풍처럼 날뛰려던 마력의 흐름을 끊었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성창에는 아직 대량의 신성력이 남아 있었다.

'역소환. 소환.'

벽에 박힌 성창을 다시 내 손에 소환한다.

우우웅.

성창이 울었다. 동시에 막대한 신성력이 내게 흘려들어 온다.

성창의 의지는 명확했다. 성창은 눈앞에 있는 대악마를 죽이기를 원하고 있었다.

"날개가 찢어졌군. 빌어먹을 기운이 좀먹고 있으니… 당장 회복할 수도 없고…. 시작부터 날 기분 나쁘게 해주는구나."

"내가 네 기분 따위를 염려해야 하나?"

악마가 손을 까딱였다.

내 앞의 공간이 일그러진다. 나는 위기를 감지한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반응했다. 일그러진 공간에서 길쭉한 손가락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있었다면 손가락에 심장이 찔려 죽었을 것이다.

"빠르군."

놈의 공격은 다시 이어졌다. 정면, 오른쪽, 머리 위. 동시에 공간이 일그러진다.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2]

달리기 시작한다.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손가락을 최대한 피한다. 못 피할 것 같으면 성창으로 쳐냈다. 까앙! 허공에서 튀어나온 손가락은 강철 이상으로 단단했다.

짝.

수톤이 박수를 친다.

바닥에서 손가락들이 튀어나왔다. 손가락들이 내 주위를 감싼다.

'피할 틈이 없군.'

홀리 오라.

신성한 기운이 퍼지며 손가락들을 떨쳐냈다.

“그 성창.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군."

수톤이 팔을 휘둘렀다. 채찍처럼 늘어나더니 내 몸을 후려쳤다.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한 대 맞았는데 스톰브레이커 갑옷이 버티지 못하고 찢어졌다.

'한 대 더 맞으면 죽는다.'

다시 말해 안 맞으면 된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

벌떡 일어나 수톤을 향해 도약했다.

'빛나라.'

성창에서 빛이 났다. 빛은 사방을 잠식했다. 수톤의 마력으로 가득했던 공간을 성창이 한순간에 장악한 것이다.

200년 동안 성창에 쌓인 신성력이 대악마의 힘을 일시적으로 막은 것이다.

대처하려던 수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마법을 쓸 수 없까되었으니 당연했다.

물론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놈이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그 육체가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수톤은 마법 없이 육체 능력만으로도 날 죽일 수 있었다.

수톤이 나를 향해 손가락을 내민다. 손가락 끝에 응축된 마력이 느껴진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0]

찰나로 공격을 피한다. 완전 회복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부러 맞아 줄 이유는 없었다.

'신성검.'

성창의 신성력을 모조리 사용했다.

창날에 황금빛 신성력이 모여들어 검신을 이룬다. 검신은 순식간에 커져 10m를 가뿐히 넘겼다. 성창의 창대는 검자루가 되었다. 나는 크기에 비해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신성검을 수톤을 향해 휘둘렀다.

수톤의 육체와 함께 성까지 한 번에 베어진다.

"내가 이따위에…!"

수톤이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반으로 잘린 몸이 억지로 서로 달라붙어 회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결착은 났다. 신성검의 신성력은 폼이 아니다. 200년 동안 쌓인 신성력이다. 아무리 대악마라도 감당할 수 없다.

수톤의 육체가 무너진다. 신성력이 수톤의 육체를 녹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불멸의 존재다! 이 세상은 다시금 나를 맞이할 것이다!"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대악마 수톤의 영혼이 내게 달라붙는다.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대악마의 영혼을 받아들였다.

몸이 깨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은 내 몸을 마구잡이로 휘젓더니 머리로 올라갔다. 내 정신을 침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남아 있는 신성력이 타락의 기운을 차단했다.

"후."

한숨을 내쉬었다. 대악마의 영혼은 역시라고 할까. 보통이 아니었다.

자리를 벗어나려던 내 눈에 대악마의 시체가 보였다. 신성력에 의해 녹아내리고 있는 시체. 나는 시체가 전부 녹아내리기 전에 대악마의 심장을 꺼냈다. 대악마의 심장을 사용할 곳은 이미 정해 놓았다.

'성창은… 평범한 상태로 돌아왔군.

200년간 쌓인 신성력을 전부 사용했다. 성창은 그저 단단한 창으로 변했다. 성창의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는 그랜드홀을 떠나기 전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천장에 남은 검혼은 하늘에까지 새겨져 있다. 하늘을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이 반으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 마치 하늘이 어긋나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200년의 신성력… 대단하긴 하군.'

감상은 거기까지.

몸을 돌려 그랜드홀을 떠났다.

오늘 대악마 하나가 죽었다. 남은 건 1마리다.

발렌티어 도시로 들어갔다.

시민들이 모두 대로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백마를 타고 당당히 걸어가는 나를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부활한 대악마 수톤이 죽었다는 사실이 시민들에게 퍼진 것이다.

그들은 내 앞길을 축복하듯 꽃가루를 뿌렸다. 내 뒤를 따르는 성기사와 이단심문관들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팔라딘이시여!"

"팔라딘께 영광을!"

"헤리안느 여신께 감사를!"

기쁨을 느끼는 시민들은 자기들끼리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젊은 여자들 몇몇은 내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졌다. 불경하다고 소리칠까 하다가 관뒀다.

'대악마 하나가 죽었으니 세상이 조금이나마 평화로워졌다.'

대악마 수톤.

발렌티어 도시의 가장 골칫거리였다. 놈은 발렌티어 대도시를 끊임없이 노리는 대악마였으니까. 그런 놈이 죽었다. 놈이 부활하려면 수 십 년이 걸릴 것이다. 물론 그건 대악마의 영혼이 내게서 풀려난 뒤의 이야기다.

'대악마가 모두 죽으면 이 세계가 평화로워질까?'

그럴 일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인간들은 서로 대립할 것이다. 어쩌면 교단과 귀족들이 서로에게 칼끝을 들을 밀 수도 있다.

'대악마가 모두 죽고 난 뒤의 상황은 내 알바 아니다.'

내 목적은 대악마를 모조리 처단하는 것.

거기까지였다.

성소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성스러운 연못에 몸을 담갔다.

내 육체를 좀먹고 정신을 끌어내리려던 타락의 기운이 정화된다.

정화 의식은 사흘 동안 이어졌다.

대악마의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다 보니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 그럼에도 대악마의 영혼을 완벽히 정화하지 못했다. 대악마는 불멸이기 때문이다.

"정화 의식이 끝났습니다. 이혼(離魂)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뭘 해야 하지?”

“제 등에 손을 얹어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여신의 조각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나는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녀의 복장은 언제봐도 신기했다. 등을 훤히 드러낸 복장. 어떻게 보면 선정적으로도 느껴졌다.

나는 성흔이 새겨진 그녀의 등에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그녀의 등에 닿는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동시에 그녀의 심장 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성흔이 빛나기 시작했다.

내 안에 달라붙어 있던 대악마의 영혼이 그녀의 등으로 이동한다.

날개 달린 십자가.

그 십자가 아래에 대악마의 영혼이 새겨졌다. 교차된 손가락 그림이다.

"팔라딘이시여, 고생하셨습니다. 대악마 수톤의 영혼은 제게 봉인되었습니다."

"대악마의 영혼이다. 아무렇지 않나?"

“제 걱정은 하지 마시길. 저는 이 성소에서 항상 몸을 정화할 것입니다. 대악마의 영혼은 절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악마의 영혼은 그녀에게 봉인되었다. 봉인되었으니 힘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임 속에서도 팔라딘이 타락하는 일은 있으나, 성녀가 타락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이제 정산할 차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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