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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485화 (1,480/1,497)

< 1485화 > 1485. 팔라딘: 악멸의 여정

네크로맨서 바바로약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시간 벌기.

악마들이 자신들을 희생하여 대악마 부활 의식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적당히 어울려 줘야겠군.'

땅속에서 언데드가 일어난다. 대부분이 최하급 언데드인 스켈레톤이다. 내겐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놈들이지만, 그 수가 수천에 달한다.

'언데드는 타락자에 비해 경험치를 적게 주지.'

대부분 언데드가 타락자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치라는 건 원래 티끌을 끌어모아 레벨업을 하는 것이다. 나는 가까이 있는 스켈레톤에게 발길질했다. 스켈레톤의 몸이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이따위 놈들을 상대로 성창을 사용하기엔 아깝다.'

성창은 인벤토리에 넣고 대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뼈밖에 없는 스켈레톤들이 달려든다. 지능이 낮은 만큼 날 향한 두려움도 없었다. 나는 몸을 회전하며 팽이처럼 대검을 휘둘렀다. 스켈레톤들이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뼛조각들이 허공으로 비산 한다.

"오너라, 나의 종이여. 나의 적을 쓰러뜨리거라."

바바로약스가 해골 지팡이로 땅을 쿵쿵 찍었다. 그의 마력이 퍼진다. 스켈레톤 일부가 반응했다. 수백의 스켈레톤이 한곳에 뭉치고 압축되더니 갑옷을 입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나는 달려드는 스켈레톤을 주먹으로 쳐내며 그것을 주시했다.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군.”

그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말했다.

"전대 발렌티어의 팔라딘은 대단했습니다. 인품과 실력. 그 어느 것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었습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대악마 수톤님께 덤벼들었지요. 저는 수톤님으로부터 팔라딘의 뼈를 받았습니다. 제 앞에, 그리고 당신의 앞에 있는 뼈 무더기는 곧 전대 발렌티어의 팔라딘입니다."

"역겨운 짓을 서슴지 않고 하는군.”

"저도 가끔 제가 하는 짓이 역겹게 느껴지곤 합니다. 시체를 만지작거릴 때 주로 그러죠. 하지만 완성된 제 군세를 보십시오! 당신의 역겨움은 곧 나에 대한 공포일지어니! 그대 또한 이 군세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죽음의 평원이라고 했나? 너는 이곳에서 네 뼈다귀들과 함께 영원히 잠들 것이다."

홀리 오라를 터트린다.

사방에서 내게 다가오던 언데드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쿵쿵쿵.

생전에 팔라딘이었던 스컬 나이트가 다가온다.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으로 이루어진 만큼 무게가 상당히 나간다. 방어력도 엄청나 보인다. 스컬 나이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스켈레톤을 전차처럼 밀어버리며 움직인다.

내가 대검을 들며 전투 자세를 취하자, 스컬 나이트 또한 뼈로 된 대검을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가까이서 본 스컬 나이트의 몸체는 나보다 2.5배는 컸다.

스컬 나이트가 먼저 검을 휘둘렀다. 언데드의 검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그러나.

'찰나.'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스컬 나이트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카운터 일격을 날린다. 황금빛을 머금은 내 검이 스컬 나이트의 목을 때린 것이다. 베어낼 생각이었지만… 스컬 나이트의 몸은 예측 이상으로 더 단단했다.

놈이 곧바로 반격에 나선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언데드이기에 가능한 반격이었다. 나는 바닥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전대 팔라딘이라…. 움직임만 보면 확실히 뛰어난 검술이군. 웬만한 성기사 따위로는 상대도 안 되겠군.'

스컬 나이트가 뼈검을 휘두른다. 나는 대검을 비스듬히 눕혀 스컬 나이트의 검격을 비껴냈다. 스컬 나이트의 검이 미끄러지며 불똥이 사방에 튀었다.

다른 성기사와 나는 전투 경험부터가 다르다. 검술? 이 세계에서 검술 하나만 놓고 따지고 봤을 때 내게 비빌 수 있는 존재가 있나 싶다.

그때, 검격을 주고받던 스컬 나이트의 하세가 특이하게 바뀌었다. 뒤로 물러나서 검을 뒤로 내뺀다.

'시간이라면 충분히 끌었다.'

파지직.

검날에서 황금빛 뇌전이 튀었다.

뇌천류(雷天流) 만뢰(卍雷).

대검을 중심으로 황금빛 만뢰가 회전하며 모여든다.

나는 이 세상에서 뇌천류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뇌천류가 없어도 순수 검술만으로도 충분히 악마와 타락자들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게 첫 번째 이유였다. 기술보다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편이 더 내 취향이기도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유는 뇌천류를 펑펑 쓸 수 있을 정도로 신성력이 남아도는 게 아니라는 것과 대검으로 뇌천류를 펼치기엔 여러 가지로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일격이 필요한 지금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지.'

스컬 나이트가 검을 휘두른다. 나 또한 그에 맞춰 만뢰를 품은 검을 휘둘렀다.

콰르르르르르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황금빛 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내 검은 스컬 나이트의 몸통을 베어 갈랐다. 전류가 스컬 나이트의 뼛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스컬 나이트가 가진 사악한 기운이 황금빛 번개에 잡아 먹히며 사라진다. 쿠웅! 스컬 나이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쓰러진 스컬 나이트 위로 올라갔다. 대검을 역수로 쥐고 내려찍으며 마무리를 짓는다.

"바바로약스! 다음은 네놈 차례다!"

포효를 내질렀다.

당장 더 많은 스켈레톤을 데려오라는 뜻을 담은 외침이었다.

하지만 내 외침에 바바로약스는 다르게 느꼈는지, 추가로 스켈레톤을 소환하는 게 아니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사방에 쌓여 있던 스켈레톤들이 우수수 무너진다. 그 뼈들은 모두 바바로약스의 주위로 날아갔다.

'직접 전투에 나설 생각인가?'

날아간 뼈는 거대한 코끼리의 형상을 취한다. 코끼리 속에서 바바로약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은 제가 전력을 내비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강합니다. 당신은 제가 직접 짓밟아 드리겠습니다."

높이만 10m에 달하는 커다란 코끼리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놈의 길쭉한 코는 검처럼 날카로웠다.

정면에서 맞서는 건 미친 짓이다. 나는 바로 옆으로 달려 코끼리의 돌진을 피했다. 코끼리가 방향을 틀었다. 워낙 크고 육중한 몸이다 보니 방향을 틀 때 속도가 느려졌다.

'기회다. 질주.'

질주 스킬을 발동한다. 가속이나 찰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질주를 쓰면 보이지 않는 힘이 내 몸을 밀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 이단 점프를 할 수 있다.

이단 점프 한 번만으로 코끼리의 위로 오르지 못했다. 나는 코끼리의 몸을 박차며 이단 점프를 3번 연속 사용해 코끼리의 위에 올랐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코끼리의 내부에서 바바로약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직후, 코끼리의 뼈가 변형을 일으킨다. 날카로운 가시가 치솟아 나를 노렸다. 나는 가시를 피해 코끼리의 몸 위를 내달렸다. 가시 일부가 내 몸에 닿았다. 다행히도 갑옷을 단번에 뚫을 정도로 위력적이진 않았다.

나는 마냥 도망치지 않았다. 가시를 피해 돌아다니며 대검으로 코끼리의 몸체를 내려쳤다. 코끼리가 시커먼 땅을 뛰어다니며 몸부림쳤지만, 균형을 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까앙! 깡! 깡!

내려치고, 또 내려친다.

어느 순간부터 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더욱 날카로워진 가시가 내 몸을 조여온다. 뼈로 된 팔이 위로 솟구쳐 나를 후려치려고도 한다.

“젠장! 좀 죽으십시오! 대체 왜 저주가 안 통하는 겁니까?!"

“저주? 내게 저주를 걸었나?"

"예, 예. 미치는 저주! 환각을 보는 저주! 두통을 부르는 저주! 온몸이 썩는 저주! 제가 할 수 있는 저주란 저주는 모두 당신에게 사용했지요! 저주가 왜 안 통합니까?! 좀 가르쳐 주시지요!”

"가르쳐 줄 것 같나?"

내가 가진 스킬 중에서 저주를 저항도 하지 않고 아예 무시하는 스킬은 없었다.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신성한 정신.

'그게 내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저주를 완전히 무시하는 효과도 있었나?'

뭐가 됐든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깡깡깡!

나는 망치 휘두르듯 대검을 계속해서 내려쳤다.

노력의 결실이 나왔다.

금이 간 뼈가 부서졌다.

코끼리의 내부는 단단한 외형과 달리 비어 있었다. 대신, 그 중심에 바바로약스가 위치해 있었다.

바바로약스는 나를 보고 경탄했다.

"대단하군요. 설마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끝까지 여유로운 척하는군."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이단 점프를 하면 닿는다. 찰나를 이용해 단숨에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실행하지 않은 것은 시간을 끌기 위해서다.

'대악마의 부활 의식이 성공해야 한다.'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군요. 수톤 님을 굳이 시간을 앞당겨 부활시키려는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대답해줄 의향은 있고?"

내가 말을 받자 바바로약스가 웃는다. 시간을 끈다는 목적을 가진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수톤 님은 지루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으려고 합니다."

“교단을 공격하겠다는 건가? 아무리 대악마라도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교단은 이미 이 세상에서 없어졌겠지.”

"혼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구역을 지키던 대악마들이 일시에 교단을 공격한다면?"

"……헛소리. 악마들의 성향을 내가 모를 줄 아나?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라면 같은 동족도 서슴지 않고 죽여버리는 것들

이지."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럼에도 인간은 뭉칠 때는 뭉치지요. 악마라고 해서 뭉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교단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

거짓이다.

계획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계획은 대악마 수톤이 부활한 뒤에 시작할 테니까. 그리고 계획이 실행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수톤은 내 손에 죽을 테니까.

“그 계획. 자세히 말해봐라."

“하하하하! 역시 궁금하신가 보죠? 하지만 이거 어쩌죠? 방금 막 부활의 의식이 끝났습니다! 너랑 놀아줄 필요가 없어졌다고!"

바바로약스가 소리친다. 뼈코끼리가 무너진다. 무너진 뼈들은 칼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래. 네 역겨운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는 거군."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나는 찰나를 사용해 도약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이어서 질주를 사용한다. 이단 도약이 형성되었고, 나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대검은 정확히 바바로약스의 가슴을 꿰뚫는다.

“어떻게 이런 속도를…!"

“네가 너무 느린 거겠지."

검을 위로 올렸다. 놈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놈과 내 몸이 동시에 지상으로 추락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쿵.

등에서 약간의 충격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킨다. 그곳은 그래드홀의 내부였다. 내 앞에는 바바로약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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