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2화 > 1482. 팔라딘: 악멸의 여정
"무기를 버렸구나, 팔라딘!!"
허공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날던 거대한 까마귀, 파라손이 기회를 포착하자마자 팔라딘에게 하강했다. 강철도 씹는 날카로운 부리가 팔라딘의 뒷목을 노린다.
팔라딘이 몸을 획 돌렸다. 왼손으로 파라손의 모가지를 쥐고, 오른손으로 날개를 잡는다.
"검이 없어도 너 따위는 죽일 수 있다."
팔라딘이 손에 힘을 준다.
"까아아아아악!"
파라손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날개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팔라딘은 온몸에 피칠갑을 하며 계속해서 힘을 주었다. 마침내 파라손의 날개가 완전히 찢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팔라딘은 반대쪽 날개를 잡고 방금과 같이 날개를 찢었다.
날개가 모두 찢긴 파라손은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가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팔라딘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파라손의 목과 다리를 잡아당겨 찢어 죽였다.
헤일가이드 남작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팔라딘을 바라봤다.
악마를 산채로 찢는 무식한 힘과 자신의 마법을 증발시킬 정도의 신성력.
예상 밖이었다.
발렌티어의 팔라딘은 이미 완숙의 경지에 올랐다.
식은땀이 흐른다.
'저놈이 계씨를 받은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강해졌다고? 말도 안 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작이 있을 것이다.
'수작이 있다고 해도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위험하다.
눈앞에 있는 팔라딘은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팔라딘보다 위험하다. 이 팔라딘은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고, 대악마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대악마는 악마의 심장이자 미래였다. 반드시 오늘 눈앞의 팔라딘을 죽여야 한다.
“알고 있느냐? 악마의 피에는 마력이 담겨 있지. 따라서 그 어떤 피보다 각별하지."
"네놈의 피도 뿌려질 것이다."
팔라딘이 접근한다. 남작은 여유를 가장하면서 필사적으로 마력을 움직여 마법을 사용했다. 사방에 흩뿌려진 피들이 모여들었다. 동시에 피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팔라딘은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박힌 대검을 다시 쥐고 뜨거운 피를 밟으며 헤일가이드 남작을 향해 접근한다.
남작이 웃었다. 진심에서 우려 나오는 웃음이었다.
“사지로 들어왔구나. 너의 무지와 오만을 탓하거라."
주위에 부글대던 피들이 솟구치며 팔라딘에게 날아들었다. 피는 커다란 구체 모양으로 팔라딘을 감싼다.
남작은 승리를 확신했다.
지금껏 이 마법에 당하고 살아남은 인간이나 악마는 한 명도 없었다. 특히 이번에는 악마의 피로 시전된 마법이다. 팔라딘은 피에 압축 당해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팔라딘은 그의 예측을 벗어났다.
압축하는 피의 구체에서 검신이 툭 튀어나왔다. 검신을 타고 황금빛 기운이 흐른다. 남작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쥐어 짜냈다.
소용없었다.
팔라딘이 검을 휘두르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피의 구체가 갈라졌다. 피의 구체가 함힘을 잃고 바닥에 쏟아진다. 팔라딘은 악마의 피로 샤워하며 남작의 앞에 도달했다.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건 네놈들이다. 너희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다."
팔라딘이 대검을 치켜들었다. 남작이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길쭉한 손톱을 팔라딘에게 휘두르는 것이다. 허나 손톱이 팔라딘의 갑옷에 닿기도 전에, 남작의 하반신은 이미 잘린 상태였다. 피와 내장이 바닥에 쏟아진다.
팔라딘은 쓰러지는 남작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눈높이가 맞춰졌다. 허나 남작은 팔라딘의 눈을 볼 수 없었다. 단단한 투구는 팔라딘의 눈을 완벽하게 감추었기 때문이다. 남작은 끝까지 당당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두려움이 남작의 얼굴을 잠식했다.
"너는 네가 마신 피만큼 빼앗길 것이다."
"뭐…?"
팔라딘이 검을 움직였다. 작업을 하듯 헤일가이드 남작의 양팔을 자른다.
직후, 팔라딘의 앞에 십자가가 나타났다. 성스러운 기운을 흘리는 십자가에 남작을 놓고, 가슴에 말뚝을 댔다. 팔라딘을 망치 대신 주먹으로 말뚝을 박았다.
“아아아아아악! 네, 네놈! 차라리 날 죽여라!"
이 시점에서 남작은 팔라딘이 무슨 짓을 벌일지 예측했다.
흡혈귀의 피는 제대로 정화만 할 수 있다면 좋은 약의 재료가 된다. 이 눈앞의 끔찍한 팔라딘은 자신을 십자가에 봉하고 끊임없이 피를 뽑아낼 생각인 것이다! 자신을 젖을 짜는 젖소처럼 가축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두려움과 굴욕감을 느낀 헤일가이드 남작이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팔라딘에게 외쳤다.
"죽여라! 날 죽여라! 으아아아아아악! 나는 네놈의 적이다! 네 적을 살려둘 것이냐! 어서 빨리 날 죽여라!"
“시끄럽다."
팔라딘의 우악스러운 손이 남작의 턱을 잡아 뜯었다. 남작은 그제야 조용했다. 남작은 태어나 처음으로 우월한 악마의 신체를 원망했다. 조금만 덜 우월했어도 이러한 수모를 겪기 전에 죽었을 테니.
팔라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밖으로 나갔다. 성기사와 이단심문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부복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당연한 일이다.”
"…목적도 달성하셨군요. 썩 내키지는 않습니다만,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이니 뜻에 따르겠습니다.”
성기사가 말했다. 성기사들은 헤일가이드 남작을 죽이지 않는 것에 찝찝함과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반면 이단심문관들은 달랐다. 그들은 새로운 팔라딘에게 감탄하며 무한한 경외심을 보였다.
"대단하십니다, 팔라딘이시여! 흡혈귀의 관리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놈이 모든 정보를 뱉게 만들겠습니다!"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악마의 시체를 챙기고 주변을 정리해라. 성당으로 돌아간다."
성당에 돌아온 나는 헤일가이드 남작을 이담심문관들에게 맡기고 성소로 향했다. 바로 성스러운 연못에 들어가 성녀로부터 정화 의식을 받는다.
본래라면 빠르게 끝날 정화 의식이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내게 달라붙은 악마의 영혼이 셋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상대해온 악마들보다 격이 더 높았다. 앞으로 더 강한
악마를 상대하게 되면 정화 의식도 그만큼 더 길어질 것이다.
정화 의식이 끝난 뒤에는 축복의 기운을 사용해 새로운 스킬을 익혔다.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62
힘: 42 민첩: 20 체력: 20 신성력: 25
보유 스킬: 성안(Lv. Master), 홀리 오라(Lv.7), 신성검(Lv.7), 질주(Lv.3), 홀리 라이트(Lv.3) 신성 강화(Lv. Master)]
이번에 새로 익힌 스킬인 신성 강화는 패시브 스킬이다. 신성력과 다른 스킬의 효과를 강화해준다.
나는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성스러운 연못에서 몸을 일으켰다. 준비되어 있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는다. 이후에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쉬었다.
'역시 다른 곳과 달리 성소에서 쉬는 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훨씬 좋군.'
성소에는 성스러운 기운이 다른 곳보다 흘러넘친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되는 느낌이다.
"팔라딘이시여."
성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처음과 만났을 때와 달리 날 꽤 편하게 대한다. 성녀는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건?”
"프르브의 와인입니다."
"…교황청에서 제조하는 와인이군.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교황청에 직접 부탁했습니다."
성녀의 지위가 생각보다 낮다고 해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다. 교황청에서는 성녀가 갑자기 술을 요구했으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내게 주는 건가?”
"네. 드셔주십시오. 그동안 팔라딘께 받은 음식과 물건들이 많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와인을 보니 엘레나가 떠올랐다.
다른 세계의 최고급 와인. 분명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겠지.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와인은 쟁길 생각이 없었다.
"술을 마셔본 적 있나?"
"없습니다. 남성분들이 술을 좋아한다고 들어 준비했습니다."
“그래?"
나는 인벤토리에서 와인잔을 꺼냈다. 이젠 대놓고 인벤토리를 사용했다. 무슨 힘이냐고 물으면 대충 둘러댔다. 내게 깊이따지는 놈은 없었다. 나는 여신에게 선택받은 팔라딘이니까.
와인잔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린다. 하나는 내 앞에, 하나는 그녀의 앞에.
"깨끗한 유리잔이군요. 예쁩니다."
“와인잔이다. 와인을 먹기에 적합하지.”
“…제게 와인을 대접해주시는 겁니까? 저는 술을 먹을 수 없습니다."
"수녀일 때는 그렇지. 너는 수녀가 아니라, 성녀다. 금주의 제약을 없을 텐데?"
“그렇긴 합니다만…."
“술을 먹는다고 타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술은 혼자 먹는 게 아니라고 하지."
"……."
와인 마개를 열고 잔에 술을 따랐다. 후각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기가 성소에 퍼진다. 아멜리아는 고민하다가 와인잔에 손에 쥐었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베일을 벗었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와 만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베일을 벗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나를 가깝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예쁘군.'
푸른 눈동자와 밝은 금발. 분홍색의 탱탱한 입술. 조각상처럼 완벽한 얼굴이었다.
나는 와인잔을 들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잔을 들었다.
짠!
잔이 부딪쳤다. 나는 향을 즐긴 뒤에 약간의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가 삼켰다. 향도 맛도 모두 뛰어났다. 뒷맛도 깔끔하다.
이 세계 최고의 와인다웠다.
아멜리아는 나를 따라 하며 와인을 마셨다. 곧 그녀의 눈동자가 커진다.
"…맛있네요. 이런 맛이었군요. 그런데 뭔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알코올이 몸에 도는 걸 테지. 나쁜 건 아니다."
이후에 우리는 조용히 와인을 마셨다. 아멜리아는 의외로 와인을 잘 마셨다. 와인에 맛을 들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팔라딘이시여. 샐로트 성에서 사악한 의식이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샐로트 성.
그 이름을 듣자마자 조용히 숨을 삼켰다.
올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사악한 의식? 무슨 의식인지 알고 있나?"
“의식을 진행하는 건 바바로약스라는 악마입니다. 대악마 수톤의 수하입니다. 그는 본래 인간이었으나, 수톤과 계약하여 네크로맨서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톤의 부활을 위한 의식을 진행 중입니다."
"수톤… 팔라딘들이 모여 죽였다는 대악마군.”
"네. 전대 발렌티어의 팔라딘이 그 성전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본래 대악마의 부활은 몇십 년은 걸리는데… 바바로약스는 의식을 통해 그 기간을 줄이고 있습니다. 의식을 막아야 합니다. 수톤이 부활하면 팔라딘을 노릴 것입니다. 팔라딘께서는 아직 성장하실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알겠다. 샐로트 성에는 나 혼자 잠입하겠다."
“…네?”
“다른 병력들은 모두 근처에서 대기하라. 바바로약스는 간악한 놈이다. 분명 함정을 준비해뒀을 거다. 무작정 성을 두들겨봤자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내가 먼저 성에 잠입하여 함정을 없애고 문을 열겠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은지요."
"위험하지. 하지만 위험한 만큼 보상도 확실하다."
나는 샐로트 성의 공략법을 안다. 대량의 경험치를 챙길 수 있고,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성녀는 내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알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팔라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