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1화 > 1481. 팔라딘: 악멸의 여정
발렌티어 지역의 어느 폐교회 내부.
그곳에 네 명의 악마가 모여 회동을 가졌다.
본래 악마가 모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악마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제멋대로다. 뭉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악마들이 뭉치는 일이 있다면 그건 둘 중에 하나다. 강력한 힘을 가진 악마에게 굴복했거나, 혼자서 상대하기 힘든 적이 나타났거나.
이번 회동은 명백한 후자 쪽이었다.
교회에 모인 네 명의 악마는 각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치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부서진 십자가 위에 앉은 까마귀 악마였다. 녹색 눈을 번뜩이는 까마귀, 그는 인간의 시체를 전시하기 좋아하는 파라손이었다.
“이번에 여신이 선정한 발렌티어의 팔라딘은 보통이 아니다. 다른 지역의 팔라딘과 비교해도 비이상적으로 빠르게 우리를 죽여대고 있다. 마치 포식자가 피식자를 사냥하듯이 말이다."
파라손의 말을 받은 것은 온몸에 털이 가득한 악마인 고트였다. 고트는 인간의 눈알과 혀, 내장으로 몸을 치장했다. 인간의 시체는 부패하고 있었으며 파리가 들끓었다.
"인간 주제에 너무 짜증 나. 일주일 전에 내 친구가 그 팔라딘에게 죽었어. 우리가 가서 놈을 죽여버리자."
파라손은 까마귀 대가리를 내저었다.
"겨우 우리만으로 발렌티어의 성당에 쳐들어간다고? 그건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다. 성당에는 여신의 힘이 강하고, 여신의 종들이 바글거린다. 우리의 힘만으로 발렌티어의 성당을 함락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발렌티어의 팔라딘을 하루라도 빨리 죽여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팔라딘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발렌티어의 팔라딘은 역대급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성장 속도가 빠르다. 거기다 악마에 무슨 한이라도 맺힌 듯 하루도 빠짐없이 악마를 토벌한다. 이러다가 발란테이어의 팔라딘이 역대 최악의 팔라딘이 될지도 몰랐다.
"동의한다. 팔라딘은 죽여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단단한 체격과 3개의 돼지머리를 가진 악마, 보네드가 말했다. 하나로 합쳐진 3개의 목소리는 짐승이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고트는 이 자리에 있는 네 번째 악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작.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이곳에 나왔다는 건 너도 그 팔라딘을 빨리 죽여야 한다는 뜻에 동의한다는 거겠지?"
낡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는 다른 악마들과 달리 인간과 매우 흡사한 외형을 가졌다. 다만 인간에 비해 피부가 시체처럼 창백했다. 헤일가이드 남작. 인간의 귀족으로서 작은 영지를 다스리며, 인간을 잡아먹는 흡혈귀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진조라고 불렀다.
헤일가이드 남작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 팔라딘은 미친놈일세."
허나 목소리는 느긋하지 않았다. 느긋할 수 없었다.
“어제 내 영지의 마을 중 하나가 놈에게 몰살당했네."
“…그게 지금 중요해? 그 팔라딘은 우리를 구분할 수 있어. 몰살당했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아."
고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을이라 하면 타락자들을 가리키는 것일 거라고 짐작한 것이다.
악마들에게 있어 타락자는 쓰기 좋은 노예였다. 대부분의 타락자는 악마들보다 턱없이 약했기 때문이다. 가끔 악마보다 강한 타락자가 나타나긴 하지만, 정말 가끔이었다.
“그 마을은 타락자의 마을이 아니었네.”
"……평범한 인간의 마을을 몰살했다고? 팔라딘이?"
보네드가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팔라딘의 성안은 만능이 아니네. 악마와 타락자를 구분할 수 있지만. 우리의 협력자들은 구분하지 못하지."
협력자.
인간은 웃긴 생물이었다. 타락하지 않더라도 자기에게 이득만 되면 서슴치 않고 악마와 손을 잡는다. 물론 그럴 경우 대부분이 10년 내로 타락하게 되지만, 악마들이 그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편리하게 이용할 뿐.
다른 지역에서 대규모로 인간 협력자를 만드는 대악마가 있었다. 헤일가이드 남작은 그 방법이 흥미로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 마을에 내 협력자 인간이 행상인으로서 살고 있었지."
보네드는 무슨 일인지 짐작한 듯 입을 열었다.
"협력자가 있는 마을이라 단체로 처형당했군.”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협력자가 숨어 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네. 팔라딘은 협력자의 정보를 자세히 몰랐네. 증거도 없었지. 그저 지레짐작으로. 의심 하나만으로 마을 하나를 몰살한 거네.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사제와 성기사들의 반발을 찍어 누르고, 선동을 시작했지. 그 선동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고를 들었던 나는 감탄했을 정도네."
"…그 팔라딘이 자비 없는 놈이란 건 알겠다. 그래서 남작, 넌 뭘 말하고 싶나?"
"팔라딘의 성정과 행보는 우리와 가깝네. 어쩌면 팔라딘을 타락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네. 팔라딘의 욕망을 부추기는 거지. 악마를 죽인다는 욕망을 비틀어서 힘을 갈구하도록 유혹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네."
“안 돼. 팔라딘은 죽여야 해."
“고트의 말에 동의한다."
"남작. 네 계획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팔라딘이 더 강해지기 전에 죽여야 한다."
다른 악마들이 모두 반발했다. 헤일가이드 남작은 그럼에도 느긋함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계획은 내가 직접 주도하겠네. 팔라딘이 타락하는 걸세. 역사를 뒤져도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 그렇기에 더욱 재밌는 거고. 자네들도 타락한 팔라딘을 보고 싶지 않나?"
"……."
모두가 침묵했다. 그 의미는 당연했다.
기본적으로 악마는 욕망에 충실한 존재들이었다. 정해진 수명이 없는 그들은 죽기 전까지 수백 년이고, 수천 년까지 살 수 있다. 그들은 항상 짜릿한 자극을 원한다.
"남작이 직접 나서서 지휘하겠다면… 당분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오래 기다리지는 못해.”
"타락한 팔라딘은 무슨 맛일지 궁금하군."
"정해졌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악마들을 부르지. 계획이 실패했다는 판단이 든다면 바로 팔라딘을 죽일 수 있도록."
그때였다.
폐교회 정문 입구가 쾅 열리며 무언가가 날아와 악마들 사이에 떨어졌다.
그건 상반신만 남아 있는 인간. 아니, 악마였다. 헤일가이드 남작은 그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내 자식이군."
15년 전에 제 어미의 배를 가르며 태어난 자식이 잔혹하게 죽어 있었다.
쿵쿵쿵!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악마들은 발소리의 주인을 쳐다보며 경악했다. 움켜쥔 대검, 육중한 전신 갑옷, 전신에서 뿜어대는 기분 나쁜 기운. 그가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팔라딘…!"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알고 온 거냐!"
"흐흐, 죽으러 왔구나."
"내 자식을 통해 이곳을 알아냈나…."
철컥철컥.
팔라딘이 걸었다.
악마들이 긴장했다. 직접 마주한 팔라딘은 악마들의 예상보다 더 강렬했다.
"역겨운 악마 놈들. 여기에 모여 서로 자위라도 하고 있었나?"
"흐, 흐흐, 멍청하긴! 넌 죽으러 온 거야!"
전신이 털로 가득한 악마인 고트가 웃으며 팔라딘을 향해 도약했다. 허공으로 떠오르는데, 그의 털이 강철처럼 빳빳해졌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와 같은 모습이었다.
"멍청한 건 네놈이다."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던 교회 창문들이 깨진다. 교단에서 특수 처리된 석궁 화살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석궁 화살은 악마뿐만이 아니라 팔라딘에게도 떨어졌다. 허나 석궁 화살은 팔라딘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카아아아아악!"
전신에 화살이 박힌 고트가 땅에 떨어져 몸부림친다. 화살촉에 발라져 있던 성스러운 독이 그의 몸을 갉아 먹는다. 화살 하나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그의 몸에는 족히 30개가 넘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팔라딘은 양손으로 검을 역수로 쥐고 고트를 향해 내려찍었다.
쾅!
고트의 목이 잘랐다.
"악마 넷을 한 번에 죽일 기회다. 혼자 왔을 리 없지 않나. 이 교회 주위에는 성기사와 이단심문관들이 포위했다. 너희들이 도망갈 기회는 없다."
"팔라디이인…!!"
목만 남은 고트가 증오를 담아 팔라딘을 불렀다. 직후, 그의 털들이 베죽 솟더니 팔라딘의 머리를 노렸다.
팔라딘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며 최후의 공격을 피했다. 고트의 머리와 몸을 베어 가르며 확인사살을 끝낸 팔라딘은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팔라딘의 전신은 홀리 오라로 빛나고, 팔라딘의 검은 신성을 휘감았다.
"파라손, 보네드. 괜찮나?"
"몸에 화살이 몇 개 박히긴 했지만… 기분이 나쁜 걸 제외하면 괜찮다."
“……크르르. 교회 밖에 있는 인간놈들의 수가 적지 않다."
"저 팔라딘은 오만한 선택을 했네. 감히 혼자서 우리를 상대하려고 하는 거지. 교회 밖에 있는 놈들은 일단 무시하고, 눈앞의 팔라딘부터 죽이도록 하지. 보네드, 정면에서 팔라딘을 상대해주게. 파라손, 팔라딘의 뒤를 노리게. 나는 마법으로 엄호하겠네.”
보네드는 양손을 쫙 펼쳤다. 손바닥 중심이 꿈틀거리더니 날카로운 뼈가 튀어나왔다. 벼를 검처럼 쥔 그가 팔라딘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파라손은 날개를 펼치며 허공을 돌아 팔라딘의 뒤를 노렸다.
헤일가이드 남작은 마법을 사용했다. 그의 손짓에 따라 피가 출렁 나타났다. 피는 바닥에서 흐르며 팔라딘에게 접근했다.
팔라딘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악마의 시선으로도 제대로 쫓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보네드의 품에 접근해 가슴팍에 검을 찔러 넣는다. 보네드는 세 개의 돼지머리로 강력한 콧김을 내뿜으며 쌍검을 휘둘렀다.
까앙! 깡! 깡!
보네드의 뼈검은 팔라딘의 단단한 갑옷을 전부 베지 못했다. 갑옷 일부만을 때리는 게 전부였다.
"이런 갑옷을 구해오다니! 이 비겁한 놈! 파라손! 남작! 뭐하나! 빨리 놈을 죽여라."
파라손이 뒤에서 쇄도하고, 남작의 마법이 휘감긴다.
"지랄을 하는군."
파지지지지직!
팔라딘의 전신에서 황금빛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파라손이 화들짝 놀라 물러서고, 남작의 마법은 증발했다. 황금 번개의 대부분은 보네드의 몸으로 흘려들어 갔다. 감전당한 보네드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팔라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며 보네드의 몸을 토막 낸다. 보네드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꿈틀.
보네드의 토막 난 시체 속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4번째 머리가 튀어 나갔다. 머리에 달린 쥐새끼 같은 다리를 움직이며 도망친다. 팔라딘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대검을 던졌다.
대검이 도망치는 악마의 뒤통수를 정확히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