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9화 > 1479. 팔라딘: 악멸의 여정
완전 회복을 쓴 나는 미간을 좁히며 악마의 시체를 노려봤다.
완전 회복은 최대한 쓰지 않으려고 했었다. 완전 회복을 쓰면 몸에 스며든 타락의 기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실제로 타락의 기운 일부는 사라졌다.
'완전 회복을 쓰자마자 타락의 기운이 내게 달라붙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타락의 기운은 저주처럼 보이지만, 그 실체는 악마와 타락자의 영혼이다. 완전 회복은 내 몸을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스킬이다. 내게 달라붙은 악마와 타락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효과 따윈 없었다.
'이대로 성소로 돌아가서 정화 의식으로 타락의 기운을 정화해 축복의 기운을 쌓는다. 더 강해질 수 있다.'
나는 악마의 시체를 바라봤다.
'이것도 가져가야겠지.'
머리와 팔만 남은 악마의 시체다. 부담되는 크기는 아니었다. 나는 악마의 시체를 들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도중에 성기사들과 마주쳤다.
"팔라딘이시여! 쥐의 움직임이 갑자기 느려져 상대하기 편해졌습니다! 악마를 처단하셨군요!"
"들고 계신 그건· 악마의 사체로군요. 끔찍한 외형입니다."
"먼저 돌아가십시오. 저희는 지하 수로를 정리한 뒤에 귀환하겠습니다."
성기사들은 열성적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수고해라. 악마의 권속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이는 족족 태워버리도록."
이후, 성소로 돌아왔다.
성녀는 언제나처럼 여신의 조각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오자 몸을 일으켰다.
"항상 성소에 있군. 잠도 성소에서 자나?"
"성소 뒤편에 방이 있습니다. 잠과 식사를 해결합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기도하고?”
"성소를 관리합니다. 성소에는 최소한의 인원만 들어올 수 있기에… 자잘한 일은 모두 제가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촛대를 교환하거나, 성수의 수질을 관리합니다. 성소의 청소도 제가 도맡고 있지요."
성녀.
그 지위에 비해 교단에서 받는 대우는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다. 성녀의 임무는 팔라딘을 보좌하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그녀는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바깥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군.'
현대의 편리한 삶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의 절제된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함부로 동정할 수도 없다.
"그런가. 정화 의식을 부탁하지."
"네. 팔라딘이시여.”
옷을 벗고 성스러운 연못으로 들어가 몸을 눕힌다. 정화 의식으로 타락의 기운을 모조리 씻겨냈다. 개운해졌다. 나는 한동안 성스러운 연못에 앉아 있었다.
"아멜리아."
"네. 말씀하십시오."
"다음 악마에 관한 정보는 없나?"
“…있습니다. 발렌티어의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악마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가봐야겠군."
"지금 바로 말입니까? 조금 더 휴식을 취하시지요."
"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악마들이 날뛴다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치솟는다. 쉴 시간은 없다."
“그러십니까…."
성녀를 보니 원작 게임 내용이 떠오른다.
원작 게임 개발자들이 가장 공들인 NPC는 성녀였다. 성녀의 모델링은 두말할 것도 없고 상호작용이 다른 NPC보다 몇배는 많았다. 특히 호감도 시스템까지 존재했다.
물론 플레이어는 성녀의 호감도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성녀에게 말을 자주 걸고 선물도 몇 가지 해주면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태도가 친근해진 걸 알 수 있다. 때로는 플레이어에게 선물을 주기도 한다.
메인 퀘스트에는 영향을 끼치진 않기에 그녀의 호감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반대로 성녀와 날 선 관계를 유지할 필요도 없다.'
성소 밖으로 나가려던 나는 인벤토리에서 작은 사탕 여러 개가 담긴 상자를 꺼네 그녀에게 건넸다.
"팔라딘이시여. 이건 무엇입니까?"
“사탕이다."
"사탕이요…?"
"먹는 거다."
“처음 보는 음식입니다. 지금 하나 먹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씹지 말고 혀로 굴리며 음미해서 먹도록."
그녀는 사탕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당황했다.
“보석처럼 생겼군요. 이게 정말 음식입니까?"
"내가 거짓말을 한 것 같나?"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탕 하나를 조심히 집어 베일 안으로 넣었다. 사탕이 그녀의 입안에 들어갔다. 아멜리아의 몸이 멈춘다. 베일을 쓰고 있기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몸을 보니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엄청… 달콤하군요. 이렇게 단 음식은 처음입니다."
이 세계의 의식주 문화를 떠올린다. 악마와 타락자들 때문에 문명은 발전하지 않고 있다. 중세 시대 보다 못한 수준이다.
"보통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이걸 받아도 될까요?"
"네게만 주는 음식이다. 교단에는 보고하지 말고 혼자 먹도록. 교단이 알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지겠지."
"알겠습니다. 이런 음식을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팔라딘이시여."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악마를 죽이러 떠났다.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44
힘: 25 민첩: 15 체력: 15 신성력: 17
보유 스킬: 성안(Lv. Master), 홀리 오라(Lv.3), 신성검(Lv.5), 질주(Lv.1), 홀리 라이트(Lv.1)]
2주 동안 발렌티어 도시 근처를 돌아다니며 악마와 타락자들을 처단한 결과였다.
'이 정도면 발렌티어에 있는 대악마를 제외하고 악마와 타락자들을 상대로 쉽게 죽을 일은 없겠군.'
본격적으로 강해질 계획을 짜기로 시작했다. 이 빨렌티어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찾아내 얻을 생각이었다.
'우선 영약. 영약은 내가 마시고 필요 없는 고대 유물이나, 성물은 교단에 넘긴다. 교단에 많은 영향력을 끼칠수록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
광명승천도로 영약이나 무기를 강화할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영약을 강화하는데 최소 수십 일은 걸릴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일이 아니라 년 단위가 될 수도 있다.
내겐 허송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악마를 죽이며 강해지듯, 대악마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활동한다.
지금은 놈들이 원작대로 활동하고 있지만, 언제 원작 내용이 틀어져 놈들이 예상 밖의 활동을 할지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는 놈들이 숨어드는 것이다. 그때는 퀘스트를 실패할지도 모른다.
“팔라딘이시여. 발렌티어 외곽에 있는 귀령의 숲에 마녀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을 확인해주십시오. 만약, 소문대로 마녀가 있다면…."
"처단하겠다. 마녀는 악마와 다를 바 없다."
마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악마의 힘 일부를 받아, 마법을 사용하는 여자.
"마녀는 사악한 마법으로 사람의 영혼을 농락한다고 합니다. 조심하소서."
"헤리안느 여신께서 나를 가호하시니, 내 영혼이 마녀 따위에게 농락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교단이 지원해준 말을 탔다. 백마였다. 다른 일반 말보다 덩치가 컸다. 힘과 체력도 월등히 뛰어났다. 품종부터가 특별했으며, 교황청에서 축복을 받으며 육성된 말이었다. 악마와 타락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맹수와 싸워도 이길 정도의 전투력도 보유했다.
말의 이름은 카빌레이나이며 암말이었다. 나는 수말을 타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교황청에 암말을 요구했다.
“가자. 카빌레이나."
"히히히히힝!”
귀령의 숲에 도착했다. 나는 숲 근처에 있는 마을 교회에 카빌레이나를 맡겼다. 귀령의 숲으로 함께 들어가기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갑옷을 입은 채 숲의 정면으로 홀로 당당히 걸어갈 때였다.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남자를 겨누었다.
용병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내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진정하십시오! 저는 팔라딘님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키이이이잉.
성안을 사용한다. 남자는 악마와 타락자가 아니었다. 나는 대검을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남자는 내 앞에 털썩 무릎 끓었다.
“저는 한스입니다! 용병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팔라딘께서 마녀를 토벌하기 위해 찾아오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거두어주십시오! 제게 그 증오스러운 마녀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나는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게임에서 이런 서브 퀘스트는 없었다. 이건 일종의 변수였다.
"복수?"
“제 아내는 마녀의 마법에 의해 몸이 썩어 문드러져 죽었습니다. 제 어린 아들과 딸은 마녀에게 납치되었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부디 복수의 기회를 주십시오!"
“자식이 구하기를 원하지 않나?"
용병은 내 질문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입술에서 피가 뚝뚝 흐른다.
"…자식들은 일주일 전에 납치되었습니다. 저는 어제 일을 끝내고 돌아와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이면 너무 오래됐군.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겠군. 혼자 쳐들어가지 않은 건… 날 기다리고 있었나?"
"네. 팔라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서 기다렸습니다."
나는 엎드린 용병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내가 거부해도 몰래 따라올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복수뿐이니까.
"좋다. 따라와라. 복수의 기회를 주겠다. 단, 나를 방해하지 마라. 내 발목을 잡는 순간 너를 버리고 가겠다. 내게 중요한 건 마녀를 처단하는 것이다."
"절대로 팔라딘님의 발목을 잡지 않겠습니다. 제게 복수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용병에게 은색 단검을 던졌다.
"축복의 독이 담긴 단검이다. 축복의 독은 인간에겐 아무런 해가 없지만, 사악한 존재들에겐 끔찍한 고통을 준다. 네게 빌려주지."
"…감사합니다! 팔라딘이시여!”
앞으로 걸어갔다. 한스는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스으으으으으으으으.
스산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바람 소리와는 다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바람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직후, 나무에서 반투명한 유령이 튀어나왔다. 끔찍한 괴물의 형상을 한 유령이 소리 지르며 내게 날아온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유령의 몸에 검을 찔러 넣었다. 육체가 없는 유령이 검에 꿰뚫린다. 유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검을 바라봤다.
"네놈들에 대한 대비는 이미 되어 있다."
홀리 오라의 축복을 받은 검이다. 육체가 없는 유령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다.
"신성검."
검신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유령의 비명이 달라졌다. 아까는 공포와 정신을 공격하는 비명이었다면, 지금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이었다. 나는 검을 내리그었다. 유령이 촛불처럼 흔들리다가 사라졌다. 유령의 영혼은 여지없이 내 몸에 달라붙었다.
"귀령의 비명은 인간에게 공포와 고통을 주입한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질 정도로 정신이 나약하지 않습니다."
“그래. 전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