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8화 > 1478. 팔라딘: 악멸의 여정
내 눈앞에서 피투성이의 젊은 사내가 벌벌 떨었다. 나는 그를 유심히 지켜봤다.
"타락자가 아니다. 인간이다."
“그렇습니까."
이단심문관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남자의 심장을 찔러 죽였다.
나는 담담한 어조로 이단심문관에게 물었다.
"왜 죽였지?"
"그는 불경스러운 자였습니다. 헤리안느 여신님의 존재를 의심하였고, 교단을 모욕하여 이곳에 끌려왔습니다. 그는 타락자는 아니었으나, 이단이었습니다. 교단의 존립을 위해 이단은 처단하여야 합니다."
“그렇군."
“…그게 전부이옵니까?"
“내게 뭘 바라는 거지?"
"…전대 팔라딘께서는 저희를 질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저희를 꾸짖었을 겁니다."
“나는 전대 팔라딘과 다르다. 너희의 죄는 너희가 감당해라."
“아무렴. 저희는 모든 각오를 끝마쳤습니다. 헤리안느 여신께서 내리는 심판이라면, 그 어떠한 심판이라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모든 것은 여신님과 교단을 위해."
이단심문관은 계속해서 이단들을 데려왔다. 총 23명이었다. 2명을 제외하고 모두 타락자였다. 나는 타락자들을 모두 죽였다. 인단심문관들은 존경심 어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앞장서서 타락자들을 처단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당신께선 우리 모두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나는 피 묻은 검을 헝겊으로 닦았다.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내가 직접 타락자들을 죽인 건 모두 경험치를 위해서다. 그 외의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구태여 그 사실을 이단심문관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도시에 숨어 있는 버러지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저희와 함께 도시를 거닐며 이단을 구분하여 저희에게 알려주십시오. 저희가 이단을 납치하여 이곳으로 끌고 오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놈들을 보자마자 죽여도 상관없다. 도시는 성기사를 시켜 봉쇄하면 된다."
"이곳에는 성스러운 결계가 있어 타락자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그들을 심문하여 타락의 원인을 밝혀내겠습니다."
"…과연. 알겠다. 단,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타락자들의 처형은 내가 맡는다. 놈들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내 신앙의 증명이다."
경험치를 이놈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이단심문과는 눈을 반짝이며 감탄사를 흘렸다.
"과연 팔라딘…. 당신께선 참으로 우리의 귀감이십니다."
나는 이단심문관들과 함께 도시를 돌아다녔다. 여행자의 복장을 했다. 갑옷 대신에 가죽옷을 입고 망토를 머리 깊숙이 눌러써 성안(聖眼)을 가렸다. 내 일은 숨어 있는 타락자를 찾아내 이단심문관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그럼 이단심문관은 타락자를 기록했고, 타락자는 밤에 납치되어 성당 지하로 끌려왔다.
이단심문관들은 그들을 심문했고, 나는 심문이 끝난 놈들을 처형했다.
그렇게 열흘이란 시간이 지났다. 발렌티어 도시가 인구가 제법 되다 보니 타락자들도 많았다.
'자잘한 것들은 이단심문관들이 처리해준 덕분에 손쉽게 경험치를 얻었다.'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30
힘: 20 민첩: 10 체력: 10 신성력: 11
보유 스킬: 성안(Lv. Master), 홀리 오라(Lv.1), 신성검(Lv.3)]
레벨 3개를 올렸다.
고작 3개라 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레벨이 높을수록 요구하는 경험치의 양은 더 많아지니까. 쌓인 축복의 기운은 신성검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나는 성소를 찾아가 성녀를 만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약이 완성되었습니다."
"고맙군."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성녀가 건네는 푸른색 액체가 담긴 병을 받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영약을 마셨다.
[체력이 1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올랐다. 레벨이 1 오른 것과 똑같았다. 나는 만족스럽게 빈 병을 내려놓았다. 영약에는 한계가 없었다. 굳이 꼽자면 수준 이상의 부산물이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팔라딘이시여, 이단심문관들이 타락의 원인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원인이 뭐지?"
사실 나는 원작을 통해 원인을 알고 있었다. 굳이 앞으로 나서지 않고 반쯤 관망한 자세를 취한 것은 경험치를 얻기 위해서였다. 대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선 나는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
"쥐입니다."
“쥐?”
“지하 수로를 통해 악마의 쥐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쥐가 타락의 기운을 흩뿌리며 사람들을 타락의 길로 유혹합니다. 지하 수로에 쥐를 조종하는 악마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팔라딘이시여, 지하 수로의 악마를 찾아 처단하소서."
"알겠다. 악마를 죽이는 것은 나의 의무이자 사명이다."
나는 성기사들을 이끌고 지하 수로로 향했다. 게임과 달리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지하 수로에선 어둡고 악취가 났다. 사람과 동물 시체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악마가 먹고 버린 찌꺼기들이다.
"끔찍하군요."
"도시 아래에 악마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성기사들이 의욕을 불태웠다.
찌찍.
쥐새끼의 소리가 났다. 나와 성기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 수백 개의 붉은 눈이 우리에게 향한다.
우리는 바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쥐새끼들이 일제히 달려온다.
“지하 수로의 중심이 코앞이다. 악마는 그곳에 있을 거다. 물러서지 말고 전진해라."
"네! 팔라딘이시여!"
“여신님을 위하여!"
성기사들이 소리쳤다. 황금빛 홀리 오라를 검에 감싸며 쥐새끼들을 향해 휘둘렀다.
이 쥐들은 평범한 쥐들과 달랐다. 크기는 소형견과 비슷했고, 이빨은 늑대보다 더 날카로웠다. 악마의 힘을 받은 쥐들이다.
찌찌찍!
쥐들은 끊임없이 달려든다. 죽이고 죽여도 끝이 없었다.
"팔라딘이시여!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쥐를 조종하는 악마를 찾아내 처단하소서!"
"믿고 맡기겠다."
나는 질주를 사용해 앞으로 내달렸다. 쥐들이 몸을 뭉쳐 방벽을 만들어낸다. 나는 멈추지 않고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쾅!
숄더 어택으로 주의 벽을 뚫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럼에도 쥐는 끝까지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폭발 성수를 꺼내 집어 던졌다.
콰콰쾅! 콰쾅!
폭발 성수는 깔끔하게 쥐들을 정리해줬지만, 쥐들은 다시 파도처럼 밀려와 그 자리를 메꿨다.
'아직 폭발 성수는 남아 있다!'
이를 악물며 폭발 성수를 던진다. 나는 폭발 성수를 모두 사용한 끝에 악마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낄낄낄. 결국 여기까지 왔나?"
악마는 천장에 붙어 있었다. 그 머리는 쥐의 것이었고, 몸체는 애벌레 고치와 같은 모습이었다. 천장에 달린 고깃덩어리는 구멍을 통해 무언가를 쏟아내고 있었다. 첨벙첨벙. 발목까지 잠기는 수로에 떨어진 그것들을 바라본다. 쥐였다. 쥐들이 꼬물거리며 인간의 시체가 쌓인 곳으로 향한다. 막 태어난 쥐들은 타락자로 하여금 구해온 인간의 시체를 파먹었다.
역겨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역겨운 건 코를 찌르는 악취였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이 악취 때문에 구역질을 치밀어 오른다.
천장에 붙어 있는 악마는 식욕 가득한 눈으로 내 몸을 훑어봤다.
"맛있겠구나. 팔라딘을 먹어본 악마들은 말하지…. 팔라딘 만큼 각별한 맛의 인간은 없다고. 특히 내장은 셋이 먹다 넷이 죽어도 모를 맛이라지?"
“헛소리."
놈을 향해 도약했다. 놈이 몸에서 팔이 툭 튀어나온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은 그 길이가 무려 2m가 넘었다. 나는 질주의 축복을 이용해 공중에서 한 번 더 도약하며 몸을 회전시키며 놈의 공격을 피했다. 나는 천장을 발로 차며 놈을 베고 지상으로 내려섰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놈이 비명을 지른다. 근처에 있던 쥐들이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시선을 내렸다. 발목까지 잠긴 물, 주위에는 아군도 없다.
'뇌전.'
황금빛 전류가 물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달려오던 쥐들이 감전되어 몰살당했다. 여전히 천장에 매달려 있던 악마가 당황했다. 악마가 입을 크게 벌리며 산성액을 내뱉는다.
나는 산성액을 피하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신성검.'
황금빛 신성력이 손에 모이며 검의 형태를 취한다. 양손에 검을 쥔 나는 놈을 향해 도약하며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크에에에엑?!"
천장에 매달려 있던 놈의 몸통이 아래로 떨어진다. 나는 마무리를 위해 검을 치켜들었다.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놈의 고치 같은 몸통이 부풀어 오르더니 터졌다. 대량의 산성 액체가 나를 뒤덮는다. 산성 액체는 스톰브레이커 갑옷을 녹이고 내 피부를 녹이기 시작했다. 연기 속에서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되잡았다.
"켈켈켈…. 정통으로 맞았구나, 멍청한 놈…. 내 새끼들아. 이리 오너라. 어서 빨리 나의 피와 살이 되거라."
쥐의 머리와 나뭇가지 같은 긴 팔만 남은 악마는 끔찍한 몰골로 지하 수로 바닥을 기었다. 그의 곁으로 방금막 태어났던 권속들이 모여든다. 악마는 찍찍거리는 권속들을 잡아먹었다. 악마의 몸은 천천히 재생하기 시작했다.
'부족하구나, 부족해. 더 많이. 더 많이 잡아먹어야 한다….'
악마는 지하 수로를 걸었다. 팔라딘은 다 녹아버렸을 테니 이곳에 찾아온 성기사들을 파먹을 생각이었다.
첨벙.
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악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어딜 가느냐."
두 눈을 크게 뜬 악마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몸의 절반이 녹아내리는 인간이 당당히 서 있었다. 단단한 갑옷과 커다란 대검은 절반 이상 녹아내려 제대로 된 형체를 가누지 못했다. 인간은 더 심했다. 머리의 절반이 녹아내려 뇌가 훤히 보였다. 복부에선 내장이 뒤섞인 액체가 흐른다.
치명상이다.
살아있는 게 이상하다.
악마는 눈앞에 있는 팔라딘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였다.
팔라딘이 반 이상 녹은 대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에 황금빛이 모여들어 부러진 검신을 대신하여 검날이 된다. 악마는 주춤거렸다. 필사적으로 팔을 움직여 최대한 팔라딘에게서 멀어지려
“여기서 멸하라."
“증오스러운 팔라딘!! 꺼져라! 오지 마라! 꺼지란 말이다…!!"
악마의 마지막 발악이 지하 수로에 메아리쳤으나, 팔라딘의 신성한 검은 자비 없이 악마의 머리를 베어 갈랐다.
첨벙!
팔라딘이 쓰러졌다.
그리고.
팔라딘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