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7화 > 1477. 팔라딘: 악멸의 여정
"팔라딘이여, 어서 오세요. 아멜리아입니다. 발렌티어의 성녀로서 여신님을 대리하여 그대를 인도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발렌티어의 성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녀.
그녀들은 팔라딘의 수만큼 존재한다. 그녀들은 여신의 뜻을 받아 팔라딘을 보좌하고 이끈다.
게임에서는 그녀가 가장 중요한 NPC였다. 그녀가 메인 퀘스트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유진이다. 여신님의 계시를 받아 이곳으로 왔다."
"네. 알고 있습니다. 타락의 기운이 그대의 영혼을 잠식하러 드는군요. 정화 의식을 치르겠습니까?"
“…그러지.”
"옷을 벗고 성지(聖地)에 들어가 주십시오.”
그녀가 오른편에 있는 연못을 가리켰다. 성수로 가득 채워진 연못에는 깨끗한 성수가 끊임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옷을 벗어 알몸이 되었다. 성스러운 연못에 성큼성큼 다가가 몸을 눕혔다. 그녀는 내 알몸을 보고도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본래 정화 의식은 주교를 비롯한 다수의 사제가 참여해야만 진행할 수 있는 의식이지만, 성녀의 경우엔 달랐다. 여신으로부터 팔라딘을 보좌하는 역할을 받은 성녀는 혼자서도 정화 의식을 진행할 수 있었다.
성스러운 연못에 눕는다. 머리까지 푹 담긴다.
내 몸에 달라붙어 있던 악마와 타락자들의 영혼이 정화된다. 그 일부는 내게 스며들어 힘이 되었고, 다른 일부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신성력이 1 상승합니다.]
나는 상체를 일으킨다. 성스러운 연못이 첨벙였다. 연못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아 가만히 있었다. 성수로 가득한 연못은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 매우 편안했다.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까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성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수건과 새로운 옷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옷은 팔라딘이 입는 옷답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나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그녀의 얼굴을 힐끔 봤다. 베일이 흔들리며 그녀의 얼굴이 살짝 엿보였다. 이 세계에서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시선은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성스러운 연못 앞에 놓인 항아리가 있다. 항아리 안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축목의 기운.
성스러운 연못에서 정화된 타락의 기운이 저 항아리에 담긴 것이다.
'내가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찾은 이유기도 하지.'
축목의 기운을 다룰 수 있는 건 성녀고, 축복의 기운으로 강해질 수 있는 건 팔라딘뿐이다.
"축복의 기운, 지금 사용할 수 있나?"
“축복의 기운은 이곳에서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성소는 오직 그대만을 위한 휴식처이기도 하니까요. 다만,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축복의 기운은 매우 적습니다. 받을 수 있는 축복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상관없다.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옷을 입고 여신님 앞에서 기도하십시오."
아멜리아의 말에 따랐다. 헤리안느 여신의 조각상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내 뒤에 선 성녀가 손을 모으며 기도한다. 직후, 조각상의 눈이 빛나며 나를 주시한다.
나만이 볼 수 있는 알림창이 떴다.
[현재 모인 축복의 기운-155]
[선택할 수 있는 축복 목록
신성한 강타 2,500
빛의 확산-700
부활-5,000
질주 3,000
강림-15,000
완전한 육체 100,000
여명의 날개-100,000
……]
축복은 스킬이었다.
팔라딘은 축복의 기운을 이용해 스킬을 배우거나, 강화할 수 있었다.
'역시 축복의 기운이 너무 적어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군.'
축목의 기운만 충분하면 팔라딘이 처음 계시를 받을 때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스킬인 완전환 육체와 여명의 날개도 얻을 수 있다.
'당장은 그림의 떡인 스킬이다.'
미련을 버리고 본래 목적했던 스킬을 찾는다.
[신성검-100]
스킬을 선택했다.
‘검을 사용할 때 공격력 보너스가 붙는 스킬이지.'
성기사를 비롯한 팔라딘은 다른 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 검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무기일 뿐이다.
'난 검이 더 편하다.'
축복의 기운 일부가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신성검(Lv. 1)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27
힘: 20 민첩: 10 체력: 10 신성력: 8
보유 스킬: 성안(Lv. Master), 홀리 오라(Lv.1), 신성검(Lv.1)]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좋군.'
원래 게임에서 처음 성소에 도착했을 때, 플레이어의 레벨은 10 전후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몇 배는 빠르게 성장한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기도가 너무 짧군요. 더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는 그대의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굳혀줄 것입니다."
"내 기도는 악마와 타락자를 죽이는 것이다. 악멸이야말로 내 신앙의 증명이다. 내가 여신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팔라딘이 된 이유이기도 하지."
“그대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기를…."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설령 내가 악마에게 죽더라도."
"……."
내가 죽으면 성녀 또한 죽는다. 성녀는 팔라딘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존재였다. 그녀는 일종의 희생양이다.
성녀가 죽으면 또 다른 수녀가 여신의 계시를 받아 성녀로 발탁되고, 새로운 팔라딘을 보좌하게 될 것이다. 팔라딘은 그저 악마와 타락자를 죽이면 된다. 그런 시스템이었다.
"발렌티어의 성검을 받고 싶다."
"성검은 현재 재련 중입니다."
"재련?"
"발렌티어의 성검은 2년 전에 부러졌습니다. 대악마의 저주는 2년 동안 공을 들여 정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검신은 여전히 부러진 상태입니다. 대주교와 사제들이 의식을 통해 발렌티어의 성검을 주조하고 있으니 기다려 주십시오."
원작과 똑같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성검이 있었다면 더 편하게 갈 수 있었을 일이다.
나는 배낭에서 악마의 심장을 비롯한 전리품들을 꺼내 성녀에게 건넸다.
"악마를 죽이고 얻은 것들이다."
"악마의 부산물에는 특별한 힘이 서리지요. 교단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 원하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질주의 검과 폭발 성수를 원한다."
"다행히 발렌티어 성당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군요.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이 심장은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나는 놀랐다. 악마의 부산물을 넘김으로써 공헌도를 받아 교환하는 줄 알았는데, 공짜로 지원해준다는 게 아닌가.
‘…하긴. 이건 게임이 아니지.'
게임 시스템보다 이 세계의 설정이 더 우위에 있다는 거다.
“신체를 강화하는 영약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가능하겠나?"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악마의 심장을 정화하여 영약을 제조하겠습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겠다."
"열흘만 기다려주십시오.”
"마냥 기다릴 생각은 없다. 그 시간에 악마를 찾아내 죽이는 게 이득이지. 악마나 타락자의 정보는 없나?"
“최근 발렌티어에서 타락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을 도와 타락자들을 찾아내고, 타락의 원인을 조사하여 주십시오.”
생각했던 대로 바로 악마를 처단하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약하기 때문이다.
"알겠다."
"질주의 검과 폭발 성수를 가져오겠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성소를 나선 그녀는 수녀들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수녀들이 내게 물건들을 건넨다. 나는 우선 배낭에 폭발 성수를 넣었다. 폭발 성수는 말 그대로 폭발하는 성수였다. 악마와 타락자들에게 광역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질주의 검은 질주의 축복이 깃든 검이다.
'이 검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 기동성이 빨라지고, 이단 점프를 할 수 있게 되지.'
개인적으로 초반에 가장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검이었다.
아멜리아는 내게 돌멩이 3개를 건넸다.
"귀환석입니다. 귀환석을 사용하면 그대가 어디에 있든 성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다만, 근처에 악마나 타락자가 있으면 귀환석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맙게 받지."
쟁길 걸 모두 챙긴 나는 성소를 나섰다.
이단 심문관을 만났다.
그는 성기사나 사제들에 비해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옷과 가죽 코트. 그리고 가죽 모자를 썼다. 그리고 검과 활, 도끼로 무장했다. 이단심문관은 겉보기에는 용병처럼 생겼다.
키이이이이잉.
나는 이단심문관을 만나자마자 성안을 사용했다. 그가 흠칫 놀란다.
“그 눈이 바로 성안이로군요."
"…아, 미안하군. 사람을 보면 성안을 사용하는 게 습관이 됐다."
"성안을 통해 악마와 타락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습관입니다. 부럽군요. 제게도 성안이 있었다면… 일이 더 편해졌을 텐데."
이단심문관이 한탄했다.
이 세계에는 성안이 아니어도 악마와 타락자를 구분할 방법이 있다. 대표적으로 부적이다. 하지만 부적의 가치는 결코 적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에게 사용하기에는 교단이 입는 손해가 막심하다. 따라서 이단심문관들은 의심이 되는 사람은 심문하여 타락자와 악마를 구분한다.
나는 이단심문관을 따라 성당의 지하로 내려갔다. 퀴퀴하면서도 비릿한 냄새가 났다.
"…광장에 사람들을 모을 수 없나? 성안을 이용해 놈들을 찾아내는 게 더 빠를 터다."
"인구수가 작은 마을에선 그게 빠르겠지만, 발렌티어의 인구수는 3만에 달합니다. 광장에 모든 시민을 불러 모으는 것도 힘들뿐더러, 놈들이 눈치채고 도망칠 수 있습니다. 도시 내부에는 이미 팔라딘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렇군. 섣부르게 움직여서 놈들을 놓치는 건 안 되지. 중요한 건 놈들을 확실히 박멸하는 것이니…."
"역시 의견이 통하시는군요. 전대 팔라딘님은 그런 부분에서 저희 이단심문관과 맞지 않았습니다."
"전대 팔라딘은 어땠지?”
"그분은 성스러운 날개를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자비로우셨습니다. 너무 자비로우셨죠."
"타락자를 구하려 했나?"
타락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타락자는 의식을 통해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교단은 타락자의 신분이 귀족이 아닌 이상 구태여 타락자를 구하는 의식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효율. 구제 의식은 상당한 돈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 그러합니다. 덕분에 저희가 고생했지요.”
지하에 도착했다.
고통이 가득한 감옥이었다. 어린아이, 젊은 여자,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신음을 흘리며 고통을 토로한다.
이단심문. 그것은 고문이란 단어와 동의어였다.
"데려와라."
다른 이단심문관이 감옥에서 노파를 데려왔다. 추레한 늙은이는 내 앞에 서자마자 벌벌 떨며 손바닥을 비볐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저는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단이 아닙니다!"
"타락자군."
검을 휘둘렀다. 노인의 목이 잘리고 떨어져 나간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의 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노파의 머리가 나를 노려보며 분노를 표했다.
“이 망할 놈들! 팔라딘! 나 혼자 죽지 않겠다! 네놈들 전원 데려가…."
콰직!
나는 노파의 머리를 밟아 터트렸다.
이단심문관들은 즉시 철퇴로 노파의 몸을 내려쳤다. 타락자의 육체는 곤죽이 되어 끌려갔다.
"대단하십니다. 혹시 이단심문관 출신이셨습니까?"
"성기사 출신이다. 다음 놈을 데려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