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6화 > 1476. 팔라딘: 악멸의 여정
"팔라딘! 아직 네놈이 성장하지 않았을 때 죽이겠다! 그 눈만 믿고 나를 죽이러 온 건 네놈의 실수이고, 오만이다!"
가고일은 내 갑옷을 움켜쥐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내 갑옷을 잡은 놈의 악력은 굉장했다. 스톰브레이커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뇌전을 일으켰다. 황금빛 전류에 놈이 괴성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쾅!
벽에 부딪혔다. 놈은 허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내 몸을 벽에 연신 갖다 박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악마 놈보다 내 체력이 먼저 바닥나겠지.'
비장의 수단인 천심과 완전 회복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성장을 위해서라도 안 쓰는 게 훨씬 좋다.
나는 머리를 최대한 뒤로 젖힌 뒤 가고일의 돌머리에 박차기를 했다.
투구를 쓰고 있는데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두개골을 통해 전해진다. 반면 놈의 돌머리는 멀쩡하다.
"크크크. 발악인가? 좋다. 마음껏 해봐라!"
놈의 말을 무시하고 박치기를 날렸다. 머리가 깨진다. 이마에서 나온 피가 아래로 주르륵 흘렀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하! 팔라딘 너는 죽는다! 다름 아닌 이 골리그 님의 손에 죽는다! 내가 팔라딘을 죽일 것이다!! 하하하하하하!”
파지지지직!
뇌전을 쥐어짜내며 박차기를 날린다.
승리를 확신하던 놈의 머리 일부가 터졌다. 놈이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진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반대로 나는 찰나를 통해 균형을 잡았다. 낙하 충격을 감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놈을 죽이기 위해서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쿵! 바닥에 떨어지는 동시에 내 검이 놈의 몸을 갈랐다. 나는 계속해서 대검을 휘둘렀다. 혹시 모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확인사살까지 완벽히 끝마친다.
가고일의 시체에서 시커먼 연기가 튀어나와 내 몸에 스며들었다. 악마의 영혼, 즉, 타락의 기운이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다. 나는 얻은 포인트를 바로 체력에 사용했다. 약간이지만 몸이 편해졌다.
-절제는 집어치워라.
-힘을 가졌잖아. 왜 그 힘을 원하는 대로 쓰지 않는 거지?
-여자를 범해라. 네 안의 욕망을 풀어라.
악마의 속삭임이 들린다. 나를 타락시키기 위한 개수작이다.
"시끄럽다."
악마의 속삭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악마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성기사들과 가고일들의 전투에 끼어들었다.
전투는 가고일이 전부 죽는 것으로 끝났다.
7명 중 2명의 성기사가 전사했다.
"정화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늙은 주교가 말했다.
내 앞에는 육각형의 탕이 있었다. 탕 안에는 성수가 가득하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성수의 탕으로 들어갔다. 탕 안에 조용히 몸을 눕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에서 힘을 풀었다. 머리까지 탕에 푹 들어갔다.
탕 밖에서 주교를 비롯한 사제들이 기도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문은 신성력이 되어 탕으로 스며들었다. 정화가 시작되었다.
성수로도 완전히 씻겨나가지 않던 악마와 타락자들의 영혼이 정화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화된 그것들은 나의 힘이되었다.
[신성력이 1 상승합니다.]
[신성력이 1 상승합니다.]
내가 완전 회복과 천심을 이용해 타락의 기운을 떨쳐내지 않은 이유였다. 정화 의식을 통해 신성력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9
힘: 10 민첩: 6 체력: 6 신성력: 7
보유 스킬: 성안(Lv. Master), 홀리 오라(Lv.1)]
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제들이 수건을 가져와 내 몸을 닦았다. 주교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건 정화 의식이 전부입니다. 그 이상의 축목 의식은…."
"알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라. 멜라시스 주교.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성기사는 몇이나 있지?"
“총 12명의 성기사들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혹시 근처에 다른 악마라도 나타난 것입니까?"
“아니. 교회에 오면서 이 마을을 둘러봤다. 큰 마을답게 사람들이 많더군. 그리고 숨어 있는 타락자들도. 나는 여신님의 계시를 받아 발렌티어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타락자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며 인간 행세를 하는 꼴은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성기사들을 소집하고, 마을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라. 내가 직접 타락자들의 목을 칠 것이다."
키이이이잉.
성안이 발동한다. 그 어떤 악마와 타락자들도 내 눈을 피할 수 없다.
나는 타락자 47명의 목을 베었다.
경험치는 매우 짭짤했다.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13
힘: 14 민첩: 6 체력: 6 신성력: 7
보유 스킬: 성안(Lv. Master), 홀리 오라(Lv.1)]
포인트는 전부 힘에 투자한다. 힘은 공격력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능력치다. 힘을 올리면 능력치가 오른 게 확 실감 날 정도로 가장 효율이 좋았다.
대검을 쥐고 휘둘렀다. 대검이 단검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팔라딘이시여, 하루 정도는 휴식을 취하십시오. 저희가 극진히 대접하겠습니다."
"됐다, 주교.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발렌티어로 가야 한다. 말이나 교환해줬으면 좋겠군."
말을 바꿔 타고 마을을 떠났다.
주교에게는 바로 발렌티어로 갈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중간에 방향을 틀었다.
아무도 없는 숲을 헤매며 폭포를 찾았다.
폭포 뒤에 있는 숨겨진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 안쪽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나는 갑옷을 입은 채로 벽을 향해 돌진했다. 콰콰쾅! 벽이 부서지고 새로운 공간이 나왔다. 준비해온 횃불로 공간을 밝힌다.
고대 사원이었다. 벽에는 오래도니 벽화들이 가득했다. 벽화를 보면 악마와 인간을 표현한 그림이 있다.
'게임에서는 내레이션이 나왔는데… 뭐였더라. 이 세계에 악마가 나타나 인간을 괴롭히고 세상을 비탄에 빠뜨릴 때… 헤리안느 여신이 빛의 날개를 펼치며 인간에게 구원의 빛을 내렸노라….'
그게 팔라딘이다.
그리고 팔라딘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다. 당장 이 세계에는 나를 포함해 8명의 팔라딘이 존재한다.
'팔라딘은 무적이 아니지.'
팔라딘이 무적이었다면 이미 악마는 다 죽었을 것이다. 팔라딘보다 악마 쪽이 더 우세하다.
나는 팔라딘과 악마의 역사가 그려진 벽화를 쭉 훑어보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제단이 있었다. 제단 앞에는 검은날개의 대악마와 하얀 날개의 헤리안느 여신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대악마와 헤리안느 여신은 서로 닮아 있었다.
제단은 그사이에 존재했다.
'대악마를 위한 제단인지, 헤리안느 여신을 위한 제단인지 모르겠군.'
내 목적은 제단 위에 놓인 뿔이었다.
잘린 악마의 뿔.
게임에서 나온 이 아이템의 이름은 [태초의 악마의 뿔]. 히든 엔딩을 위한 아이템이었다.
나는 횃불을 버리고 대검을 양손에 쥐었다. 대검에서 황금색 오라가 일어난다.
-관두게 좋을 거다, 어린 팔라딘이여.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의 발원지는 악마의 뿔이었다.
나는 성안으로 악마의 뿔을 내려다봤다.
-네 눈앞에 있는 이건 태초의 악마의 뿔이다. 대악마의 영혼을 봉인할 수 있지.
"너는 누구지?"
-나는 다섯 대악마 중 하나인 베지술라. 동족에게 배신당해 이곳에 갇혀 버린 불쌍한 대악마지.
우우웅.
홀리 오라는 더 눈부시게 타올랐다.
-네가 이 뿔을 박살 내면 나는 소멸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냐?
"알고 있다. 영원불멸한 대악마가 죽는다는 거지.”
대악마의 영혼은 다른 악마나 타락자의 영혼과 다르다. 대악마를 죽여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악마를 죽여도, 수십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 악을 뿌린다.
-그래. 악마를 멸절할 기회가 네 눈앞에 있다. 다른 대악마들을 죽이고 그 영혼은 이곳에 담아라. 그리고 한 번에 처리하는 거지. 너는 악마들로부터 이 세상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난 네게 대악마를 처리할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이 나를 배신한 놈들을 죽일 방법을!
“그 악마의 뿔에 다섯 대악마의 영혼이 전부 모이는 순간 태초의 악마가 부활한다는 걸 알고 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팔라딘이 아니었나? 어떻게 그걸 아는 거냐?
게임에서 봤다.
태초의 악마는 히든 엔딩의 최종 보스다.
나는 퀘스트 내용을 떠올랐다. 퀘스트는 대악마들을 죽이는 거지, 태초의 악마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태초의 악마는 설정상 세계도 파멸시킬 수 있는 존재. 그런 위험한 존재를 상대할 이유는 없다.'
-말해줄 생각이 없나보군. 똑똑한 팔라딘아, 잘 들어라. 대악마를 죽일 방법은 태초의 악마의 뿔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대악마 영혼 4개를 봉인하고 없애는 거다. 그럼 태초의 악마는 부활하지 않고 4명의 대악마는 소멸한다. 나머지 한 명의 대악마는 봉인을 하든, 뭘 하든 알아서 하면 되지 않느냐.
"수백 년을 갇혀 있었기에 모르는 모양이군. 교단은 이미 대악마를 죽일 방법을 고안했다. 태초의 악마의 뿔이 없어도 대악마는 죽일 수 있다."
-뭐? 자, 잠깐 기다려라. 너희 방법이 확실하다고 어떻게… 크아아아아악!
대검을 내려쳤다.
태초의 악마의 뿔이 반쯤 부러지고, 대악마 베지 술라의 비명이 동공을 가득 채운다.
검을 한 번 더 내리쳤다. 악마의 뿔이 완전히 부러졌다. 대악마의 비명도 끊겼다.
[레벨업 했습니다.]
[레벨업 했습니다.]
[레벨업 했습니다.]
[레벨업 했습니다.]
레벨업을 알리는 알림창이 우르르 나타났다.
나는 검을 쥔 손을 내리며 숨을 내쉬었다.
'우선 한 마리.'
남은 건 네 마리였다.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25
힘: 20 민첩: 9 체력: 9 신성력: 7
보유 스킬: 성안(Lv. Master), 홀리 오라(Lv.1)]
능력치는 힘과 민첩 체력에 사용했다. 신성력은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었다. 당장 필요한 건 성장을 위한 육체 능력이었다.
'신성력은 다른 방법으로도 올릴 방법이 있다.'
대도시 발렌티어에 도착했다.
나는 도시 중심에 있는 발렌티어 성당으로 향했다.
악마가 판치는 이 세상의 권력은 귀족보다 성직자가 더 높았다. 도시나 마을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교회와 성당이 위차하게 됐다.
발렌티어의 성당 앞에는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갑옷을 입은 채로 서 있었다. 성당에 볼일이 있는 사람들은 숨죽이고 질서를 지켰다. 그들은 감히 성당 앞에서 난동을 부리지 못한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도 평민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줄 서 있는 그들을 지나쳐 새하얀 대리석 계단을 밟으며 성당 정문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성기사들이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키이이이이잉.
성안을 발동했다. 성기사들의 태도는 바로 바뀌었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가디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발렌티어의 팔라딘이시여!"
"인사는 나중에 하겠다."
나는 성기사들을 지나쳐 성당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한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성당의 심처로 걸어간다. 도중에 사제들과 마주쳤다. 그들도 내 눈을 보고 바로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파, 팔라딘을 뵙습니다!"
"그래."
대충 대답해주며 지나쳤다.
성당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화려한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어두웠다. 창문이 없어 빛 하나 들지 않는 곳이었다. 대신에 촛불을 밝혀 공간을 밝혔다. 예배당보다 넓었고, 주위에는 성수가 고여 있었다. 가장 끝에는 헤리안느 여신의 석상이 있었으며, 그 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릎 끓은 그녀의 그발은 엉덩이까지 내려왔다. 그녀의 등을 자세히 보면 머리카락 사이로 등이 보인다. 옷의 등부분이 파여 있는 것이다. 등에는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날개 달린 십자가. 교단의 문양이다.
저건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스티그마다. 그녀가 헤리안느 여신에게 점지받았다는 증거다.
나는 성소의 바닥을 밟으며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하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팔라딘이여, 어서 오세요. 아멜리아입니다. 발렌티어의 성녀로서 여신님을 대리하여 그대를 인도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