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5화 > 1475. 팔라딘: 악멸의 여정
본성을 드러낸 타락자들이 사방에서 달려든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검을 쥐고 몸을 회전시켰다. 커다란 검이 팽이처럼 휘둘러지자, 타락자들은 흠칫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어설픈 놈들.'
타락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놈들이다. 경험이 많은 타락자들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난 재생력을 믿고 내 검을 무시하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꽤 고전했겠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상대하기 편하지.'
가장 가까이 있는 타락자에게 접근해 주먹을 휘두른다. 주먹을 맞은 타락자가 휘청거린다. 타락자의 가슴팍에서 거대한 칼날이 튀어나와 내 어깨를 노렸다. 카앙! 칼날은 갑옷에 막혔다. 갑옷의 어깨 부위가 약간 찢어졌다.
'좋은 갑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지.'
부우우우웅.
커다란 대검이 놈의 몸을 양단한다.
"한 번에 달려들어서 죽여!!"
"성기사라고 해도 한 놈이다!"
“저놈을 여기서 죽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놈을 죽이고 피의 축제를 벌이자고!"
타락자들이 소리친다. 다급해진 타락자들은 일제히 덤벼들었다. 문어처럼 생긴 놈이 굵은 촉수로 내 다리를 붙잡고, 커다란 덩치가 내 등을, 날렵해 보이는 놈들이 각각 내 양팔을 붙잡았다.
"케헤헤헤! 잡았다! 잡았다고!"
"넌 끝이다, 이 새끼야!"
"산채로 내장을 파먹어 주마!"
"난 골수! 성기사의 골수를 빨아 먹을 거야!"
다른 타락자까지 기뻐하며 달려든다. 놈들의 손톱과 이빨이 스톱브레이커를 쉬지 않고 공격했다. 아무리 스톰브레이커라고 해도 이 상태에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천심은 쿨타임이다. 완전 회복도 사용할 수 없지.'
위기다. 이대로 있으면 그대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뇌전은 사용할 수 있지.'
파지지지지지지직!
신성력으로 발현된 황금빛 전류가 사방으로 퍼져갔다. 신나게 나를 공격하던 타락자들 모두가 감전당해 몸을 덜덜 떨었다. 놈들에게 벗어난 나는 대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느렸다. 육체 능력치가 그다지 압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승기는 이미 내 손에 있다. 하나씩 처리하면 된다.'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타락자들의 목과 몸이 분리된다.
타락자들의 단말마가 끝났다. 고요해진 거리에는 공포에 질린 마을 주민들과 덤벼들지 않았던 타락자 2명만이 남았다.
나는 검을 쥐고 남은 타락자들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 이 괴물 새끼!"
타락자 하나는 도망쳤다. 꺾어진 다리를 가진 놈이었는데 도망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일단 남아 있는 놈부터 처리한다.’
남은 타락자는 도망 대신에 다른 걸 선택했다. 근처에 있는 남성을 붙잡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 목을 겨눈 것이다.
"으아아아악!"
"뒤지기 싫으면 닥쳐! 성기사! 네놈도 거기서 멈춰라! 이 자식이 죽는 걸 네놈도 원하지 않을거 아니냐?! 날 도망가게 내버려 둬! 그럼 이놈은 살려주지!"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멈춰! 멈추라고! 내 말 안 들려?! 기어코 이 새끼가 죽는 꼴을 봐야겠어?!"
타락자의 손톱이 인질의 목에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악마와 타락자와 협상하지 않는다. 오직 죽일 뿐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성기사님! 제발!"
인질이 바들바들 떨며 목숨을 구걸했다. 나는 무감각한 어조로 인질에게 말했다.
"나를 원망해라."
“이 미친 새끼가!"
타락자의 손톱이 인질의 목을 푹 찌른다. 피 분수가 솟구쳤다.
나는 뛰어서 거리를 좁히며 대검을 휘둘렀다. 타락자와 인질의 몸을 동시에 베어 갈랐다.
피가 갑옷에 묻어 질척거렸다.
피로가 단번에 몰려온다. 하지만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도망간 타락자를 쫓아가 죽여야 한다.
'악마와 타락자는 인간을 잡아먹고, 인간을 타락시킨다. 전염병 같은 놈들이다. 놈을 귀찮다고 내버려 두면 타락자는 더 늘어난다.'
키이이이잉.
성안(聖眼)을 발동했다. 성안은 도망친 타락자의 흔적을 내게 보여주었다. 놈은 마을을 빙빙 돌았다. 마을을 벗어날 것처럼 달려가더니 결국 마을 내부로 숨어든 것이다.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놈이군. 그게 아니면 역으로 내 허를 찌르려는 속셈일 수도 있고.'
성안이 없었다면 꽤 고생했을 것이다. 아예 놈을 놓쳐버렸을 수도 있고.
철컥철컥.
갑옷 소리를 내며 도착한 곳은 어느 민가였다. 작은 민가에 들어선 나는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봤다.
성안은 숨어 있는 타락자를 찾았다. 놈은 침대 아래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검을 들고 침대로 다가가 침대에 내리꽃았다.
"끼아아아아아악!"
타락자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놈은 너덜너덜해진 어깨로 피를 사방에 흩뿌리며 문밖으로 도망쳐 마을 거리를 질주한다. 나는 꽉쥔 대검을 놈을 향해 던졌다.
결과는 명중.
놈은 대검에 꽂혀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다가가 놈의 머리를 짓밟아 박살 냈다.
'끝났다. …아니지. 아직 숨어 있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 한 번 더 둘러봐야겠군.'
타락자는 없었다.
나는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뒤에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말 위에 올라탄다.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시선은 느껴진다. 두려움이 담긴 시선은 내가 마을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때, 한 노인이 덜덜 떨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 마을의 촌장이군. 할 말이라도 있나?”
"마, 마을을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다."
“…작지만 교단을 위해 모은 돈입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헌금인가. 그대들의 돈은 악마와 타락자를 죽이기 위한 자금으로 쓰일 것이다."
나는 돈주머니를 받았다.
성기사는 헌금을 거절하지 않는다. 받은 돈의 절반은 자신이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교단에 전한다. 그게 성기사의 규율 중 하나였다.
이 돈을 내가 꿀꺽해도 상관없다. 나는 평범한 성기사가 아닌 여신의 계시를 받은 팔라딘이었으니까.
"욕망을 절제해라. 악마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며 타락시키니 너희는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말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발렌티어 성당이다. 꽤 먼 거리다. 일주일은 말을 타고 가야 도착할 것이다.
'도중에 교회와 성당부터 들러야겠군.'
내 몸에 서려 있는 타락의 기운이 매우 거슬린다. 그리고 성수도 보충해야 한다.
키이이이잉.
나는 한 번씩 성안을 사용했다. 타락한 동물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뛰어가 죽였다. 이것들 모두가 경험치였다.
제법 큰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에 들렀다.
교회에 있는 사제들은 나를 보자마자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저렇게 많고 짙은 타락의 기운이라니…!"
"성수를… 아니, 타락의 기운이 너무 짙다! 성수보다는 정화 의식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주교님에게 알리고 정화 의식을 준비하라!"
사제들이 호들갑을 떨며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다.
나는 원작 게임을 떠올리며 예배당으로 가려고 했다.
"멈추십시오."
교회의 성기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전신 갑옷을 입은 그들은 경계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대가 뛰어난 성기사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 그대의 몸에는 부정한 기운이 넘쳐나오. 사제들이 정화 의식을 준비하고 있으니 기다려 주시오. 그리고 당신의 신분도 알려줬으면 좋겠소.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 교회 소속이시오? 어쩌다 부정한 기운을 그렇게 덕지덕지 몸에 붙이게 됐소?"
"질문이 많군."
"이해해 주시오. 요즘 악마와 타락자들이 날뛰고 있어서 교회 분위기가 서릿발처럼 차갑소."
"……."
키이이이이이잉
성안을 발동했다. 내 눈동자가 파랗게 변하며, 그 중심에 날개 달린 십자가 문양이 떠오른다.
성기사들이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땅에 박았다.
"팔라딘을 뵙나이다!"
성안은 팔라딘만이 가지는 능력 중 하나였기에 신분을 증명하는 것에도 쓰인다.
"교황청에서 정보가 도착했나?”
"네. 팔라딘이시여. 나흘 전에 교황청이 모든 교회와 성당에 팔라딘의 존재를 알리셨습니다!"
성기사들이 긴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의 눈빛에선 나를 향한 경외가 느껴진다. 나는 성기사들의 수를 확인했다. 7명. 이 정도면 충분하다.
"예배당으로 간다. 전원 나를 따르라.”
"팔라딘이시여, 우선 정화 의식을…."
"명령이다."
“…네. 따르겠나이다."
나는 그들을 이끌고 예배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성기사들은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이 교회에 처음 오는 내가 정확하게 예배당으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의문을 무시했다. 설명하기 귀찮았고,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예배당의 문을 열기 직전, 스톰브레이커를 소환해 몸에 둘렀다. 촤르르르륵!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갑옷을 입은 나는 망설임 없이 예배당의 문을 밀어젖혔다.
예배당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그 중심에는 헤리안느 여신의 조각상이 있었다. 양옆에는 팔라딘을 조각한 석상들이 줄지어 서 있다.
여신의 조각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신의 조각상은 아름다웠다. 등 뒤에 달린 날개는 당장에라도 움직일 것처럼 정교하다.
"전원 전투를 준비하라. 그리고 석상을 주시하라."
대검의 검자루를 강하게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팔라딘이시여?! 지금 무슨…?!"
검끝은 정확히 여신의 가슴을 찌른다. 조각상은 부서지지 않았다. 석상 파편 대신 핏물이 튀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여신의 조각상이 울부짖는다. 천사의 날개는 악마의 것으로 변해 퍼덕이고, 아름답던 얼굴은 주름진 괴물의 것으로 변한다.
가고일.
석상의 악마.
"팔라딘! 이 증오스러운 여신의 개가!”
예배당에 줄지어 서 있던 다른 석상들이 모습을 일으킨다.
상황을 파악한 성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악마들을 겨누었다.
“이 더러운 악마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숨어든 것이냐!"
"용서할 수 없다."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성기사들이 분노를 토하며 가고일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우두머리 가고일에게 집중했다. 내 앞
에 있는 이놈이 가장 위험한 놈이었다. 못해도 레벨 30은 되어서야 잡을 시도를 할 수 있는 놈.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기습은 완벽히 성공했다.
'뇌전!'
파지지지직!
황금빛 뇌전이 검을 타르고 흐른다. 날개를 퍼덕이며 도망치려던 가고일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나는 놈의 어깨를 잡고 검에 힘을 주었다. 놈이 죽기 전까지 절대로 검을 뺄 생각 없다. 검을 빼는 순간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상처를 회복한 뒤에 다시 덤벼들겠지.
"여기서 죽어라!"
“팔라딘! 아직 네놈이 성장하지 않았을 때 죽이겠다! 그 눈만 믿고 나를 죽이러 온 건 네놈의 실수이고, 오만이다!"
가고일은 내 갑옷을 움켜쥐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