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3화 > 1473. 팔라딘: 악멸의 여정
[팔라딘: 악멸의 여정.
오래전에 악이 창궐했습니다.
두렵습니다.
악은 인간을 현혹하고, 기만하고, 잡아먹습니다.
인간은 악에 빠져들어 타락하며, 세상은 악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소수의 선이 이 세계를 지키려 합니다.
힘듭니다.
이 세계는 악이 너무 많습니다.
악을 뿌리는 악마들은 선을 비웃습니다.
하지만 이 참혹한 세계에 빛을 비추는 신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희망입니다. 당신은 그녀가 뿌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악을 멸하십시오.
대악마들을 처단하십시오.
어둠에 잠기는 세상을 빛으로 끌어올리십시오.
퀘스트 성공 조건: 대악마들 처단
퀘스트 성공 보상: 현신
※ 페널티가 존재합니다.]
팔라딘은 난이도가 지랄 맞기로 유명한 게임이었다.
맵에는 함정이 넘쳐나고, 약간의 실수만 해도 잡몹에게 죽는다. 보스 몬스터의 악랄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높은 난이도가 인기 요소로 작용한 게임이었다. 난이도 외의 다른 요소들. 예를 들면 스토리나, 그래픽, 음악 등은 모두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팔라딘의 게임성이 아니지. 퀘스트 보상인 현신.'
[현신
원하는 엔딩 세계의 자신을 불러와 재현합니다.
현신의 지속 시간과 능력 재현은 능력치 총합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격: 10,000 포인트
※주의
적용된 페널티까지 모두 재현합니다.]
'즉, 엔딩을 본 세계의 내 힘을 재현할 수 있다는 거지?'
예를 들면 '그대를 위한 폭군' 세계의 황제를 내게 현신시켜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능력치 총합에 따라 능력 재현이 달라진다고…. 해도 황제의 힘이 있다면, 저 빌어먹을 놈들을 모조리 다 죽이고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몰라.'
‘게이킹을 죽여라' 라는 엔딩도 존재한다. 그 세계의 나는 그야말로 전능한 신이 되었다. 물론 내 능력치 총합으로 그 세계의 나를 온전히 재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건 현신의 가격이다. 10,000 포인트. 지금 내겐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야. 한 번 얻으면 랜덤 뽑기 상점에서 다시 구입할 수 있으니…. 지금 얻어 놓는 게 좋겠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랜덤 뽑기?
10만 포인트를 투자해도 안 나올 가능성이 더 크다.
'지금 내 상황이 이것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니… 해보자.'
[퀘스트를 선택합니다.]
[페널티가 존재합니다.]
[페널티 능력치 조정.]
[능력치는 아바타의 출신에 맞게 조정됩니다.]
[아바타의 출신을 선택해 주십시오.]
[총 10개의 출신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1. 귀족. 2. 수도자 3. 자유 기사. 4. 성기사. 5. 상인. 6. 거지. 7. 문둥병 환자. 8. 점술사. 9. 노예. 10. 심부름꾼]
'출신이라. 게임 시작 부분과 똑같군.'
팔라딘은 출신에 따라 능력치가 달라진다. 게임의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지만, 선택지나 NPC의 반응도 출신의 영향을 받는다.
'일종의 난이도를 선택하는 거라 할 수 있지. 능력치 보너스가 받는 출신은 수도자, 자유 기사, 성기사….'
수도자가 가장 좋은 능력치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수도자는 초반에 '수도자의 철퇴’라는 무기를 가지고 시작한다. 게임중반까지 사용할 수 있는 준수한 무기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건 아니지.
수도자는 선택지의 제약이 꽤 크다. 교단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고, 함부로 NPC를 공격하지 못한다.
‘그 제약까지 고스란히 유희 세계에 적용된다면… 수도자를 택하는 건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어.'
그렇다고 약한 능력치를 가진 출신을 선택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유희 세계를 즐기려고 이 퀘스트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지금 내 목표는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이다.
'수도자를 제외하면… 자유 기사, 성기사, 귀족, 심부름꾼 중에 선택해야겠군.'
이 중에서 가장 무난하고 초보자에게 추천되는 출신은 자유 기사다. 능력치도 준수하며 지켜야 할 제약이 적으며, NPC들에게 무시 받지도 않는다. 그다음은 귀족과 성기사다. 능력치는 준수하고 NPC들에게 경외 받지만 수도사처럼 지켜야 할 제약이 존재한다. 심부름꾼은 제약이 적으나 NPC들에게 무시 받는다.
'수도자 다음으로 능력치가 뛰어난 성기사로 간다. 성기사는 수도자처럼 지켜야 할 것들이 빡빡하지도 않고… 교단의 부당한 요청도 거절 할 수 있으니까.'
[4. 성기사를 선택합니다.]
[능력치를 조정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절대 정신이 신성한 정신으로 변합니다.]
[성기사의 기억과 경험이 스며듭니다.]
[유희를 시작합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의식은 깨어 있으나, 몸은 어둠에 잠겨 움직이지 않는다.
1시간. 2시간. 3시간….
시간이 계속 흐른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어둠이 내 정신을 좀먹는 것 같았다.
계속 이대로 어둠 속에 잠겨 있어야 하나? 언제까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어둠에 두려움을 느낄 무렵이었다.
하늘에서 빛이 떨어졌다. 따스한 황금색의 빛은 정확하게 나를 비춘다. 어둠이 사라지고 몸이 움직였다. 나는 빛을 잡으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물론 빛을 잡을 순 없었다.
-유진. 나의 신실한 종아.
성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바로 무릎 꿇었다.
"헤리안느 여신이시여…!"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구나. 너는 한 줄기의 빛으로서 이 세상을 비추게 되리라.
빛이 내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고개 숙이며 그저 빚을 받아들였다.
위대한 존재가 사라졌다.
세 갈래의 길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세 갈래 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게임의 시작 부분이군.'
성기사의 기억과 경험을 받아들이면서 잠깐 혼란이 왔다. 나는 정신을 붙잡고 세 갈래 길을 둘러봤다.
세 갈래 길.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나아가야 한다. 길의 끝에는 제각각 다른 스킬이 존재했다.
'후반부에 다른 스킬들도 얻을 수 있지만… 초반부에는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지지.'
왼쪽 길을 걸어가면 '완전한 육체’라는 스킬을 얻을 수 있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체 능력과 관련된 스킬이다. 완전한 육체가 있으면 초반부의 난이도가 쉬워진다. 중후반부에 가면 보스 몬스터들이 워낙 강해서 큰 의미가 없어지지만.
중간 길은 '여명의 날개'를 얻을 수 있다. 대부분이 이 날개를 선택한다. 기동성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지기 때문이다. 오른쪽 길은 '성안(聖眼)'을 얻을 수 있다. 전투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이게 있으면 인간으로 의태한 악마나, 타락
한 자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두 개의 스킬과 달리 성장하지 않는다.
나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성안으로 악마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죽일 수 있는 적들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지.'
내 눈앞에는 반투명한 알림창이 있었다.
원작 게임의 인터페이스였다.
[이름: 유진
출신: 성기사
레벨: 1
힘: 7 민첩: 5 체력: 5 신성력: 2
보유 스킬: 홀리 오라(Lv.1)]
게임 시스템이 적용되고 있었다.
레벨과 능력치를 올리려면 경험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경험치를 얻는 방법은 적을 죽이는 것뿐이다.
'성안으로 놈들을 찾아내 죽이고 성장한다.'
길의 끝에는 푸른색 빛이 허공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안(Lv. Master)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크으으윽!"
왼손으로 눈을 가리며 몸부림쳤다. 고통이 어마어마했다. 한순간이나마 내 선택을 후회할 정도로. 고통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발렌티어의 성당을 찾아가거라. 그 아이가 너를 이끌 것이니….
헤리안느 여신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낡은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방은 좁고 낡았다. 미약하지만 악취가 났다. 침대 옆에는 내 검과 갑옷이 놓여 있었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보며 성기사의 기억과 원작 게임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2년 전에 성기사가 되었다.
노예로 팔린 나는 5살에 이단심문관에게 거둬졌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재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렇게 20년 동안 수련했으며 2년 전에 성기사가 되었다. 지금 나는 임무를 받아 골티라는 시골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내가 받은 임무는 마을 근처에 있는 악마를 찾아내 죽이는 것이었다.
'성기사로서 악마와 싸우다 죽을 운명이었겠지만.…'
내 운명은 지금 바뀌었다.
나는 헤리안느 여신의 계시를 받아 팔라딘이 되었다. 교황청에도 신탁이 내려졌겠지.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가 해야할 일은 명확했다.
악마와 타락자들을 죽이고 강해진다. 최대로 강해진 다음에는 대악마를 죽인다. 다행히도 대악마가 있는 곳과 놈들이 가진 힘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갑옷을 향해 손을 뻗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쓰레기 같은 갑옷은 뭐야?'
갑옷 일부는 찌그러져 있고, 냄새까지 났다. 입는 순간 병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갑옷을 보고 있자 바로 기억이 떠올랐다.
'선임 성기사가 쓰던 갑옷이군….'
선임 성기사는 구울에게 기습당해 죽었다. 나는 그의 갑옷과 검을 물러받았다. 이 세계에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것만으로도 굉장히 부유한 축에 들지만.·…
'이딴 쓰레기를 내가 입을 필요는 없지.'
이 세계의 페널티를 떠올린다. 능력치가 떨어지고 절대 정신이 바뀌었다. 그게 전부였다. 다른 세계의 무기와 갑옷을 사용할 수 있다.
'스톰 브레이커.'
눈앞에 거창이 나타났다.
스톰브레이커에 의지를 보낸다. 스톰브레이커는 조각조각 분해되어 내 몸에 달라붙어 갑옷이 되었다.
나는 건틀릿을 낀 손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느껴지는 힘이 약하다. 갑옷의 내구도도 내 생각만큼 단단한 것 같지 않다.
'어쩔 수 없지. 스톰브레이커의 성능은 착용자의 힘에 영향을 받으니까.'
지금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훨씬 약했다.
'화련비도.'
화련비도를 손에 쥔 순간이었다.
파직!
붉은 뇌전이 일어났다.
손에서 힘이 풀렸다. 화련비도가 바닥에 쿵 떨어진다.
'……나를 거부하는 건가? 왜?'
머리를 굴려봐도 모르겠다. 짐작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내가 성기사라서. 둘째는 내가 가진 신성력과의 반발. 셋째는 신성한 정신.
'싫다면 됐다.'
화련비도를 역소환하고 성기사의 검을 들었다. 내 인벤토리에는 다른 뛰어난 검도 많다. 그중에는 퇴마의 힘을 가진 검도 존재한다.
'성기사의 검도 약하지 않지. 악마를 죽이기 위해 특수한 방식으로 제련된 검이니까.'
옆에 있는 협탁 위에 작은 거울이 올려져 있었다. 품질이 영 좋지 못한 거울이었지만, 거울은 제대로 나를 비추었다.
은색 전신 갑옷을 걸친 내가 있었다. 손에 쥔 검은 사람 정도는 우습게 갈라버릴 수 있을 정도로 큰 대검이었다. 투구를 걸치진 않았기에 내 얼굴이 잘 보였다. 나는 거울을 보며 성안을 사용했다.
키이이잉.
안구에 신성력이 모인다.
두 개의 검은색 눈동자는 파랗게 변하고, 눈동자의 중심에는 날개를 펼친 십자가 문양이 드러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동자는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원작 게임대로군.'
성기사의 검과 작은 가방을 챙겨서 방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