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2화 > 1472. 버려진 세계
"형은 여기를 지켜 주세요."
“지켜? 같이 쳐들어가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유진 형이 함께 해주시면 든든하죠. 하지만 이 세계가 더 걱정돼요. 저 성을 통해 악신의 사제가 지구로 와서 숨기라도 한다면…. 후우. 상상만으로 끔찍하네요."
박수호가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선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악신의 추종자는 이미 지구에서 활동 중이다. 그들이 세운 사이비 종교는 무너졌지만,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수작을 부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세계의 존재가 넘어오는 건 달갑지 않긴 하지.'
건물 옥상에 있는 붉은색 성을 바라본다. 저 성의 문을 통해 역으로 문신 세계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알았어. 심각한 일이니 나도 도와줄게. 내가 여기를 지키는 동안 너는 어쩌게?"
“저는 베로프린의 병사들과 함께 붉은색 성을 공격할 거예요."
"네가 붉은색 성을 공격하는 동안 이쪽으로 도망치는 놈들을 처리해달라는 거네?"
"네. 부탁드릴게요, 형."
나는 박수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고 말고요. 전 이전보다 강해졌어요. 베로프린도 셀 교단의 지원을 받고 발전했죠."
박수호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예전보다 강하긴 했다. 정말 빠른 속도로 강해지긴 했다. 아직 나를 뛰어넘는 수준은 아니지만…. 조만간 나를 뛰어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호가 나보다 강해진다고? 그건 좀 기분 나쁜데.'
좀 더 적극적으로 강해져야 하나?
박수호는 붉은색성 공격 작전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솔직히 별 관심 없어서 설렁설렁 들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구의 붉은색 성에서 나오는 놈들을 처리하는 게 전부니까. 나머지는 박수호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사흘 뒤에 붉은 성을 공격할 예정이에요."
"사흘 뒤. 알았어."
사흘 뒤.
나는 건물 옥상 난간에 등을 기대며 붉은색 성을 쳐다봤다. 붉은색 성은 사흘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커졌다. 붉은색 성이 점점 지구로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건 헌터 협회는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이 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박수호는 이 성이 여기에 있는 걸 잘도 발견했군. 우연히 발견한 건 아닐 테고 특별한 능력이 있나?'
박수호는 용사다.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
용사니까 빨리 강해져서 악신을 처리해줬으면 한다.
'나보다 강해지지는 말고.'
악신, 브라마센 새끼는 안 그래도 나를 인식하고 있다. 내가 자기 일을 몇 번이나 방해한 것도 알고 있을 테니 기회가 되면 날 죽이려고 할 것이다.
콰아앙!
붉은색 성에서 폭음이 들렸다.
‘시작했나.'
힐곳. 눈동자를 굴려 옥상 아래를 바라본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은 폭음을 듣지 못한 듯 차분히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찬 화련비도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붉은색 성의 입구를 노려봤다.
콰아앙! 쿵! 콰쾅!
폭발음이 더 커지고 있었다.
나는 몸을 긴장시켰다. 붉은색 성 안쪽에서 입구로 나오려는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이 힘차게 열린다.
튀어나온 것은 피에 젖은 회색 옷을 입은 남자였다. 붉은색 피부, 베죽한 이빨, 머리카락 대신 가시같은 것이 돋아난 머리, 두 눈은 새빨간 괴물이었다.
“브라마센의 사제군."
“네놈은 또 뭐냐?!"
괴물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괴물의 말을 지껄인다. 광기에 의해 이성을 잃지 않았다. 브라마센의 사제라는 증거였다.
나는 화련비도를 꺼내 그를 가리켰다.
"건방진 놈! 지금 네놈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 살려줄 테니 당장 꺼져라!"
"내가 왜 여기에 죽차고 있었겠냐. 거기서 나오는 놈을 죽이기 위해서지."
뇌천류(雷天流) 뇌섬(雷閃).
화련비도를 허공에 휘두른다. 붉은 전격을 품은 푸른 검기가 놈을 향해 걸어갔다. 놈은 다급히 팔을 들어 검기를 막았다.
검기는 놈의 팔을 끊어내지 못했다.
“어지간한 몬스터의 몸보다 더 단단하군. 괴물 새끼."
"신께서 내게 하사하신 육체다. 고작 그딴 공격으로 오오옷?!"
오만하게 말하던 놈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무릎 꿇었다. 양손을 하늘을 향해 들올리고, 두 눈동자는 뒤로 넘어간다.
“브라마센께서! 브라마센께서 내게 속삭이셨다! 네놈을 이곳에서 죽이라고! 네놈이야말로 우리 최대의 적이라고!"
나는 양손으로 칼을 잡았다.
이질감이 느껴지더니, 브라마센이 놈에게 강림한 것 같았다. 그리고 브라마센은 놈의 눈을 통해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놈은 너다. 너를 거둬가겠다."
“그 전에 네놈이 죽을 거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며 놈에게 달려갔다. 순식간에 놈의 앞에 당도한 나는 망설임 없이 놈의 머리에 칼을 휘두른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붉은 뇌광이 번뜩이며 브라마센의 사제의 몸을 양단한다.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둘로 갈라진 몸이 양옆으로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끔찍한 단면에서 촉수가 튀어나와 내 팔과 다리를 휘감는다.
-흐하하하하하!
"이런 씹."
바로 뇌전을 터트렸다. 파지지지직! 시퍼런 뇌전이 촉수를 불태운다. 촉수가 불타 사라졌다. 하지만 사제의 시체에서 새로운 촉수가 튀어나와 나를 노린다.
-오늘은 최악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년의 장난감이 생각보다 강했기에 성을 포기하려고 했다.
촉수가 사방에서 뻗어온다. 그 수만 해도 수백 개에 달한다. 칼로 촉수를 베고, 뇌전으로 태워도 끝없이 재생한다.
'저 사제의 시체를 없애야 하나?'
촉수를 피하며 접근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촉수가 내 몸을 붙잡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천심(天心)을 발동합니다. 1분 동안 지속됩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3]
내 몸을 붙잡으려던 촉수가 미끄러진다. 나는 어떤 방해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 사제의 시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팔 근육이 찢어지도록 칼을 휘두른다. 토막 내는 수준을 넘어 시체를 아예 분쇄한다.
키이이이잉.
놈의 뒤에 있는 붉은색 성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장 성가신 놈을 이렇게 만나 처리하게 됐군! 너 때문에 실패한 신위 계획을 생각하면… 아직도 열이 치솟는다. 이제 그만 죽어라. 정체모를 방해자여.
소용없었다. 손톱보다 작게 베어낸 시체 조각은 촉수가 되어 공간을 가득 채우며 감쌌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었군.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촉수의 벽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칼을 그대로 내리그으며 촉수의 벽을 베어 가르고, 내 몸에서 발생한 뇌전은 촉수의 벽을 불태웠다.
촉수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흠칫 놀랐다.
그곳은 서울이 아니었다.
땅은 칙칙한 검은색이다. 죽은 땅이었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늘은 피처럼 빨갛다.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은 없었다. 나무는커녕 흔한 잡초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나를 제외한 생명은 없었다.
‘…지옥에 떨어졌나?'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며 앞으로 걸었다.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진 않는다.
'환술 일리는… 없겠지. 절대 정신을 뚫을 수 없을 테니까.'
인벤토리에서 공간 이동 주!
서를 꺼내 찢었다. 발동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사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이곳이 지구가 아닐 수 있다는 거지.'
박수호의 문신 세계인가? 문신 세계에 이런 공간이 있나?
나는 차오르는 불안감을 느끼며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로 움직이는 생명체를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고, 동물도 아니었다.
붉은색 피부에 몸 곳곳에 뼈가시가 피부를 찢고 돋아나 있다.
'브라마센의 추종자…!'
놈은 돌아다니다가 제자리에 서서 자해한다. 돌아다니고, 자해하고, 돌아다니고, 자해하고.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반복이 깨진 것은 놈이 나를 발견하고 나서였다. 놈은 나를 보고는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놈의 붉은 눈에는 이성의 편린은 찾아볼 수도 없다. 느껴지는 건 오직 광기뿐이다.
'미친놈을 고문해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지…. 죽인다.'
뇌천류(雷天流) 뇌섬(雷閃).
검기가 날아가 놈을 베어냈다. 나는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 그놈처럼 촉수로 재생해서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시체는 재생하지 않았다. 촉수도 보이지 않는다. 발끝으로 시체를 건드려도 아무 반응 없다.
'확실하게 죽었군.'
나는 인벤토리에서 바이크를 소환해 타고 돌아다녔다. 2시간을 질주했는데 간간히 돌아다니는 브라마센의 추종자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이는 풍경도 죄다 똑같아서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이래선 몇 년이 걸려도 못 돌아가겠군.'
식량은 괜찮다.
유희 생활 어플은 작동하고 있으니까. 다른 세계에서 식량을 가져오면 된다. 내가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이딴 곳에서 살라고? 웃기지 마. 무슨 수를 써서든 지구로 돌아갈 거야.'
나는 물건 하나를 떠올렸다.
[절대 황권
1회 절대 황권을 발동한다.
절대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우주 멸망의 명령을 내린다면, 우주는 멸망할 것이다. 명령은 1분 동안 이루어진다. 그 무엇도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가격-
※주의
명령은 1분 동안만 이루어집니다.
깊게 생각하고 사용하세요.]
이걸 사용하면 바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막상 사용하려니 너무 아까운데? 그리고 이게 아니어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전지의 조각.
질문 3개의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난해한 질문이라도 전지의 조각은 대답할 것입니다. 그게 설령 아득히 먼 미래에 대한 질문이라 할지라도.
현재 사용한 횟수-2
가격 : -
※주의
유희 생활 어플과 관련된 질문은 무시됩니다.]
인벤토리에서 작은 돌멩이를 꺼낸다.
전지의 조각.
3번의 질문 중 이미 2번은 사용했고, 남은 건 1번의 질문이다.
나는 전지의 조각에 물었다.
'어떻게 해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지?'
[브라마센의 제단을 찾아 활성화하여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차원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제단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합니다.]
파사삭.
전지의 조각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답을 얻은 나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가 멈칫했다.
'그 제단이 어디에 있는데?'
질문의 답은 들을 수 없었다. 전지의 조각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무작정 돌아다닌다고 해서 발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잠깐 고민하던 나는 '뱀파이어 형사' 세계에서 가져온 최신형 드론을 하늘로 띄웠다. 하늘 높이 올라간 드론은 주변을 탐색하는 일에 적합했다.
'…찾았다. 다른 게 아무것도 없다 보니 쉽게 발견했군.'
제단에는 4명의 사제가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잘 보면 의식이라기 보다는 기도에 가까웠다. 그 주위로 브라마센의 추종자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못해도 30만 마리는 될 것이다.
저길 나 혼자 돌파한다? 미친 짓이다.
'유리아와 엘레나를 소환해도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은 1분. 저놈들을 다 처리할 순 없어.'
핵폰타을 가져와 다 쓸어버린다?
'제단까지 휩쓸리잖아. 그게 부서지면 못 돌아갈지도 몰라. 다른 방법이 없나?'
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유희 생활 어플을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확인한 유희 생활 어플 퀘스트 중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팔라딘: 악멸의 여정.
오래전에 악이 창궐했습니다.
두렵습니다.
악은 인간을 현혹하고, 기만하고, 잡아먹습니다.
인간은 악에 빠져들어 타락하며, 세상은 악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소수의 선이 이 세계를 지키려 합니다.
힘듭니다.
이 세계는 악이 너무 많습니다.
악을 뿌리는 악마들은 선을 비웃습니다.
하지만 이 참혹한 세계에 빛을 비추는 신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희망입니다. 당신은 그녀가 뿌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악을 멸하십시오.
대악마들을 처단하십시오.
어둠에 잠기는 세상을 빛으로 끌어올리십시오.
퀘스트 성공 조건: 대악마들 처단
퀘스트 성공 보상: 현신
※페널티가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