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1화 > 1471. 버려진 세계
[유희를 종료합니다.]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유희 세계에서도 현실로 나올 때는 머리가 멍한 편인데, 다크 문은 유독 그게 심하게 느껴진다.
[성유진
레벨: 84
근력: 110 체력: 110 민첩: 110 지능: 110 정력: 110 마나: 110]
[사용 가능 포인트: 18,834]
하지만 쌓인 포인트를 보면 기분이 확 좋아진다.
이번엔 포인트를 어떻게 사용할까. 행복한 고민을 이어가던 나는 이번에 포인트를 모으기로 했다.
'포인트를 더 많이 모으면 더 행복해지겠지.'
모은 포인트를 한 번에 사용하며 플렉스를 하는 거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일단 가볍게 플렉스 해볼까.'
[물
종이컵에 담긴 물입니다.
가격: 1 포인트]
1포인트를 사용해 물을 샀다.
냉장고에 가득 채워져 있는 물들을 무시하고 포인트를 소모해 종이컵에 담긴 물을 산 것이다!
물맛은 평범했다. 심지어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했다.
'크으, 이 맛이지! 사치의 맛!'
종이컵은 쓰레기통에 버리고 방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부터 하고 편한 복장으로 소파에 앉았다. TV를 시청하며 여유를 만끽한다.
볼만한 채널이 없을 때는 뉴스 채널을 틀었다.
'헌터 친화적인 뉴스가 나올 게 뻔하지. 어떤 나라에 던전 브레이커가 일어나 몬스터에게 점령당했다던가. 전투기 부대가 나서서 몬스터가 모여 있는 땅을 초토화했다던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암울한 소식을 전한다. 뉴스를 본 대한민국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들은 안전하다며 안심한다. 불안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진 않는다. 안전만 따지면 미국보다 한국이 낫다는 걸 누구나가 알기 때문이다.
-맨해튼의 한 폐건물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습니다. 던전은 순식간에 생성되어 브레이크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미국 헌터 협회는 발 빠르게 대처했으나,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속도가 훨씬 빨랐습니다. 다행히 폐건물 근처에 플라티온 길드가 있어 사상자 없이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또 인가. 요즘 이런 뉴스가 많군.'
던전이 생성되자마자 일어나는 던전 브레이크. 요즘 들어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A급 이상의 던전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A급 이상의 던전이 생성되자마자 브레이크 현상을 일으킨다? 그곳에서 쏟아질 A급 몬스터들을 생각하면 아주 끔찍했다.
뉴스가 지겨워질 때쯤에는 글로벌 OTT 사이트에 들어갔다. 괜찮은 드라마나 영화가 있나 살펴본다.
'신작 애니메이션이 나왔군.'
이세계물이었다.
'또세계물.'
일본은 현재 이세계물이 유행 중이었다. 1년 전에도 유행이었는데, 지금도 유행이다. 처음에는 나름 재밌고 신선했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하다.
'유희 생활 어플의 유희 목록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봐야지.'
그래도 장점은 있었다. 여캐는 나름 잘 뽑는다는 것이다.
"형! 여기예요!"
국밥집에 들어가자마자 박수호가 손을 들고 말한다.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맞은 편에 앉았다. 오늘 나를 부른 것은 박수호였다.
"오랜만이야. 요즘 어때?"
"평소와 같다고 말하고 싶은데… 일이 터졌어요. 형의 도움이 필요해요."
"일?"
“이쪽 일은 아니고, 저쪽 세계의 일이에요.”
나는 박수호의 소매를 힐곳 바라봤다. 문신 일부가 엿보인다.
문신 세계.
박수호는 문신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 능력 덕분에 박수호는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아마 대형 길드도 그를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인데?"
"최근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던전 브레이크 사태는 아시죠?"
"던전이 생성되자마자 브레이크 현상 일어나는 거 말이지?"
"네. 그거요. 그 원인이 문신 세계에 있는 것 같아요."
박수호가 확신하며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별 관심 없던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현실이 이 꼴이면 나도 제법 피곤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현실은 안전해야 해.'
편안하게 유희 생활 어플을 즐길 수 있도록.
“자세히 말해 봐."
"한 달 전쯤에 베로프린으로 셀브나 교단의 사제들이 찾아왔어요."
베로프린은 박수호가 문신 세계에서 다스리는 도시 이름이다.
"셀 교단?"
"네. 문신 세계에서 유명한 종교예요. 셀브나 라는 신성 왕국이 있는데, 셀 교단이 셀브나의 국교죠. 문신 세계의 모든 사람이 셀 교단이 모시는 셀브레티나 라는 여신을 믿고 있어요. 그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죠."
셀 교단에 대해선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무지개 과일을 찾는 던전에서 나왔으니까.
박수호는 국밥을 먹으며 신성 왕국 셀브나에 대한 정보를 말했다.
"베로프린을 찾아온 주교는 제가 다른 세상의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어요. 베로프린에서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죠."
"인정했어?"
“네. 발뺌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딱히 절 적대하는 것도 아니었고…. 제 능력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들을 수 있었어요."
주문한 돼지국밥이 나왔다. 박수호는 쉬지 않고 숟가락을 놀렸다. 박수호는 이 국밥집을 좋아했다. 본인 말로는 가격도 착하고, 맛도 착한 가성비 최고의 국밥이라고 한다.
"궁금하네. 네 능력에 대한 비밀이 뭐야? 알려줄 수 있어?"
“이게 잘 믿기지 않는데… 제가 셀브레티나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라고 하네요."
"용사라. 게임 같은 이야기네. 왜 선택 받은 지는 알고?"
"아무 먼 옛날에 문신 세계에는 악신과 싸운 용사들이 있었다나 봐요. 용사들은 힘을 합쳐 악신을 물리쳤는데, 마지막에 실수가 있었는지 다른 세계로 떨어졌다고 해요. 그리고 제 조상님 중에 그 용사가 있다네요."
"믿을 수 있는 말이야?"
“제 능력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믿지 못할 이유는 없죠."
그렇게 따지면 내 능력부터가 믿기지 않는다.
“용사들이라고 했지? 그럼 다른 용사의 후손도 있다는 거네?"
"네. 저 말고도 2명의 용사가 있다네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용사의 신상정보는 극비래요. 악신에게 알려지면 바로 노려진다네요.”
“그 주교는 네게 바라는 게 있었을 거야. 그렇지?"
“셀 교단은 제가 용사의 의무를 다하기를 원해요. 그 대가로 셀 교단은 저와 베로프린을 지원해주기로 했죠.”
"받아들였어?"
"받아들였어요. 셀 교단의 지원이 있으면 베로프린은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베로프린의 발전은 제가 강해지는 길이기도 하고요."
박수호는 셀 교단이 지원해주기로 한 것들을 말했다. 지원이 상당히 대단했다. 내가 박수호였어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말해봐. 뭘 도와달라는 거야?”
"베로프린 근처에 악신의 성이 나타났어요. 악신의 사제들이 그 성에서 의식을 진행하고 있어요. 셀 교단은 제가 악신의 의식을 방해하고, 성을 함락시키기를 원해요."
"네가? 셀 교단은 뭐하고?”
“그 성을 인식하고 있는 게 셀 교단 내에서도 몇몇뿐이에요. 섣불리 군대를 파견했다가 다른 왕국과 마찰이 일어나죠. 다른 왕국 사람들은 아예 성을 인식하지 못하니까요."
“그 성을 공략하는데 도와달라는 거네. 꼭 해야 해?"
“악신이 가진 권능 중 하나가 차원 침식이에요. 초대 용사들이 다른 세계로 강제로 이동하게 된 것도 이 권능 때문이죠. 그리고 이 의식을 계속 내버려 뒀다간… 문신 세계와 지구가 이어져 버릴 거예요."
"이어 진다라…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그게 뭔데요?"
"그 뭐냐, 다른 세계와 지구와 뒤섞이는 판타지 세계에서 자주 나오는 설정 있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비슷해요. 지구의 문명과 문신 세계의 문명이 충돌하게 되고… 높은 확률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겠죠. 세계의 혼돈은 악신이 노리는 바예요."
“던전이 나타나자마자 브레이크 현상을 일으키는 게 그 의식의 영향이고?"
"네. 형은 이해가 엄청 빠르시네요. 게다가 침착하시고요."
“아니, 뭐…. 신기하거나 익숙한 일을 겪는 건 익숙해서. 내가 뭘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 거야?"
"형. 일단 국밥 먹고 저 좀 따라와 주세요. 이건 직접 보면서 이야기 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그래. 근데 너 국밥 엄청 좋아하네."
"국밥은 완벽한 음식이니까요."
박수호는 자랑스럽게 말하며 뚝배기를 들고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아저씨같았다.
국밥을 먹은 우리는 박수호의 차를 타고 압구정으로 향했다. 박수호는 국산 차를 몰았다. 덜덜거리는 소음이 나긴 했지만 심하진 않았다. 중고차. 그것도 7년 이상 된 차였다.
“…뭐야 이거."
차에서 내린 나는 입을 벌리며 경악했다. 눈앞에 비상식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5층짜리 건물 위에 붉은색 성의 일부가 부자연스럽게 얹어져 있었다. 성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풀풀 풍긴다.
"어, 바로 보여요?"
"잘 보여. 지나가는 사람들은… 시선도 주지 않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거야?”
"보통 사람들은 못 봐요. 형한테도 셀 교단이 준 성물로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성물은 필요 없겠네요."
"난 왜 볼 수 있는데?"
“그, 글쎄요. 형도 문신 세계에 이동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박수호가 말을 더듬었다. 그도 이유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몇 가지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박수호가 말하는 악신. 그러니까 나와 브라마센은 엮인 게 몇 가지 있지. 한 번은 지구에 직접 본신을 드러내서 지구가 위험할 뻔도 했고.'
30일 회귀권이 아니었으면, 이 세계는 놈에게 당해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용사인 박수호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고, 다른 2명의 용사들도 박수호와 비슷하다면… 이 세계는 답이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박수호를 도와야 한다.
이 세계가 씹창나는 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협회에 도움을 구하는 방법도 있잖아."
“협회는 못 믿겠어요. 협회가 쉽게 제 말을 믿을 리도 없고…. 제 능력을 알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요. 문신 세계에 대해 알게 되면 침공을 생각할지도 모르죠."
이해 가는 말이었다.
헌터 협회가 문신 세계의 존재를 알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어떻게 해서든 수작을 부리려 할 것이다. 헌터 협회가 알면 미국도 알게 될 테고….
'일이 더럽게 복잡해지는 거지.'
나는 붉은 성을 바라봤다. 지금은 성의 일부만 나타나고 있다.
“침식 던전 같군. 저 성안에 악신의 사제들이 의식을 치르고 있단 말이지?"
"네. 악신은 달리 광기의 신이라고도 불러요. 광기로 몬스터로 조종할 수 있어요. 언제 저기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아요. 아마, 지금도 몬스터를 내보낼 수 있을 거요? 의식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아서 얌전히 있는 것뿐이죠.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내가 뭘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