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0화 > 1470. 다크문
유리아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갔다.
미리 불러 놓은 마차가 입구에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들이 타는 화려한 마차였다. 말은 얌전했고, 마부는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목적지가 프리우드 백작가 맞으시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말한 나는 기계 말이 아닌 진짜 살아 있는 말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살아있는 말은 기계말에 비하면 그 무엇하나 뛰어날 것 없다. 늙으면 죽지, 사료는 꾸준히 먹여야 하지, 병에도 걸릴 수 있고, 기계말 만큼 오래 달리지도, 힘을 내지도 못한다.
그러나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가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귀족들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살아있는 말이끄는 마차를 애용했다. 그것이 네오 런던의 멋이고, 귀족 문화였다.
나는 유리아가 쉽게 마차에 오르도록 손을 잡아주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사용인에 불과합니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괜찮아. 그리고 내겐 너도 레이디야."
우리가 타자마자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 내부는 조용했다. 덜컹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네오 런던의 발전된 기술력은 말이 아닌 마차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이 도시는 신기하다. 미래적이면서도 낡았다. 기술을 발전시키면서도 오래된 문화를 고집한다. 시민들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신분제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네오 런던은 모순투성이의 도시 국가였다.
"네오 런던의 귀족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꽤 긴장되는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은 잘하실 겁니다."
머릿속으로 귀족의 예법을 떠올리는 사이, 마차는 프리우드 백작가에 도착했다. 창문을 본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역사나 판타지에서나 볼법한 귀족 저택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하게 크군. 보안도 보통이 아니다. 결계까지 있고… 자세히 보면 전부 최신식이군.'
네오 런던의 귀족들은 기계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게 기계를 배척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사용한다. 그들이 정말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건 인공지능이니까.
유리아가 먼저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나는 뒤이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매너와 여유는 신사의 미덕이다. 급하게 움직여선 안 된다.
"유진 마이어 님. 프리우드 백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집사장인 헤르만이라 합니다."
마차 앞에 선 집사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자세, 복장, 목소리 등등 어딜 흠잡을 곳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가진 힘을 확인하고 조용히 경악했다. 집사장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프리우드 가의 집사장께서 직접 마중 나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마이어 님은 마님의 초대를 받으신 손님이십니다. 저의 업무 중 하나가 마님의 손님을 직접 모시는 것입니다."
"극진히 대접해주니 기분 좋군요. 제 수행인이 1명 있습니다. 저녁 만찬에서 그녀가 직접 제 시중을 들 것입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작 부인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요. 유리아."
"네. 주인님. 상자는 챙겼습니다."
집사장 헤르만을 따라 정원을 걸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녹색이 가득했다. 화단에는 화려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화단에 심어져 있는 꽃들은 제각각 달랐다. 관리하기 힘들 것 같다.
정원사를 발견했다. 메이드 복을 입은 그녀는 1m가 넘는 커다란 가위로 신중하게 나뭇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3급. 아니, 4급인가…? 나뭇가지가 아니라 사람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여자군.'
그 외에도 여러 집사와 메이드를 발견했다.
'한 명, 한 명이 범상치 않아. 어지간한 군부대는 상대도 되지 않겠군.'
저택 내부도 대단했다.
화려함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더 놀라운 건 최소 수천만 크레딧에 호가하는 물건들이 복도에 아무렇지 않게 장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리우드 백작가가 부유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다.
'찾아오는 손님의 기를 죽이려고 일부러 저렇게 장식해두었겠지.'
좀 기가 죽긴 했다.
접견실에 도착했다.
헤르만은 화려한 문에 조심스레 노크했다.
"마님. 마이어 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게."
빠르게 접견실을 스캔했다.
방은 당연히 화려했다. 예상했던지라 놀랍지도 않았다. 놀라운 건 프리우드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금발은 반짝였고,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고왔다. 보석으로 장식된 하얀 드레스는 얼마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녀는 와인색 털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지만, 드러나는 코와 녹색 눈만으로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미녀인지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적지 않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외모는 20대 초중반이군.'
그녀의 귀는 뾰족했다.
엘프.
정확하게는 엘프 인자(因子)를 가진 인간이다. 그것도 선천적인 인자.
헤르만은 백작 부인의 뒤에 가서 섰다. 나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예법에 맞게 인사했다.
"유진 마이어입니다. 용병 일을 하며 작은 음식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유 치킨 말이군. 그곳에서 판매하는 치킨이 맛있더군. 코리안 치킨이라고 했던가?"
"네. 고대에 있었던 국가인 그레이트 코리아의 요리를 재현했습니다."
"나는 가르메리아 프리우드네. 내 남편이 이 가문의 주인이지. 앞에 앉게."
그녀의 맞은편에 천천히 앉았다.
"뜻밖이군."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까지 수많은 용병을 만나봤지. 그러나 그대처럼 예를 차릴 줄 아는 용병은 2~3명이 전부였지. 그들 모두 집사 출신이었지만 자네는 그것도 아니지 않나."
"네. 저는 이방인입니다. 네오 런던의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배웠습니다. 무례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군요."
"내 사촌 손자 녀석보다 더 예의 바르더군. 누구한테 배운 건지 몰라도… 아주 잘 배웠어."
그녀는 내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왜 5급 마법사가 용병 노릇을 하느냐부터 시작해서, 네오 런던에 정착한 이유, 네오 런던에 오기 전에 했었던 일 등등. 성가신 질문도 여럿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들었다. 고메즈 클리닉의 모녀와 서큐리티들을 죽이고 런던 가드들에겐 내 이름을 썼다지?"
나는 바로 머리를 박았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때는 백작 부인의 드레스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약간 불쾌하긴 했으나, 드레스가 멀쩡하니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이나 설명해보게. 그대에게서 재밌는 냄새가 나는군."
그녀의 녹색 눈이 반짝이고, 뾰족한 귀가 쫑긋거린다.
학살자에 대한 혐오나, 두려움은 없다. 그저 호기심만 있을 뿐이다.
'유리아가 말했던 대로군.'
마차를 타고 오면서 유리아가 말했다. 프리우드 백작 부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귀족은 시민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던 관심 없다고. 관심을 갖는 순간은 자신들이 손해를 봤을 때패라고.
나는 이번 일을 처음부터 요약했다. 블루 디스토션을 들고 고메즈 클리닉을 찾아간 것, 라나 고메즈의 조건으로 프롱 갱단을 토벌한 것, 프롱이 디로이드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서는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털부채를 접으며 짜증스럽게 탁자를 때렸다.
“디로이드의 전투기가 네오 런던에 나타난 게 그 때문이었군. 인류의 배신자…!"
“놈은 제가 비장의 수를 써서 처리했습니다."
“계속 말해보게. 고메즈 클리닉에선 왜 그 난리를 친 건가?"
“그들은 카발리아 인더스트리에 저를 팔아넘기려고 했습니다. 카발리아 연구소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으음. 들어봤지…. 추악한 실험을 진행한다지. 고메즈 모녀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건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고메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는 유리아를 쳐다봤다.
“드레스를 보고 싶구나."
나는 유리아에게 손짓했다. 유리아가 다가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는 유리아의 움직임을 보고 감탄사를 흘렸다.
"뛰어난 메이드다. 행동에 기품이 서려 있구나. 사용인을 보면 주인을 알 수 있다고 하지. 그대의 품격이 느껴진다."
"감사합니다, 부인."
"메이드는 어떻게 고용했지?”
“네오 런던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빈손으로 네오 런던에 온 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녀에겐 경력이 필요했습니다."
“메이드 등급은 어떻게 되지?"
백작 부인이 유리아에게 물었다. 유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의연히 대답했다.
“자격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경력을 채운 뒤에 자격증을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래? 우리 가문 아래에서 경력을 쌓지 않겠나?"
“죄송합니다, 부인. 제 주인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충정이 보기 좋구나. 유진 마이어, 미안하다. 보다시피 좋은 인재를 보면 이성을 잃기도 한다."
전혀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상자가 열리고 드레스가 드러났다.
겉으로 보기에도 화려한 드레스지만, 마법을 발동하자 더 화려한 드레스가 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을 드레스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솔직히 이게 마법으로 만들 필요가 있나 싶은 드레스지만….'
귀족의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드레스를 보던 백작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빛이 옅군. 헤르만. 수선사를 구할 수 있겠나?"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만, 파티가 열리기 전에 수선되리라고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에 안 들지만 이대로 입어야 하나."
마법 드레스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수선해드릴 수 있습니다. 빛을 강하게 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대가? 나는 마멉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 이 드레스는 간단해 보여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여기 별자리가 보이나? 별의 밝기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네. 그렇죠. 잘못하다가는 밸런스가 아예 무너질 테죠. 하지만 저는 자신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진 않겠습니다. 이 드레스의 주인은 부인이시니, 부인이 선택하시지요."
촤악!
그녀는 부채를 펼쳐 살랑살랑 움직이며 고민에 빠졌다.
"…그대에게 한 번 맡겨보지. 나를 실망 시키지 말았으면 좋겠군."
"예. 드레스를 제게 건네주시겠습니까?"
드레스를 받은 나는 아스트랄을 개방하고 찰나를 사용했다. 드레스에 새겨진 마법 구조를 확인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긴했다. 그러나 그건 마법 보안을 위해 걸어 놓은 락에 가깝다. 하나, 하나 따져보면 그리 복잡하지도 않았다.
마나가 움직인다. 내 의지를 담은 마나가 드레스의 마법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나는 별빛의 밝기를 올렸다.
“이 정도 밝기면 되겠습니까?"
"…호오. 단숨에 마법을 이해하고 장악한 건가? 대단하군. 좀 더 밝기를 올려주게. 음. 그 정도가 좋겠군. 이 일의 보수는 그대에게 지급해주겠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일은 부인께 표하는 저의 호의입니다."
"호의는 받지 않는 주의다만… 이번 일은 기억해두지. 헤르만. 요리는 준비되었나?"
"네. 만찬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10m가 넘는 식탁을 가득 채운 요리들을 마주했다. 맛은 뛰어났다. 과연 귀족의 식사다.
편하게 식사할 수는 없었다. 지켜야 할 예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법을 신경 쓰며 먹으려니 체할 것 같군. 콜라가 먹고 싶다.
만찬을 끝내고 인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헤르만. 어떻게 생각하나?"
백작 부인은 홍차를 마시며 집사장 헤르만에게 물었다.
"평범한 용병은 아닙니다. 그에겐 기품이 있었습니다."
"5급 마법사가 평범할 리 없지."
원래는 유진 마이어를 불러 윽박지르며 죄를 물으려고 했었다. 밀라 고메즈는 괜찮은 디자이너였으니까. 그러면서 어르고 달래어 끌어들이려고 했다. 5급 마법사를 휘하에 두면 편리할 테니.
하지만 직접 본 유진 마이어는 달랐다. 격식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청은발의 메이드에게도 시선이 갔다.
"기사 수련원 출신의 메이드라지? 어떻게 생각하나?”
"빈틈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서늘하더군요."
"쿼터 등급인 자네가? 그렇게 강했나?"
“어떻게 들릴 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는 강하지 않았습니다. 잘해봐야 3급. 예. 지금은 아직 그 정도 수준이군요. 하지만 저는… 그녀를 온전히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이라고 할 수밖에…."
"자네가 그렇게 고평가하는 메이드는 처음이군. 더 탐나는데…. 프리우드 가문으로 데려올 수 있겠나?"
“그녀의 충정은 진실합니다. 억지로 데려오더라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이긴 하더군. 유진 마이어는?"
“마법적으로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사업 쪽으로도 수완이 좋습니다. 이대로만 계속 간다면 용병계의 건물이 될 것입니다."
“사업 쪽은 거물이 되기 부족하다는 말인가?"
"지금 판단하기엔 너무 이른 듯합니다."
“으음. 두 사람 모두 갖고 싶지만…, 지금은 조용히 지켜보도록 하지. 거물이 되면 자연히 다시 마주치게 되겠지."
[유희를 종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