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8화 > 1468. 다크문
수술실로 들어온 나는 긴장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반적인 수술실은 당연히 아니었다. 수술실하면 흔히 떠올리는 장비들이 없었다. 메스도 없다.
"긴장할 필요 없다. 수술실이라 부르지만… 메스로 살을 찢고, 내장을 주물럭거리는 수술은 아니니까."
“…마나 로드는 어떻게 수복하는 거지? 비술을 가르쳐 달라는 건 아니다. 대략적인 수복 방식에 대해 알고 싶군.”
"마법사의 마나 로드는 육체의 장기나 신경 같은 게 아니다. 흑마법사는 다크 홀이라는 특수한 장기를 가지고 있지만, 평범한 마법사는 그렇지 않지. 정신의 확장… 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트랄을 중심으로 가상 신경이라 할 수 있는 마나 로드를 만든다. 이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거다."
"마나 로드는 정신 신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더군."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마나 로드 자체가 정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아스트랄을 개방하는 것도, 마나 로드를 활용하는 것도 전부 의지다. 정신 신경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부서진 마나 로드를 수복한다는 건… 마나 로드도 만들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다르다. 네 마나 로드는 부서졌을 뿐이지 사라진 게 아니지 않나. 내가 하는 건 수복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닌, 원래 있던 마나 로드의 흔적을 설계도 삼아 길을 만드는 것뿐이다. 건물로 치자면 기초는 이미 다 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지."
“대충 알겠다. 마나 로드를 수복한다는 건… 내 정신을 건든다는 말인가?"
"정신 자체를 건드는 게 아니다. 정신에서 뻗어 나온 잔가지에 손을 쓴다는 느낌이지. 왜 두려워졌나? 하기 싫으면 관둬도 상관없다."
꺼림칙 한건 사실이었다.
원작 게임에서는 획하고 한순간에 끝나 버리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하지만 마나 로드는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수복해야 한다.
"하겠다."
"수술대에 누워."
수술대에 누웠다. 천장에 있는 조명을 바라본다.
익숙한 좆같음이 스멀스멀 기어온다. 마나 진액을 투여받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라나 고메즈는 수술대 옆에 있는 기계들을 조작한다. 기계는 조용히 가동했다. 그녀는 전극 2개를 내 이마와 관자놀이에 붙였다.
"뭐하는 거지?"
"정신을 안정화하는 기계다. 간단히 말해 마취다. 마나 수복 중에 네 의지가 마나 로드에 영향을 끼치면 수복이 힘들어 질테니까. 한숨 자라. 그럼 네 16개의 마나 로드는 전부 수복되어 있을 거다."
"……."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마취가 되는 느낌이 아니었다.
“정신이 지나칠 정도로 긴장해있군. 네 장신 방벽이 뛰어나다는 건 잘 알겠으니, 긴장 풀어라. 정신 방벽을 열고 파장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자라. 일을 끝내고 바로 왔으니 피곤할 테지."
몸에서 힘을 풀었다.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 파장인가 뭔가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러자 전극을 통해 무언가가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려는 게 느껴졌다. 이게 그녀가 말하던 정신 파장임을 알았다.
'이제야 느껴지는군. 정신 파장이 약한 건가? 이런 거로 마취될 수 있나?'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약으로 마취하는 편이 더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골치 아프군. 보통은 10초면 뻗어 버리는데….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마라. 천천히. 호흡에 집중해라. 정신 파장을 받아들여라."
라나 고메즈의 높낮이 없는 평탄한 목소리가 편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졸려오기 시작한다. 아마 이게 정상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호흡에 집중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의식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흔들림 없고, 온도 좋은 물속이다. 수영장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노곤하다. 그런데 물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니었다. 바깥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왔나. 늦었다. 빨리…."
"엄마. 이건… 진짜…."
"…믿어. …보좊…."
"마법사는… 카발리아….”
“시작….”
띄엄띄엄 들리는 단어들.
그 중에서 내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단어가 있었다.
카발리아.
카발리아 인더스트리.
생체 실험을 밥 먹듯이 해대는 망할 기업. 이 세계에서 가장 엮이고 싶지 않은 기업 중 하나가 카발리아 인더스트리다.
'…카발리아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가라앉았던 의식이 위로 떠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의식이 선명해지며 지금 마나 로드를 수복 중이라는 걸 떠올렸다. 여기서 내가 완전히 각성해버리면 수복이 실패할지도 모른다.
대신에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들렸다.
“아 씨. 마나 로드가 16개나 박살 나? 귀찮아 죽겠네!"
"밀라. 보조에 집중해라.”
"딱히 상관없잖아. 딱 봐도 이놈은 과부하 때문에 마나 로드가 망가진 것 같은데… 이 정도는 엄마에겐 흔한 손님이잖아."
"흔한 손님이 아니다. 나는 이 가게를 몇십 년 동안 운영하면서 이런 마법사를 본 적 없다. 마나 친화력의 잠재력은 못해도 9급 이상, 마나 감응력 또한 8급 이상이다."
"뭐야, 그거. 그냥입 발린 소리지? 그런 재능을 가진 괴물이 있을 리 없잖아."
"네 눈앞에 있지 않나. 카발리아에게 연락은 해뒀다. 우린 카발리아에게 이놈을 팔고 프리셀 왕국으로 간다."
"알지? 난 내 커리어를 다 팔고 엄마를 따라가기로 한 거야. 약속은 꼭 지켜."
"약속을 지켜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카발리아 쪽이다. 그리고 카발리아는 약속을 지킬 거다. 놈들 입장에서 100억 크레딧과 프리셀 왕국의 귀족 작위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이놈도 참 불쌍하네. 어쩌다 엄마같은 여자한테 걸려서는…. 마법 천재의 비극이란 걸까? 엄마는 미래의 대마법사를 죽였어.”
"헛소리 말고 일에나 집중해라. 마나 수복을 전부 수복해 놓아야 제값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8번 마나 로드에 투입한 블루 디스토션 가스는 안정화됐어."
"8번 마나 로드는 보정만하면 되겠군.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내가 잠깐 이 일을 그만두긴 했어도 엄마 밑에서 보조만 십몇 년은 했어. 이 정도는 껌이지."
"정신 상태는 어떻지?"
"왜? 일어날까 봐 쫄려?"
“다른 마법사들보다 정신력이 보통이 아니더군. 이놈이 정신 파장을 맞고 잠들기까지 2분 넘게 걸렸다."
"헤에. 마법 재능만큼이나 정신 쪽 재능도 뛰어나다는 거네? 정신은 안정화되어 있어. 정신 파장도 최대 출력으로 올려놓고 뭘 그리 걱정하는 거야?"
"만에 하나의 안전을 가해야지. 10번 마나 로드 수복에 들어간다."
나는 열불이 치솟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 모녀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지 대화 맥락으로 알았다.
나를 카발리아 인더스트리에 팔아넘기려는 것이다.
'씨발. 개좆같군.'
라나 고메즈를 믿었다.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수십 년간 일해온 그녀를 믿었다.
'아니, 사실은 게임 속 NPC인 라나 고메즈를 믿었지. 플레이어를 배신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카발리아 새끼들과 연결되어 있는지도 몰랐고.'
게임 지식을 이용해 이런저런 이득을 보다 보니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오만이었다.
그래선 안 됐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 세계의 극히 일부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이 년들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이 여자들은 나를 제값에 팔아먹기 위해 마나 로드를 수복하고 있었다.
'…마나 로드가 전부 수복될 때까지 기다린다."
다행히도 이 여자들은 내가 반쯤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파장이 느껴지긴 하는데,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떨쳐낼 수 있는 수준이다. 이게 정신 파장의 최대 출력이라고? 정신 파장도 별거 없군.'
나는 마나 로드의 수복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건 꽤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부서진 마나 로드가 하나씩 수복되고 있다는 소식만이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마나 친화력과 마나 감응력이 높아서 수월하게 마나 로드를 수복했다. 설마 반발 작용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줄은 몰랐군."
"그건 나도 놀랐어. 보통 마나 로드 1개를 수복하면 5번 정도 반발 작용은 일어나는데…."
"밀라. 넌 여기서 이 녀석을 지켜보고 있어라. 3시간 뒤에 카발리아 쪽 사람이 오기로 했으니…."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라나 고메즈는 몸을 돌린 채 장갑을 벗고 있었고, 파랗게 염색한 머리의 밀라 고메즈는 나를보며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주춤거렸다.
"어, 엄마…!”
기존의 34개의 마나 로드와 수복된 16개의 마나 로드. 총 50개의 마나 로드가 가동한다. 마법을 순식간에 구축되어 발동했다.
[마이크로웨이브]
"밀라?"
라나 고메즈가 몸을 돌려 딸을 바라봤다. 밀라는 무언가를 말하듯이 입을 벌렸으나, 이내 그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펑하고 터졌다.
철프덕.
사방에 피와 내장이 튀었다. 밀라의 소장은 라나 고메즈의 어깨에 부딪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딸의 피와 내장을 뒤집어 쓴 라나 고메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너, 너, 이 개자식이!!"
라나 고메즈가 나를 향해 고함친다.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겨눈다. 동시에 그녀의 양팔이 펑하고 터졌다.
“아아아아악!"
나는 그녀의 손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바라봤다. 금색 막대기였다. 표면에 룬어가 그려져 있다.
"블레이즈 마법이 담긴 아티팩트인가? 압축해서 쏘아내는 방식이군. 발동했으면 꽤 위협적이었겠어."
"이, 은혜도 모르는 새끼가!"
“은혜? 지랄 좀 하지 마. 이건 정당한 거래였다. 너는 내게 너를 믿으라고 했고, 나는 너를 믿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화려한 뒤통수치기지. 카발리아에 나를 팔아? 씨발년이. 좆같은 실험체 생활을 또 한 번 겪을 뻔했잖아. 라나 고메즈. 곱게는 안 죽인다."
"전부 알고 있었다고…?"
라나 고메즈를 향해 다가갔다. 라나 고메즈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문을 향해 달렸다. 어깨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온 그녀가 소리친다.
“서큐리티! 비상 상태다! 당장 이 자식을 죽… 으아아아아악!"
라나 고메즈의 오른발이 폭발했다. 그녀의 몸이 아래로 기울여진다. 나는 그녀의 왼팔까지 폭발시켰다. 염력으로 그녀의 몸을 들어 올린다.
"젠잔, 젠장, 젠장…!"
라나 고메즈의 일그러진 얼굴을 잠깐 감상하고 있자니, 위층과 아래층에서 서큐리티가 나타났다. 나를 보자마자 방아쇠를 갈긴다. 마탄이 쏟아졌다. 그러나 내 배리어를 뚫진 못했다. 내가 마나 로드 50개를 이용해 정성을 다해 만든 배리어였다. 고작 저급 마탄 따위로 뚫릴 만한 배리어가 아니다.
"오늘 이 건물에 있는 놈들은 전부 죽는다."
오른발을 살짝 들었다가 다시 바닥을 밟았다. 발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빛났다가 사라졌다.
[일렉트릭 필드]
직후, 내 발치에서 사방으로 전류가 퍼지기 시작했다. 전류는 건물 바닥과 벽, 천장을 타고 이 건물 전체로 퍼져나갔다. 내게 총을 갈기던 놈들은 감전당해 픽픽 쓰러진다.
“그만…! 내가 잘못했다! 인정하마! 카발리아에 너를 팔아넘기려고 했다! 정식으로 사과하겠다. 이쯤 하자. 네가 원하는 건 돈이겠지. 내가 지금까지 모아둔 돈을 주마. 30억 크레딧 정도 된다. 네게도 돈이 필요하지 않나?!"
“그 정도 돈은 나도 얼마든지 벌 수 있다. 지금은 돈보다 이 좆같은 기분을 푸는 게 먼저다."
"넌 내 소중한 딸을 죽였다! 여기 있는 서큐리티들도 죽였지! 이 빌어먹을 학살자 새끼야! 여기서 끝내! 그만하자고! 널 위해 하는 말이다!"
“그냥 살려달라고 빌어라, 개같은 년아."
“……살려줄 거냐?"
"아니."
나는 라나 고메즈를 건물 2층에 매달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팔 없는 몸통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목에 밧줄이 걸린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한껏 일그러진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나는 구경꾼들 사이를 대놓고 걸었다. 나를 보며 쑥덕거린다. 라나 고메즈의 고객들이 나를 죽일 거라는 말을 지껄인다.
모조리 무시했다. 이 사건은 결국 퍼질 것이다.
‘날 사러 온다는 카발리아 새끼도 죽여버리고 싶지만… 이 난리가 벌어졌는데 올 리가 없지.'
어쨌든 속 시원해진 기분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그 누구도 내 앞길을 막지 않았다. 이 사건의 전말은 알음알음 퍼질 것이고, 나중에는 라나 고메즈가 욕을 먹게 되겠지. 고객을 팔아 먹는 라나 고메즈라고.
에이라 스트리트를 빠져나왔다.
번쩍번쩍 빛나는 경찰차 5대가 나를 가로막았다. 무장한 경찰, 런던 가드들이 위협적으로 내 주위를 포위한다.
"손들고 무릎 끓어. 이 살인범 새끼야."
큰 체격의 남자가 한 손에 쥔 검을 흔들며 내게 말했다.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들어 올렸다. 기타 케이스보다 좀 더 큰 가방이었다. 경찰들이 움찔 놀란다.
"씨발. 뭐하는 짓이야? 여기서 뒈지고 싶냐?"
“비켜라. 프리우드 백작 부인께 전해야할 물건이 있다.”
“…뭐?"
"꺼지라고 했다. 짭새."
“이 씨발 새끼가…."
"프리우드 백작 부인의 아주 중요한 물건이다."
"……."
그는 이를 빠득 갈며 주위를 둘러본다. 동료 경찰들이 모두 고개를 내젓는다.
"씨발…."
그가 비켜섰다.
나는 당당히 그의 옆을 지나쳤다.
이게 귀족의 힘이다.
단순히 이름만 언급했을 뿐인데, 네오 런던의 치안을 수호하는 런던 가드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나를 제압하고 물건을 빼앗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대단하군.'
이 도시의 지배자들이 가진 힘.
권력.
정말이지 탐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