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4화 > 1464. 다크문
E구역.
한국으로 따지면 서울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곳.
무수히 많은 관광객과 부유한 고객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구역에선 쇼핑하는 귀족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조심해야 할 건 귀족들을 빤히 쳐다봐선 안 된다는 것이다. 눈이 마주친다. 고작 서민 따위가 내 눈을 바라봐? 같은 상황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 귀족을 볼 때는 관심 없다는 듯 힐끔거리며 구경해야 한다. 아예 관심을 끄는 게 제일 좋고.
네오 런던에서 가장 세련된 번화가에도 어둠은 존재했다. 화려한 조명과 반대되듯 유독 어두운 그 거리는 에이라 스트리트라고 부른다.
한때, 네오 런던의 영웅이었던 에이라의 후손들이 사업을 벌이며 만들어진 거리다. 귀족들도 에이라를 존중하여 에이라 스트리트의 편의를 알게 모르게 봐주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귀족들의 더러운 돈이 엮인 곳이라 구태여 건들지 않는 것뿐이다.
에이라 스트리트에 발을 들이자마자 여기저기서 시선을 꽃혔다. 경계하는 눈이다.
여기선 시선에 움츠러들면 안 된다. 허세라도 좋다. 강해 보여야 한다. 그래야 귀찮은 시비를 걸지 않을 테니까.
"어이, 좆밥. 돈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우리를 일부러 유혹하는 거냐?"
낄낄 웃으며 3명의 흑인 남성이 다가온다. 팔이나 다리가 기계로 되어 있었다.
"……."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설마 에이라 스트리트에서 1분도 지나지 않아 시비가 걸릴 줄은 몰랐다.
'내 얼굴이 좆밥처럼 보이는 건가…? 굳이 힘을 숨기지도 않았는데?'
주위를 둘러본다.
용병으로 보이는 놈들은 불쌍하다는 눈으로 흑인놈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들은 내가 가진 힘을 알아본 것이다.
'눈앞에 있는 놈들이 무식한 또라이 새끼들이란 거군.'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자, 내가 쫄았다고 생각했는지 놈들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우리가 지금 돈이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야. 술을 마셨는데 술값이 지랄 맞게 나왔지 뭐야."
"씨발. 니가 여자 불러서 그런 거잖아."
“그리고 그 여자를 따먹지도 못했지."
“닥쳐 씹새끼들아. 아무튼, 말이야. 요컨대 그거야. 우린 돈이 필요해. 돈 좀 빌려줘. 10만 크레딧이면 돼.”
죽일까.
단숨에 죽여버릴 수 있다.
하지만 주위에 이쪽을 보는 시선이 많았다.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고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
'어째 경찰에 신고하는 놈이 하나도 없나.'
여기가 정말 E구역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X구역이라 해도 믿겠다.
'죽이는 건 절대 안 된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좆같지만 여긴 E 구역이야. 살인은 선을 넘는 행동이지.'
그렇다고 무시하고 도망갈 수도 없다.
이딴 놈들에게 쫄아서 도망간다? 내 자존심은 둘째치고 평판이 떨어진다. 이딴 놈들에게서 도망치는 용병에게 누가 의뢰를 맡기려고 할까.
“이 새끼 뭐야, 저능아야? 왜 말이 없어."
“돈 달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나?"
“대가리 좀 쳐볼까? 내 TV도 한 대 때리면 멀쩡해지거든."
우우우웅.
마나가 움직인다. 내 손 앞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놈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런 씨발!"
“마법사다!"
"살려줘!!"
놈들은 마법진을 보자마자 헐레벌떡 도망쳤다. 세 갈래로 빠르게 찢어지는 걸 보니 이것도 몇 번 경험해본 모양이다.
나는 마법을 거뒀다. 여긴 E 구역인데다가 주위에 보는 눈도 많다. 자제해야 한다.
“근성 없는 새끼들. 기분 좋게 시간이나 때우는가 싶었더니…."
“나 때는 상대가 마법사건, 기사건 간에 총부터 꺼냈는데. 요즘 새끼들은…."
“지랄 마. 너 그때 기사 앞에서 무릎 꿇고 싹싹 빌었잖아."
“새끼가. 지는 안 그런 척하고 있어."
모여들었던 인파도 사라진다. 내가 마법사라는 걸 확인해서 그런지 경계 섞인 시선도 일부 사라졌다.
"주문쟁이가 여긴 뭐하러 왔나?"
길을 걷는데 샤슬릭을 가게 주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중년 남자였다.
“그걸 내가 너한테 보고해야 하나?"
“방금 있었던 일 때문에 기분 나쁜 건 알겠는데…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마. 난 너한테 도움을 주려는 거라고, 여기 처음이잖아. 길 잘 아나?"
“…고메즈 클리닉을 찾아왔다."
"고메즈 클리닉을 찾는 마법사? 알만하군. 마나 로드가 씹창났나 보네? 근데 용케도 마법을 쓰는군. 어쩌다 그 꼴이 됐지?"
“선 넘지 말지."
“그냥 궁금해서 그래. 알려주면 샤슬릭 하나 공짜로 줄게. 대충 말해줘도 돼."
"……개새끼 하나 조지다가 이렇게 됐다."
"개인적인 복수?"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식 웃더니 내게 샤슬릭 꼬치 하나를 건넸다.
“고메즈 클리닉은 저 길로 쭉 가면 파란색 기둥이 보일 거야.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고메즈 클리닉이라 적힌 건물이 나와."
"알고 있다. 설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왔을까. 샤슬릭은 엿같군."
“음. 자두 소스를 끼얹은 샤슬릭은 영 별로인가…. 신메뉴 개발은 어렵군.”
나는 손에 쥔 샤슬릭을 그에게 던져주고 고메즈 클리닉으로 향했다. 샤슬릭을 파는 이놈은 아마도 정보원일 것이다. 정보상에게 내 정보를 팔려고 한 거겠지. 그 따위 정보를 얼마나 사줄지는 모르겠지만.
고메즈 클리닉에 도착했다. 카운터에는 생긋새긋 웃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저희 클리닉은 처음이신가요?"
“라나 고메즈를 만나고 싶다."
"원장님이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원장님은 특별한 손님만 받으십니다."
"5급 마법사다.”
“……특별한 고객님이시군요. 원장님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 마침 원장님이 한가하셨네요. 4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코를 킁킁거렸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났다. 원장실에 노크했다.
“들어와."
문을 연다.
책상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60대로 보이는 노인은 늙었지만, 낡은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날카로운 인상의 그녀는 안경테를 매만지며 내게 말했다.
"퇴마 법사께서 오셨군. 앉아."
"……퇴마 법사?"
“이틀 전, 다크 문이 떴을 때 한 마을의 귀신을 싸그리 소탕했다며?"
"벌써 소문이 돌았나…."
그때, 날이 박을 때까지 귀신을 찾아다니며 죽여댔다. 처음에는 달려드는 놈들이 귀찮아서였고, 도중부터는 마법을 시험하면서 흥이 돋았다. 그 모습은 CCTV에 고스란히 찍혔고, 그날 오후에 런더 가드에서 보상금으로 50만 크레딧을 받았다.
"마나 로드가 문제지? 날 찾아오는 마법사는 그런 놈들밖에 없지."
"확실하게 찾아왔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마나 수복을 위한 재료가 없어. 다른 재료는 다 있는데, 블루 디스토션이 문제야. 다크 문이 떴을 때만 피는 꽃이라 수량이 한정적이야."
“이틀 전에 다크 문이 떴다."
“블루 디스토션은 다크 문이 떴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꽃이 아니야. 재배도 불가능하지. 다크 문이 뜬 날에 꽃을 채집하러 다니는 놈들이 많을 것 같나?"
“그래도 물량은 조금씩 들어오고 있어. 너보다 먼저 온 놈들도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니, 예약이랑 검진만 하고 가. 네 차례가 오면 내가 연락하지. 상황에 따라 3개월 보다 더 걸릴 수 있어. 꼬우면 다른 가게를 찾아가던가."
나는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순간 공기가 긴장된다. 그녀가 손이 책상 아래로 향한다.
"싸우려는 거 아니다. 협박할 생각도 없다."
“그럼 뭐야?"
"블루 디스토션. 내가 가지고 있다.”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그녀는 상자 뚜껑을 열고 경악한다.
"블루 디스토션의 꽃잎! 이렇게 많이 모았다고? 못해도 5,000 장은 될 것 같군!"
"거래하자. 당장 마나 수복을 받고 싶다. 대가로 블루 디스토션 500장을 주지."
"날강도가 따로 없군. 겨우 500장으로 마나 로드 수복비를 받겠다고? 마나 로드 하나 수복하는데 5,000만 크레딧이다."
"500장은 순위를 올려주는 대가다. 마나 로드 수복비는 나머지로 결제하고 싶군."
"…망가진 마나 로드가 몇 개지?”
"16개."
"5급 마법사인데 마나 로드 16개가 박살 났다라…. 왜 그렇게 침착한 거냐? 내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판에."
"쓸데 없는 소리는 됐다. 거래는?"
“이 거래는 내가 손해다. 마나 로드 16개면 8억 크레딧. 그 정도면 블루 디스토션 꽃잎 2만 장은 살 수 있지."
“살 수 있으면 말이지."
블루 디스토션을 구하기 힘드니까 내가 직접 구해왔다.
“……조건이 있어."
"뭐지?"
"갱단 하나를 없애 줬으면 한다. 네오 런던에 자리 잡은 갱단은 아니야. 네오 런던의 북쪽 도로에서 운송물을 가로채는 모양이더군."
"런던 가드가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닌가?"
"런던 가드 새끼들이 굼뜬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거지새끼들도 안다. 그놈들을 처리하고, 내 딸이 빼앗긴 물건들을 되찾아 줬으면 한다. 싫으면… 다른 수복사를 찾아보던가."
라나 고메즈의 표정은 완고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의뢰는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아쉬운 건 나였기 때문이다. 현재 네오 런던에서 가장 실력 좋고, 믿을만한 수복사는 그녀뿐이기 때문이다.
"…그 갱단이 뭔지 이쪽에서 자세히 알아보지."
"뒷배는 없다. 갱단원은 30명 정도고, 사이보그들이라더군."
"…내가 전격계 마법사라 의뢰하는 건가?"
"거기에 의뢰 달성률 100%.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 판단했지."
"어쨌든, 이쪽에서도 따로 조사해보고 의뢰를 받을지, 말지 알려주지."
“좋아. 대신 오래는 못 기다려. 3일 내로 연락해. 검진기에 들어가. 네 마나 로드 상태 좀 확인해보자."
라나 고메즈가 검진기를 가리켰다. 투박한 냉장고처럼 생겼다. 나는 한숨을 쉬며 검진기로 걸어갔다.
"옷도 벗어야 하나?"
"네 알몸에 관심 없다."
검진기 안으로 들어간다. 차가운 한기가 위에서 쏟아졌다.
'…냉장고 아닌 거 맞겠지?'
30초만에 검진기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나는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검은 바탕에 사람 형상이 떠올라 있었다. 머리 부분은 새하얗게 빛났고, 그 아래로 파란색 선들이 전신으로 뻗어 나가고있다.
“이게 내 아스트랄과 마나 로드인가?"
“그래. 아스트랄은 상태가 좋고… 마나 로드의 질도 좋군. 34개의 마나 로드가 전부 순환하고 있다."
“원래 마나 로드는 순환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게 정상이지. 하지만 마법사들의 마나 로드 절반 이상은 순환하지 못해. 그걸 순환하도록 만드는 게 내 일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호오. 어디서 시술이라도 받았나? 몸이 더럽게 깨끗하군."
그녀가 감탄했다. 아마 마나 샤워 때문일 것이다.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고도 중요한가?"
"마법사가 그걸 내게 묻는 건가? 어처구니없군."
“…마법은 독학으로 익힌지라."
"5급 마법사가 독학? 몇 번 들어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마나 로드는 이름 그대로 길이다. 길이 깨끗하고 매끈할수록 마나가 빠르게 달릴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네 34개의 마나 로드는 모두 최상의 상태다. 슈퍼카로 생각 없이 액셀을 밟고 싶어지는 길이라고."
"나머지 16개는?"
"길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박살 난 상태지. 막히고, 끊어지고, 타오르고. 어디서 마나 로드를 혹사했나 보군."
"개새끼를 죽이느라 힘 좀 썼지. 수복은 가능한가?"
"이것보다 더 심한 상태의 마나 로드도 수복해봤다. 문제없다.”
"다행이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3일 내로 연락하겠다."
"그래."
그녀는 모니터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