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6화 > 1456. 다크문
부들부들 떠는 인비저블 블레이드의 주위에서 갑자기 물보라가 일어났다.
나는 치솟는 물보라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나와 거리를 벌린 뒤였다. 기계를 덮고 있는 방수천으로 몸을 감싸고, 창문틀을 넘어갈 준비를 한다. 그녀의 양손에는 닌자도와 여우 가면이 들려 있었다.
내 실수다. 완벽한 방심이었다.
'양손도 내 시야에 있었고, 지금까지 계속 고분고분해서 완전히 굴복한 줄 알았다. 몸이 회복하기를 기다리며 굴복한 척 했던건가.'
혀를 찼다. 그러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상황은… 나빴다. 회복에 전념한 그녀와 달리, 나는 촉수를 만들고 움직이느라 마나를 계속해서 사용했다. 게다가 자지도 안 설 만큼 사정을 계속한지라 육체도 피곤했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그래도 적을 앞에 두고 내색할 순 없었다.
인비저블 블레이드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진지한 눈빛과 다르게 하반신은 바들바들 떨며 보지로 애액을 찍찍 쏘아내고 있어서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두고 보자. 이 일은 반드시 갚아주겠어."
닌자는 삼류 악당 같은 말을 남기며 창문을 넘어 도망쳤다. 방수천으로 몸을 감싼 그녀의 뒷모습은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나로서는 그녀의 뒤를 쫓을 수 없었다.
창문들에는 그녀가 남긴 액체들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도 수인을 맺지 않고 인술을 사용했다.'
닌자에겐 마법사 같은 아스트랄이 없다. 아스트랄을 중심으로 인술을 펼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무영창이라면 내가 그 기세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애초에 닌자들이 수인을 맺는 이유는 은밀함을 위해서니까.'
나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수인의 기본적인 개념은 룬 문자다. 손과 손가락으로 룬 문자를 표현하여 술식을 대처한다. 장단점이 뚜렷하다. 장점은 마나 파장을 감추고 은밀하게 마법을 발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은 수인으로 마법을 발동하는 경우 응용이 제한적이라는것.
또 다른 단점은 수인에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손가락이 뜻대로 안 움직인다. 간단한 1급 마법도 수인으로 발동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군.'
수인을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근데 이 죽일 놈의 손가락이 내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
'인비저블 블레이드는 어떻게 인술을… 아.'
조금 생각하자 깨달았다.
혀.
인비저블 블레이드의 혀는 평범한 사람보다 길고 말도 안 되게 유연했다.
'혀로 수인을 맺은 건가. 술식을 혀로 표현할 수 있다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
다만,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혀는 그녀처럼 길지도 않고, 그녀처럼 유연하지도 않다.
기술력의 힘을 발빌려 기계 혀를 다는 방법도 있지만…. 그래서는 아예 의미가 없다. 어지간한 기계는 마나 감응력을 가지지 못하니까. 설령 마나 감응력이 있더라도 기계인 이상 그 한계가 명확하다.
'저 방식은 포기해야겠군. 수인은… 나중에 쓸 일이 올지도 모르니,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해볼까.'
인비저블 블레이드의 비밀을 알아냈다. 만족감을 느끼는 찰나,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인비저블 블레이드의 보복.
'……무작정 복수하려고 찾아오진 않겠지만…. 언제 내 뒤를 노릴 줄 알 수 없다. 우선 이번 의뢰로 번 돈의 절반은 보안에 투자해야겠군.'
유리아에게도 알려야 한다. 나와 함께 생활하는 그녀 또한 인비저블 블레이드의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녀가 이 일로 나를 떠난다면 존중할 것이다.
'막상 그때가 오면… 미련 없이 보내줄 수 있을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널브러진 옷을 챙겨 입고 온갖 액체로 뒤범벅된 공장을 뒤로했다.
집에서 이튿날까지 휴식을 취한 나는 X 인력소로 향했다.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므로 발걸음은 느긋했다.
로즈는 언제나처럼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오른쪽 팔은 바뀌어 있었다.
이전까지의 기계팔은… 아니, 기계 토시는 기름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투박한 디자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오른팔은 은색의 매끈한,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이다.
"왔어? 몸은 어때?"
"나쁘지 않다."
"보수는 받았지."
"의뢰가 끝나고 바로 계좌에 꽂히더군."
"돈 많은 의뢰주니까. 그리고 의뢰주는 당신에게 만족하고 있어. 뭐, 완벽한 일 처리였던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의뢰주가 입은 손해는 없으니까.”
"3,000만 크레딧이 더 들어왔던데."
"의뢰주가 주는 보너스야. 팁이라고 생각해. 드물지만 가끔 이런 경우가 있으니까."
"인비저블 블레이드 때문이겠지?"
"맞아. 인비저블 블레이드가 배신하면서 자금에 여유가 있었을 테고…. 당신이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추적한 것도 마음에 들었나 봐. 비록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잡진 못했어도."
로즈에게서 그날의 상황을 들었다.
내가 여닌자를 쫓아가고, 카지노를 습격한 무리들. 그들은 건물을 박살 내고 사라졌다고 한다.
"흑마법사겠지. 지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 처음부터 그 사람들 심장에 기계를 심어 놓았던 모양이야. 기계가 터지면서…. 음.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당신 때문이 아니야."
"당연히 내 탓이 아니지.”
“아무튼 이번 일은 끝났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끝났다라…."
끝나지 않았다.
인비저블 블레이드가 내 목을 노리고 있다.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걱정하는 거지?"
"…일의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암살자를 적으로 돌렸지. 밤이 되면 뒷덜미가 서늘해지더군."
유리아에게 지금 상황에 대해 말했다. 유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그녀는 오히려 내 정력을 걱정했다. 그날 하루는 정력에 좋다는 음식만 먹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쥐어짜였다.
"아,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음? 인비저블 블레이드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배신에 열받은 의뢰주가 다른 이에게 의뢰를 해서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죽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있었지. 일단 인비저블 블레이드에게 의뢰를 알선해준 중개인은 바로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손절 했어. 중개인으로선 그 선택지밖에 없었을 거야.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감싸는 순간 자기 커리어가 박살 나니까. 인비저블 블레이드는 신입이니 끝
까지 감쌀 이유도 없지.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
"……그 여닌자가 중개인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건 알겠다. 그래서?"
"수습을 한 건 아크로텍스야. 아크로텍스는… 알아?"
"모를 리가. 네오 런던에서 나름 유명한 기업이잖나. 마도 공학과 기계화가 전문이고, 군에도 제품을 납품한다지?”
마도 공학에 관심을 두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기업이었다.
"인비저블 블레이드가 아크로텍스랑 관련 있더라고. 아크로텍스가 그녀에게 제품을 제공하고, 그녀는 아크로텍스 사에 전투 데이터를 제공하는 거래 관계? 내가 볼 땐 그 이상인 것 같지만… 자세히는 몰라."
"……."
내 시선은 그녀의 오른팔로 향했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으로 바뀐 기계팔. 기계를 보는 눈은 없어서 정확히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고급품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헤헤. 아크로텍스 사가 만든 기계팔이야. 기능이 엄청 많아. 이런 것도 할 수 있다고?"
로즈가 바보처럼 웃으며 서류를 향해 기계손을 쫘악 펼쳤다. 2m이상 떨어져 있는 서류가 멋대로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기계손으로 날아왔다. 염력이다.
"다른 기능도 많은데 이게 진짜 편리해. 서류를 가지러 몸을 일으킬 필요가 없어졌다니까? 간단한 염력은 팔에 내장된 연산기가 대신해 줘서 딱히 피곤하지도 않아."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내버려 두면 몇 시간 내내 말할 것 같다.
“아크로텍스 사에서 받았군. 조건은 뭐지?"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내가 관리하게 됐어."
“그런 문제아를 네가 받을 줄이야.”
"관리하기 좀 빡셀 것 같긴 하지만, 그 실력은 아까우니까. 새내기였던 모양이고, 실수는 누구나가 한 번쯤은 하잖아? 무엇보다 그녀는 아크로텍스 사와 연결되어 있어. 대기업과 연을 맺는 건 나쁘지 않아."
"만약 그 여자가 또 이중 의뢰를 받는다면?"
“그땐 기회고 뭐고 끝이지."
로즈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결코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인맥은 의회에 작게나마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다. 아마 아크로텍스 사는 로즈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부탁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여자는 네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더라. 그것도 보통이 아니던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말하기 싫으면 됐어. 그 여자가 네 목을 노리는 일은 없을 거야. 대신 골탕먹이려고 하겠지만… 그건 네가 알아서 감당해."
“그러지.”
살생결단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편해졌다.
“이번에 받은 1억 3천만. 어디에 쓸 거야? 처음으로 얻은 큰돈 아니야?"
“그러가면 이미 썼다. 공장을 샀지. 덕분에 수중에 남은 돈은 천만 크레딧도 안 된다."
"무슨 공장?"
“식품 공장. 인스턴트 코리안 푸드를 만들어 판매할 계획이다. 치킨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코리안 푸드? 고대 국가인 그레이트 코리아의 음식이야?"
"바로 맞췄다."
“…으음. 뭐, 잘 해봐."
로즈는 기대 따윈 전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내 사업이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로즈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을 나선다.
‘네오 런던 시민들에게 그레이트 코리아는 너무 생소하긴 하지.'
하지만 두고 봐라.
나는 반드시 성공해 보일 것이다.
'…문제는 돈이 더 필요하다는 거지.'
공장을 유지하는 것도 돈이고, 공장을 개조하는 것도 돈이다. 그 외에도 다른 문제도 있다. 세금이라던가, 자격 문제라던가.
'네오 런던의 공무원들이 빠졌다는 건 누구나가 잘 알지. 돈으로 기름칠을 해줘야 1년 내로 식품을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을 거야.'
그러려면 억 단위의 크레딧이 더 필요했다.
'유유 치킨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는 공장 확장을 하려면 몇 년은 더 걸리겠지.'
다행히도 내겐 전투 능력이 있었다.
이번 의뢰에 성공했으니, 돈이 되는 지명 의뢰들이 들어올 것이다.
'돈이 필요해. 마법 연구에도 돈이 들어가고, 사업 확장에도 돈이 들어가지.'
버는 족족 투자한다. 나에게. 그리고 사업에게.
그렇게 성장하다 보면 언젠간 나는 이 도시의 거물이 되어 있을 거다. 아니, 되고 말 거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는 끝났다.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비누스 교관은 목이 잘려 냉동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내 복수가 끝났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죽이고 싶은 건 비누스 교관보다 더 위쪽에 있는 놈들이다.
'애초에 비누스 혼자서 그 정도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진짜 책임자는 더 위쪽에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임자.
알파 티어 제약 회사.
프리셀 왕국의 군대와 세계적인 대기업.
그들을 상대하기엔 지금 나는 너무 작다.
‘그 새끼들도 내가 당했던 고통만큼 똑같이 당해야 해.'
내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복수를 꿈꾸며 X 구역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돌아다닐 때였다.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온몸을 감싸는 매끈한 은색의 사이버 슈트. 풍만한 가슴과 매혹적인 엉덩이와 허벅지 라인.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흑갈색 머리카락과 일본식 여우 가면.
인비저블 블레이드였다.
나는 배리어가 처져 있는 걸 확인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로즈에게 우리 일은 끝났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몰라서 물어? 내 엉덩이에 박아 넣은 물건, 그거 당장 해제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