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1화 > 1451. 다크문
"……."
인비저블 블레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우리와 따로 행동했다. 닌자라서 은밀히 홀로 움직인다? 그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다. 쥬피트의 장부를 먼저 손에 넣을 계획이었겠지. 그러다 필립 쥬피트레인이 예상보다 빠르게 대처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진 것일 테고.
그 침묵이 곧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간을 끌어서 불리한 건 내가 아니라 그녀다.
"하아."
일부러 내는 한숨 소리. 목소리가 좋다 보니 왠지 모르게 야릇하게 느껴진다.
"맞아. 이중으로 의뢰를 받았어."
“어떤 일이든 이중으로 의뢰받는 건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다."
"안 들키면 되잖아. 나는 닌자야. 들키지 않는 거에 자신 있었어."
"네 중개인은 알고 있나?"
“어떻게 생각해?"
"모르겠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중개인이라면 커리어를 박살 내다 못해 끝장내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테니."
용병은 의뢰를 받아 일한다. 그리고 중개인은 수수료를 받고 의뢰를 다루며 용병에게 알선해준다. 중개인이 의뢰로 장난질하는 순간, 이 업계에선 끝장이다. 물론 용병의 커리어도 박살 나긴 하지만… 용병은 실력만 있다면 재기할 기회가 충분히 있다.
"똑똑하네. 장부 회수 의뢰는 임무 시작 이틀 전에 받은 거야. 의뢰주는 네가 생각하는 그 인간이 맞아."
"네게 의뢰를 할 정도면… 그 의원은 필립이 카지노 지하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겠군.”
“그게 중요해?”
"…아니. 이쯤 되니 이중 의뢰를 받은 이유가 궁금하군. 왜 그랬지?"
“거창할 건 없어. 쉬운 일에 비해 상당히 큰 보수였거든. …보시다시피 너 때문에 일이 꼬였지만. 맹렬히 후회 중이야. 널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인비저블 블레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못 본 척해줄 수도 있다."
"조건은? 돈을 원해? 의뢰 보수의 3할 정도라면 줄 수 있어. 꽤 큰돈이야. 후회하지 않을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저것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치킨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아직 초기인지라 돈이 필요하긴 하나,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치킨 사업은 더 커지고 있으니. 그리고 당장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녀를 볼때마다 느꼈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인술."
“응?"
"네가 쓰는 인술에 대해 궁금하다. 내가 알기로 닌자들은 인술을 쓸 때 수인을 활용한다. 하지만 너는 인술을 쓸 때와 안쓸 때가 있더군. 마법사처럼 아스트랄을 개방했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너는 아니지 않나?"
"흐음. 그게 궁금했구나?"
여닌자가 콧소리를 내며 팔짱을 낀다. 내 시선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팔 위로 올라간 가슴은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슴 한 덩어리가 사람 머리와 비슷한 크기다. 아니, 어쩌면 더 클지도 모르겠다.
"미안한데, 내 답은 거절이야. 겨우 이런 일에 내 비밀을 팔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닌자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니야? 내가 너와 꼭 거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닌자답게 날 죽여서 입막음이라도 할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카앙!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의 칼날이 배리어를 때린다. 닌자도를 자세히 보면 칼날에 달라붙어 있는 물이 고속으로 진동하고 있다. 물로 절삭력을 높인 것이다. 그녀의 인술 중 하나로 보인다.
'또 수인 없이 인술을 사용했군.'
키이이이이잉!
배리어 한 장이 잘렸다. 저 칼날은 지금 전기톱에 가까웠다.
남은 배리어는 4장. 여유는 있다.
"……마나에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어? 그런 것치곤 배리어가 너무 단단한걸."
“여유가 없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지금의 너보다는 상태가 좋은 편이지."
“들켰네. 맞아. 아까 폭주하는 필립을 상대할 때 무리 좀 했어. 보통 놈이 아니더라고. 하지만… 널 죽이는 데는 별문제 없어."
그녀가 칼날을 역수로 쥐고 몸을 회전시켰다. 칼날에서 발생한 투명한 물의 칼날이 허공을 수놓으며 배리어를 벤다. 칼을 움직일 때마다 흩날리는 물방울들은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내가 전격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잊은 건가?'
[일렉트릭 필드]
발을 구른다. 내게서 뻗어나간 뇌전이 방안을 가득 채운다. 손가락을 까딱였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던 전류가 방향을 급격히 틀어 그녀에게 쇄도한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그녀는 닌자도를 허공에 던지고 양손으로 재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나는 1초 만에 10번 이상 바뀌는 손동작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떨어지는 닌자도를 다시 잡았다. 직후, 그녀 주위로 물기둥이 치솟아 전류를 막아냈다.
물기둥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이라고 해서 전기에 약할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마법이나 능력으로 만들어내는 물은 증류수에 가깝지.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열린 방의 뒤쪽에서 속성검이 날아와 물기둥에 박혔다. 물기둥을 꿰뚫진 못했으나, 그 냉기가 물기둥에 파고는 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물기둥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그녀는 얼음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방심하지 않고 다음을 준비했다. 저 얼음 기둥이 그녀를 오래 잡아두지 못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콰직!
얼음 기둥 중심에서 칼날이 쑥 튀어나왔다. 칼날이 진동하고, 떨림은 얼음 기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얼음 기둥은 진동을 견디다 못해 파사삭 떨어진다.
"…그것도 인술인가?"
"닌자의 비기야."
그녀에게서 막대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 농도 짙은 살기에 잠깐 몸이 움찔거렸다. 이 정도의 살기를 받는 건 오랜만이었다.
실수였다. 내가 잠깐 흠칫거리며 발생한 틈. 그녀는 그 틈을 이용해 내가 아닌 품에 쥔 장부를 공격했다. 그녀는 먼저 장부를 허공에 던졌다. 그리고 아까처럼 수인을 맺는다.
허공에서 만들어진 커다란 물방울이 장부를 삼킨다. 물방울 내부가 회전하며 장부를 찢어발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장부의 남은 조각들을 질척하게 녹이기 시작했다.
나는 헛숨을 삼켰다.
이건 내 실수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장부를 반드시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의뢰주는 장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장부가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가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니까.
장부는 이제 없다. 조각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내가 이 사실을 의뢰주에게 알려도, 의뢰주가 내 말을 믿을까? 아니면 닌자의 거짓말을 믿을까? 어쩌면 둘 다 안 믿을 수도 있다.
“장부를 먼저 빼앗아야 했군."
"빼앗을 수는 있고?"
"……."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4자루의 검을 찬 대파머리의 근육질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방안에 있는 우리를 보고 웃었다.
“여기에 있었나? 필립의 시체를 보니 임무는 끝났나 보군. 바깥도 지금 정리 중이다."
나는 귀에 찬 무전기를 뗐다. 아까부터 조용하다 했더니, 여기선 무전기도 안 통하는 모양이다.
몬스는 인비저블 블레이드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쪽이 닌자인가? 예상 이상으로 화끈하군. 괜찮은 바를 알고 있다. 같이 갈 생각 없나?"
"미안한데, 그쪽은 내 취향이 아니야. 그 근육, 너무 밀도가 높아서 징그러워.”
"그런가…."
몬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우리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물어왔다.
"무슨 일 있었나?"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지?"
여닌자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바로 밖으로 걸어갔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정말로 이것으로 끝난 건가?
의뢰주에게 장부에 대해 보고하는 게 문제 아니다.
생각해야 할 건 그녀의 보복이다. 그녀가 이대로 정말 넘어갈까?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나를 살려둘까?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오면서 보고 겪은 것 중 하나는, 이 세계에선 누군가의 치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거다. 프리셀 왕국 군대에 있을 때, 내 임무 중 몇 개는 귀족의 치부를 알고 있는 민간인을 죽이는 거였다.
‘그녀는 용병이고 닌자다. 즉, 암살자다. 신뢰할 수 없다.'
그녀 정도의 실력을 가진 닌자를 적으로 돌리면 일상이 귀찮아진다. 암살을 대비하는 건 무척 피곤한 일이다. 무엇보다 유리아가 휘말리게 될 수도 있었다.
'위험은 여기서 제거하는 쪽이….'
비밀 통로를 빠져나왔을 때, 느닷없이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헤이스트]
마법까지 사용해가며 억지로 따라붙는다. 힘들긴 해도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다. 그녀 또한 상당히 지친 것이다.
[디텍션]
시야에서 놓치는 경우가 있으면 재깍재깍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가 장비했던 사이버 슈트가 고장 난 덕분인지 바로 감지됐다.
-이봐. 갑자기 어디 간 거지? 나 빼고 둘이서 노는 건가? 좀 서운하군.
무전기에서 몬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금까지 망설인 게 잘못됐다. 그녀가 이중 의뢰를 받은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아니, 우리를 배신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 중개인까지 배신한 거다.
"닌자가 배신했다. 내 앞에서 장부를 없앴다. 덕분에 우리 임무는 절반의 성공이다. 지금 닌자를 쫓고 있다."
-지원이 필요하나? 위치만 말해주면… 이런 제길. 습격이다. …건물 자체를 부수려는 건가.
나는 어떤 상황인지 그려졌다.
"……지하에 있던 기계들을 숨기고 싶은 거겠지. 일종의 증거 인멸이다."
-평범한 갱단 놈들은 아니군.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한가락 하는 놈들이다! 물러서라. 저놈들의 목적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받은 의뢰 내용 중에 건물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은 없다. 장부는 이미 소멸했다. 임무는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몬스가 냉정하게 말했다.
용병이란 원래 그런 족속들이니 놀랍지 않다.
-다행히 저들도 우릴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는군. 동종 직업 냄새가 진하게 난다.
“지원 가능 하나?"
-미안하지만, 힘들 것 같다.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우리 인원수가 적다고 판단한 순간… 놈들이 돌변할 가능성도 있다. 너도 적당히 쫓다가 포기해라.
“알겠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훗날을 위해서라도 인비저블 블레이드는 지금 처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