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7화 > 1427. 아카데미의 구원자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뭐, 뭘 어떻게 해요?!"
당황하는 그녀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말을 이었다.
“이 교실 말입니다. 청소라도 할까요?"
내 질문에 레이첼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무안함을 떨쳐내듯 헛기침을 하고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건물의 청소는 저희의 일이 아니에요. 저희는 건물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어요. 목적을 잊지 마세요."
"확인이라… 저런 걸 보면 구교사를 확인하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요."
나는 손가락으로 벽 한쪽을 가리켰다. 이불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낡은 천이 벽에 걸려 있었다. 누리끼리한 건 물론이고 표면에 이상한 얼룩들이 잔뜩 묻어 있다. 가까이 가기도 싫다.
레이첼의 얼굴이 싹 굳어진다.
"저, 저건 또 뭐죠?!"
“천입니다. 제가 봤을 땐 이불로 이용한 천 같군요. 저 책상 침대 위에 올리고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럼 나름대로 푹신했을 테니까요."
“…저기 저 피 묻은 얼룩처럼 보이는 건…."
"피 묻은 얼룩이 아니라, 그냥 피 얼룩입니다."
"……저게 왜 벽에 걸려있는 거죠?"
"글쎄요. 버리기 귀찮아서 벽에 걸어뒀을 수도 있고, 창문을 가리기 위한 용도일 수도 있죠. 뭐, 그들의 성벽일지도 모르죠. 정확한 건 직접 물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나는 버리기 귀찮아서 내버려 둔 쪽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입장에선 어차피 여긴 쓰레기장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인적이 드물어 섹스하기 최적의 장소라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이점도 없다.
“자 이불 뒤에 뭔가가 있을 가능성은요?"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모르죠.”
"슈뢰딩거의 고양이인가요…. 학생회장으로서 명하겠습니다. 성유진 군, 당장 저 이불 뒤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네? 싫어요. 저 이불 뒤에 뭐가 있든 간에 가까이 가기 싫어요. 회장님이 확인하세요. 모범을 보이셔야죠."
"…성 군은 지금까지 학생회 일을 땡땡 쳤잖아요. 그 보충이라 생각하고 가서 확인하세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저 이불에서 코를 썩히는 오물 쓰레기 냄새가 진동했다.
"그거 직권 남용입니다. 저 뒤에 끔찍한 게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끔찍한 거…. 적어도 살아 있는 생물은 아닐 거예요. 기척은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생물보다 더 두려운 게 있을 수 있죠."
"…더 두려운 거요?"
"예를 들면… 여기 주인의 성벽과 관련된 물건이라던가요. 으. 생각만으로도 역겹네요."
레이첼도 무언가를 상상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녀는 끝까지 내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레이첼보다 먼저 앞서 나가며 말했다.
"네? 방금은 안 하신다면서요?"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농땡이를 친 것 같아서요. 힘들고 더러운 일 정도는 꾹 참고 해보겠습니다."
내 목적은 레이첼의 호감을 사는 거다. 그걸 위해서라면 더럽고 귀찮은 일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더러운 이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이불 끝을 잡고 당긴다. 이불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불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였으면 좋았겠으나, 벽에 한 장의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알몸의 남자가 개처럼 엎드려 있고, 그 등허리 위에 알몸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상체를 숙여 풍만한 가슴을 젖가슴을 과시하며 손을 아래로 내려 딱딱하게 발기한 남자의 자지를 한 손으로 꽉 잡고 있다. 여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어찌나 음탕한 지…. 하마터면 상황도 잊고 스마트폰을 꺼내 여자를 검색할 뻔했다.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지는 걸 보니 AV 배우 사진이군. 노모라는 건 좀 놀라운데. 정식으로 판매하는 게 아닌 불법 쪽인가?'
왜 이불로 벽을 가려뒀는지 알겠다. 저건 너무 잘 찍힌 포스터다. 여배우의 색기가 사진 너머로도 전해진다. 아마 섹스를 할 때 이 사진이 집중력을 너무 깼을 거다.
“히끅."
딸꾹질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레이첼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레이첼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벼, 별거 아니네요. 그렇죠? 여긴 일본이에요. AV 배우 사진 정도는 널리고 널렸죠."
“아무리 일본이라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어, 어쨌든 수고했어요. 저쪽 구석은 제가 한 번 확인해보죠. 저 네모난 건… 딱 봐도 냉장고네요."
레이첼은 내 말을 듣기도 전에 작은 냉장고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이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그녀 나름의 노력이었다.
"딱 봐도 도시락 같은 걸 넣어둔 미니 냉장고네요. 마침 목이 마르기도 하고… 마실 게 있다면 압수해버리죠. 전력은 또 어디서 끌어 오는지… 근처에 발전기가 있는 걸까요."
철컥.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도시락은 없었다. 대신 형형색색의 콘돔이 가득했다. 콘돔 안에는 모두 정액이 담겨있었다.
“히끅….”
그 양이 못해도 50개 이상이다. 물풍선처럼 콘돔이 묶여 있어서 다행이었다. 냉장 보관되어 있다곤 하나 저 정도 양이면 절반 이상이 정액 상태가 안 좋을 테니까.
"마실 거예요?"
“미쳤어요?!”
쾅!
냉장고 문을 힘차게 닫은 레이첼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직 확인하지 않은 곳을 바라봤다. 뭐가 더 나올지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왜, 왜 냉장고에 저런 걸 넣어두는 거죠?!"
“취미인가 보죠, 뭐."
“자기 정액을 보관하는 게 취미?!"
이 세상에 온갖 또라이들이 많았기에 별로 놀랍지 않은 취미다.
“그 말은 좀 아닌 것 같네요. 제가 봤을 때, 이 공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여자 쪽입니다. 냉장고도 당연히 여자가 주인이겠죠."
“…저걸 모으는 건 여자 쪽의 취미다…?"
"네. 남자가 뭐하러 정액 풍선을 모읍니까. 여자 입장에서는 전리품? 뭐, 그런 것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레이첼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녀는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빠르게 교실을 확인했다. 더 특이하거나, 이상한 것은 나오지 않았다.
“하아…. 진이 다 빠지네요. 여길 이용한 학생들은 찾아내서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어요."
"주의만으로 끝내게요? 자비로우시군요."
“그 이상의 권한은 제게 없거든요. 물론 선생님들에게 부탁해 징계위원회를 열면 되지만…. 거기까지 가고 싶진 않아요."
우리는 다른 교실들을 확인했다. 구교사 입구 근처만 유독 쓰레기가 많은 교실들이 있었다. 그 외의 다른 교실들은 조금 손을 보면 될 정도로 양호한 상태다.
처음 그 교실을 당황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뽐내며 학생회장의 면모를 선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상태가 좋네요. 청소와 일부 구역 보수만 확실히 한다면 구교사를 사용해도 되겠어요."
그녀와의 구교사 데이트도 끝이 다가왔다.
아쉬움을 느꼈다. 1시간 가까이 돌아다녔는데 럭키 스케베가 한 번도 발동하지 않았다. 불량품인가.
"수고하셨습니다, 회장님."
"성 군, 아직 그 인사를 하기엔 이른데요?”
"일이 더 있습니까?"
"구교사 옆에 체육 창고가 있어요. 거길 마지막으로 확인해야죠. 별거 없을 거예요."
"흐음."
“왜 그러시죠?"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 체육 창고에 꼭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요."
“허, 참…."
레이첼은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안 그래도 커다란 |컵 가슴이 더 두드러진다. 나는 곁눈질로 그녀의 가슴을 훔쳐봤다.
“오늘 제가 운이 좋지 않긴 했지만… 불행은 이미 끝났어요. 체육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오래된 먼지만 조금 들이마시고 끝나겠죠."
“그것도 좋은 경험은 아닙니다만."
“잡담은 여기까지. 빨리 일 끝내고 돌아가죠."
오늘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
"……."
레이첼의 호언장담은 틀렸다.
구교사 체육 창고에는 터무니없는 것이 있었다.
체육 창고 중심에 무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존재했던 것이다. 딱 봐도 꺼림칙한 지하 계단이다.
“……회장님?"
"어, 아, 네."
"원래 체육 창고에 지하 계단이 있습니까? 그것도 딱 봐도 엄청 깊어 보이는데요."
“전 구교사에게 오기 전에 그 구조를 학생회가 보관 중인 설계도를 보고 왔어요. 구교사에는 지하 공간이 없어요. 체육 창고도 마찬가지죠. 이건 누군가가 체육 창고에 계단을 만들었다고밖에 볼 수 없죠."
레이첼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럴 만한 사안이긴 했다. 이 지하 창고 아래에 A급 빌런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래로 들어가실 겁니까?"
“아뇨. 그런 만용은 부리지 않아요. 이건 돌아가서 학장님에게 직접 보고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자, 이대로 뒤돌아서가죠."
쾅!
열려 있던 창고 문이 느닷없이 저절로 닫혔다.
"…성 군?"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리고 문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은 스스로 닫혔습니다. 회장님도 봤지 않습니까."
"성 군의 장난이 아니라면…."
레이첼이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은 문에 닿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특수 던전, 음혹(淫惑)의 굴(窟)에 입장했습니다.』
『음혹의 굴의 가장 아래로 향하십시오』
던전.
레이첼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연락이 바깥과 연결할 수단이 없어요. 성 군. 정령을 이용해 바깥에 상황을 알릴 수 있나요?"
"아, 정령 소환과 역소환을 이용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역시 회장님입니다. 바로 방법을 떠올리시는군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보통 생각이 짧아지죠. 회장님 같은 사람은 드뭅니다. 일단, 회장님의 말대로 해보겠습니다. 정령을. 커헉! 컥, 쿨럭!"
나는 양손으로 몸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느닷없이 몸안에서 고통이 치밀어 올랐다. 기침을 하는데 새빨간 핏물이 쏟아진다. 체육 창고 바닥에는 순식간에 피가 고였다. 눈도 아파지기 시작했다. 시야가 빨간 것을 보면 눈의 실핏줄이라도 터진 모양이다. 코에서 액체가 흐르는 느낌이 있다. 머리 또한 어지럽고, 팔다리가 가늘게 떨린다.
'……죽겠다.'
내부가 진탕이다. 내상도 심각한 수준이다. 마나를 아에 사용하기 힘들었다. 이건 몇 시간 내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진짜 죽는다.
"성 군! 괜찮아요?! 미안해요, 제가 괜한 부탁을 해서…!"
레이첼이 서둘러 내 곁으로 다가왔다. 섣불리 내 몸을 부축하는 대신에, 나를 편하게 눕혀주었다. 그녀의 대처에 그나마
편해졌다.
'…정령 소환의 부작용은 아니야. 모카를 소환하기 전에 몸이 갑자기 병신이 됐어. 던전의 저주 같은 것도 아니야. 그런거라면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지. 원인 모를 고통과 상처. 원인을 모른다는 점에서 원인을 알 수 있지.'
나는 손목을 힐곳 바라봤다. 이놈이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성 군. 괜찮아요?"
"예, 뭐, 괜찮… 우웩! 지 않군요."
나는 피를 토하며 말을 이었다. 시야가 어질어질하다. 오른쪽 눈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도 조금 적응되니 팔다리는 움직일 수 있었다.
"……던전 입구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겠어요. 던전 공략을 시작할게요."
각오를 굳힌 레이첼이 선언한 순간이었다.
쾅.
뇌와 심장이 동시에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 저항이 발동했습니다. 앞으로 15초간 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