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0화 > 1410. 아카데미의 구원자
나는 효도 유우키와 나름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
효도 유우키는 라노벨 주인공 같은 놈이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여자가 꼬인다. 내가 노리는 여자들도 효도 유우키와 관련되어 있다. 즉, 효도 유우키의 옆에 있다면 미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거다.
"효도 유우키."
“응? 성 군. 그냥 효도라고 불러도 돼."
“아까부터 저 여자가 이쪽을 계속 노려보고 있는데… 네 친구냐?"
눈동자로 옆을 가리켰다.
녹색 머리의 여자가 이쪽을 노골적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꽤 미인이었다. 녹색 머리카락은 밝고 산뜻한 느낌이고, 피부는 한없이 투명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의 끝 부위가 뾰족한 걸 보아 엘프의 피가 섞인 거로 보인다.
물론 나는 여자의 정체를 알고 있다.
"…아. 신보 레이카야. 그, 엘프의 혼혈이긴 한데 호전성이 꽤 강해. 우리 아카데미의 입학 1위가 신보야. 같은 1위인 네게 흥미를 가진 것 같아."
“그런 것치곤 저 여자의 시선이 네게 치우쳐져 있는 것 같다만?"
"하하. 그런가…?”
효도 유우키가 곤란한 듯 웃었다.
원작을 통해 사정을 알고 있었다. 신보 레이카와 효도 유우키는 비공식적으로 대련을 치렀을 것이다. 그리고 승자는 효도 유우키였겠지.
'어떻게 해야 신보 레이카의 주의를 내게 향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효도 유우키가 그랬던 것처럼 신보 레이카와 비공식 대련을 진행할까? 압도적인 힘으로 쓰러뜨리면 신보 레이카는 내게 흥미를 느끼려나?'
곧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됐다.
수업이 지루한 건 일본이나, 한국이나 똑같았다.
아라시 아카데미에도 전공과가 존재한다.
나는 전공 시간에 효도 유우키와 함께 움직였다.
"성군. 네가 신토(神道)에 흥미가 있을 줄은 몰랐어."
"일본의 신토는 여러모로 유명하잖아. 일본에는 토지신은 모시는 신사가 많고, 그 토지신 중 대부분이 정령인 경우가 많지. 정령학과 신토는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어. 애초에 아라시 아카데미에는 정령과도 없고."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본심은 신토과에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내 계획을 위해 신토과를 이용하고.
"의외인 건 너야. 넌 검을 쓰는 검사 같은데 왜 신토과에 들어간 거야?"
"음. 이건 사실 비밀인데… 성 군한테만 말해줄게. 신토과는 다른 학과보다 꽤 여유로워서 편하거든. 그리고 신토과에 내 소꿉친구가 있기도 해서…."
“즉, 땡땡이가 목적이군."
“하하하.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하지만 마냥 땡땡이만을 위해 신토과를 선택한 건 아니야. 신토과는 조용해서 혼자 수련하기 좋은 환경이야."
계단을 올라 신사에 도착했다.
토리이라고 하던가? 붉은 나무문이 우리를 반겼다. 토리이를 지나친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오. 성 군, 느꼈구나?"
“…결계인가."
“맞아. 츠쿠요미 신사에는 결계가 설치되어 있어서 정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어."
"대단하네."
나는 작게 감탄하며 효도 유우키를 따라 걸었다.
"호오. 효도 꼬마. 웬일로 손님을 데려왔느냐."
신사의 지붕 위에 앉아 있던 텐라이 나기사 학장이 툭 하고 가볍게 땅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이은 화려한 붉은색 기모노 자락이 팔락인다. 효도 유우키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텐라이 학장님. 여기 계셨어요?"
"잠깐 산책 겸 들렸다. 넌 오늘도 이곳에서 수련할 테냐?"
"네. 써도 되죠?"
“상관은 없다만… 오로라 시뮬레이터가 설치된 훈련실을 이용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 왜 계속 여기를 고집하는 게냐?"
“하하…. 여기가 아니면 진정되지 않는다고 할까요. 왠지 여기서 더 수련이 잘 되는 것 같기도 해서요."
“…쯧."
텐라이 나기사는 효도 유우키에게 손을 내저었다.
“알겠다. 이만 가서 수련하거라. 나는… 뇌성의 아이와 이야기 좀 하고 갈 테니."
텐라이 나기사는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나는 담담히 시선을 받아냈다.
“어, 그게…. 알겠습니다. 나중에 보자, 성 군."
눈치를 보던 효도 유우키가 빠른 걸음으로 수련장으로 떠났다.
"흐음. 뇌성의 아이야. 차라도 한잔하겠느냐?"
“콜라 아니면 안 먹습니다."
차 같은 경우는 그게 뭐든 유리아가 우려주는 차가 아니면 잘 안 마신다.
"콜라 정도야 얼마든지 내어주마. 다도실이 있으니 따라오거라."
다도실에 도착했다. 텐라이 나기사는 내게 콜라 한 캔을 내어주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녹차를 탔다. 차를 우리는 솜씨가 뛰어났다. 유리아보단 못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차 한 잔 하겠느냐? 이 테란이 나기사가 직접 우려주는 녹차를 마시는 일은 이 땅의 정치가들도 쉽게 누리지 못하는 호사다."
"됐습니다. 콜라로 만족합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콜라는 역시 맛있군요."
"콜라를 그렇게 좋느냐?"
"재 입맛이 꽤 까다로워서 어지간한 건 잘 못 먹습니다만, 콜라는 괜찮습니다."
"콜라는 괜찮다고?"
"콜라는 탄산 음료계의 정점이라고 할까요. 다른 음료를 마실 바엔 콜라를 마시는 게 더 낫더군요."
"요즘 아이는 이해 못하겠구만….”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뭐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거 없다. 성하리의 아들이 궁금했을 뿐이다. 생각보다 평범해서 힘이 빠지는구나."
“제게 뭘 기대하신 겁니까?”
“다짜고짜 싸우자고 시비부터 걸 줄 알았느니라. 네 어미는 그랬거든."
“네?"
황당한 말에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젊었을 적의 성하리를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반응을 보자면 성하리가 젊었을 때는. 꽤 사고뭉치였던 모양이니까.
"효도를 따라 신토과에 온 이유는 무엇이냐? 신토에 흥미가 있느냐?"
“전 정령사입니다. 어느 정도 흥미는 있습니다."
"그럼, 이 내가 직접 신사를 안내해주마. 아, 이 녹차는 다 마시고 말이다."
그녀는 느긋하게 녹차를 마셨다.
콜라를 원샷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 신토과의 신사 이름이 츠쿠요미 신사라더군요. 혹시 제가 아는 그 유명한 달의 신을 모시는 신사입니까?"
“한국인인 너도 츠쿠요미를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 신사는 츠쿠요미를 모시는 신사가 맞다."
"츠쿠요미가 실존하는 겁니까?"
텐라이 나기사는 입가에 쓴 웃음을 지었다.
“이 세계는 온갖 신이 존재한다. 아니, 존재했었다. 신들이 사라진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는 소멸하였다 주장하였고, 누군가는 떠났다고 주장하였지. 허나 확실한 건 그들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 이 세상에는 신들이 남긴 힘이 존재하느니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왜 신사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까?”
"믿고 싶어서 믿을 뿐이니라. 그게 곧 신앙이니."
"……."
텐라이 나기사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나. 나는 구태여 너를 설득할 생각은 없느니라. 너 스스로 생각하고, 너 스스로 판단하거라. 신을 믿고 싶다면 믿고, 신을 믿기 싫다면 믿지 말거라. 너에겐 그 자유가 있느니라."
"전 직접 본 신만 믿습니다."
"그러느냐."
시시콜콜한 질문이 이어졌다. 정령은 어디서 배웠느냐, 성하리는 아직도 멧돼지처럼 날뛰느냐, 아라시 아카데미는 어떤 느낌이느냐 등등. 나는 그녀에게 대충 대답해줬다.
다도 시간이 끝나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 직접 신사를 안내해 줄 테니 따라오거라."
텐라이 나기사를 따라갔다. 그녀는 내게 신사 곳곳을 소개하며 역사를 설명했다. 재미없었다. 나는 딱히 츠쿠요미 신사 자체에 흥미가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 숨겨져 있는 물건에 흥미가 있는 거지.'
당연히 텐라이 나기사는 비밀의 공간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미 천안(天眼)으로 위치는 파악했어. 안다고 가져갈 수는 없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원작대로라면 조만간 일이 터질 것이다.
'그때 그 물건을 가져갈 기회가 생긴다.'
그 순간을 위해 ‘귀신 망토'를 얻었다. 내 계획대로 진행되면 문제없을 것이다.
텐라이 나기사와 함께 신사를 둘러보고 다시 입구로 나왔다. 빗자루를 들고 신사를 청소하던 무녀와 마주쳤다.
검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무녀였다. 하얀색 상의와 붉은색 긴 치마를 입은 전통적인 무녀다. 동시에 그녀는 효도 유우키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텐라이 학장님."
“오, 미에코. 청서하고 있었느냐, 수고가 많구나."
“아뇨. 무녀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한국에서 온 교류생이다. 이름은 성유진. 정령사로서 신토과에 관심이 있다더군. 이쪽은 츠쿠요미 신사의 유일한 무녀인 미야카도 미에코다."
“성유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야카도 미에코예요. 신토과에 들어오신다고요? 곤란하네요. 신토과는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요. 다른 전공과를 찾아 보시는 걸 추천할게요."
텐라이 나기사가 끼어들었다.
“미에코. 신토과가 어때서 그러느냐. 신토과는 일본 문화의 근원이니라. 일본 문화의 우수함을 저 녀석에게 듬뿍 가르쳐주거라."
“학장님. 문화에 우월성은 없습니다."
"에잉. 넌 매사에 너무 진지하게 탈이다. 농담도 모르느냐?"
여차저차 나는 신토과에 들어갔다.
1차 교류전이 끝났다.
결과는 아슬아슬하게 한국의 패배였다. 충격받은 한국 아카데미 학생들은 지옥훈련에 들어갔다.
교실 의자에 앉은 나는 교사의 수업을 흘러들으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신보 레이카와 미야카도 미에코에게 억지로 다가가지 않는다. 이런 타입의 여자들은 먼저 다가가면 뒤로 물러난다. 내가 다가가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다가오게 만들어야 한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나는 눈을 치뜨며 창문 밖을 쳐다봤다. 검은 연기가 아카데미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라시 아카데미는 습격받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번엔 아카데미 바깥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아라시 아카데미 결계와 부딪쳤다. 결계는 부서지지 않았으나 격렬하게 요동쳤다.
“습격이다!!"
“아라시 아카데미를 공격했다고?! 어떤 미친놈들이?!"
“그런 짓을 저지를 놈들은 뻔하지! 마도정이야! 마도정이 공격한 거라고!"
교실에 패닉이 찾아온다.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는 분필을 바닥에 내던지고 학생들을 향해 고함쳤다.
"조용! 지금은 긴급 사태다! 모두 침착하게 날 따라와라! 신속하게 대피소로 이동한다!"
“선생님! 저희는 적들과 싸울 수 있습니다!"
"닥쳐라! 너희는 학생이다! 히어로가 아니니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당장 대피소로 이동해라!"
쿠우우우웅!
건물이 흔들린다. 교사는 이를 악물며 문을 가리켰다.
"빨리 움직여!"
폭발음은 계속 울렸다.
그리고 폭발음이 주기적으로 계속 울리는 건 츠쿠요미 신사 쪽이었다.
내 옆에 있던 효도 유우키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모두가 정신이 없을 때 은근슬쩍 자리를 이탈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귀신 망토를 어깨에 두르고 효도 유우키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