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9화 > 1409. 아카데미의 구원자
한일 아카데미 교류전은 2달 동안 총 3차로 나뉘어 진행된다.
일본 아라시 아카데미에 도착하고 3일째 되는 날에 1차 교류전.
그렇게 한 달이 지난 뒤에 2차 교류전.
아라시 아카데미를 떠나기 일주일 전에 3차 교류전.
요컨대 3판 2선제라고 생각하면 쉽다. 물론 명목은 교류전인지라 공식적으로는 승리에 아무 의미 없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한일간의 전투이자 경기로 받아들인다. 특히 양 국가는 여러 가지로 쌓인 게 많으니까.
윤희정은 교류전이 하루 남은 시점에서 우리에게 물었다.
"1차 교류전에 나갈 사람?"
1차 교류전은 단체전과 개인전이 있었다. 필요한 인원은 12명. 20명 전체가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학생들 대부분은 손을 번쩍 들며 참가 의사를 표명했다. 나는 아니었다. 애초부터 내 목적은 교류전 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진아. 1차 교류전에 흥미 없니?"
"선생님. 전 3차 교류전에 나가겠습니다."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래? 교류전에서 배울 게 있을 거야."
윤희정이 부탁한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한국에는 한일전은 그게 무엇이 됐든 이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교류전에서지면 담당 교사인 윤희정은 조금 곤란해질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선 학년 순위 1위인 내가 교류전에 나가 확정적으로 승리해주기를 원하고 있겠지.
하지만 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서요. 잠도 잘 못 잤고."
내 말에 움찔 몸을 떠는 여성이 2명 있었다. 성하리와 최다연이었다. 어제 나와 몸을 섞은 여자들이다.
“윤 선생님. 유진이가 컨디션이 좋지 않다니 쉬게 하죠. 유진이가 아니더라도 마루한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강해요."
성하리가 나서며 말했다.
"선생님. 성유진이 강하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우리도 약하지 않아요. 성유진이 없어도 교류전에서 이길 수 있어요."
최다연까지 나섰다.
학생들도 모두 그 말에 동조했다. 학년 10위권 내의 학생들이다. 그 자신감은 당연히 높았다.
'자신감과 현실은 다르지. 생각하는 만큼 쉽게 이기지는 못할 텐데.'
한국의 마루한 아카데미와 일본의 아라시 아카데미. 수준만 놓고 보면 비등비등했다. 전 세계적으로 아카데미의 평균 수준은 다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빼고.'
이후, 1시간 동안의 회의 끝에 1차 교류전 참가자들이 정해졌다.
교류전 기간 동안 마루한 아카데미 학생들은 아라시 아카데미의 방식으로 교육받는다.
수업 방식은 비슷비슷했다. 수업 분위기도 비슷했고. 다만 아라시 아카데미 학생들은 묘하게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교류전 때문은 아니다.
'뭐, 원작대로군.'
일본 학교는 일본 나름의 문화가 있었다.
문화제.
한국에도 문화제가 있긴 하지만, 일본의 경우엔 문화제의 퀄리티가 차원이 다르다. 일본의 문화제는 학교에서 벌이는 지역 축제에 가깝다.
그런데 아라시 아카데미의 문화제? 공중파에 방송이 될 정도로 뛰어난 규모를 자랑한다. 그만큼 아라시 아카데미의 학생들의 자부심도 뛰어나다.
지금 아라시 아카데미의 문화제는 한 달 이상의 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제 준비로 들떠 있었다.
나는 최다연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최다연은 언제나처럼 도도한 표정으로 내 옆을 걷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옆에 있는 최다연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 섹스하고 싶다."
"프웁…! 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반응이 재밌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시답잖은 섹드립인데도 웃음벨을 누른 것마냥 웃음보가 터진 것이다.
『최다연의 심리: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왜 웃긴 거야. 참아야 해.」
“섹스."
“크웁!"
“섹섹스.”
"푸으풉."
최다연이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손위로 드러난 두 눈은 맹렬히 흔들린다.
몇 번 더 놀릴까 하다가 목적지에 도착했기에 관뒀다.
1학년 4반.
아라시 아카데미에 머무는 동안 나와 최다연은 1학년 4반에서 교육받고 행동할 거다.
앞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HR 시간이었는지 학생들과 담임 교사가 모두 교실에 있었다.
"드디어 왔네요!”
담임 교사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13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다. 밝은 갈색 단발머리를 가졌으며 눈을 똘망하고 뺨은 말랑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어울리지 않게 정장이었다.
"성 군과 최 양이죠? 전 1학년 4반의 담임인 우라타미 네네입니다!"
“초등학생이 담임? 날 너무 물로 보네. 몰래카메라라도 수준이 있어야지. 누가 이런 거에 속겠냐고."
나는 능숙한 일본어로 말했다. 일본어 번역 아티팩트를 지급 받았지만, 방에 처박아두고 사용하지 않았다. 내 일본어는 이미 현지인 수준이다.
“푸웁!"
“크흐흡!"
“하하하하!”
일본 아카데미 학생들이 웃음보를 터트렸다.
"모, 몰래카메라 같은 게 아니에요! 전 1학년 4반의 담임 교사라고요!"
우라타미 네네가 소리친다. 물론 그녀가 진짜 이 반의 담임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어린 외형과 다르게 나이는 30대가 넘을 것이다. 나는 첫인상을 위해 일부러 과장되게 반응했을 뿐이다.
“거짓말하네. 충분히 재밌었으니 이제 그만해. 선생님은 어딨어?"
"내가 이 반의 담임이라고요!!"
화를 낸 우라타미는 보란 듯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어린아이답게 가슴은 아주 평평했다.
'저게 30대의 가슴이라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
우라타미 네네의 목에는 교사증이 걸려 있었다. 교사증을 확인한 나는 화들짝 놀란 척 연기했다.
"지, 진짜 선생님이라고?!"
“맞아요! 그렇다고 말했잖아요! 애초에 뭐 하러 이런 재미 없는 몰래카메라를 하겠어요?"
"아라시 아카데미는 어린아이도 교사가 될 수 있는 건가…. 문화 컬쳐로군…."
"어린아이가 아니라니까요! 전 이래 보여도 30대예요. 연상이라고요. 그리고 문화 컬쳐가 아니라, 문화 충격이겠죠. 영어로 하자면 컬쳐 쇼크! 성 군은 영어에 약하시나요?"
듣고 보니 컬쳐 쇼크인 것 같다. 근데 문화 컬쳐가 더 입에 착 달라붙는다.
"저 영어 잘합니다."
우라타미 네네는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보통이 아닌 학생이 우리 반에 온 것 같네요. 후우. 앞길이 캄캄하지만… 지금은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죠. 자, 교류생 여러분 앞으로 와서 자기 소개하세요.”
나는 우라타미 네네의 손짓에 따라 교단 앞에 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향한다. 흥미가 담긴 눈, 적대감이 서린눈, 경계하는 눈 등등 제각각의 반응이다. 나는 조용히 그들을 보았다. 원작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성유진이다. 한국의 마루한 아카데미에서 교류전을 위해 왔어. 마루한 아카데미에선 학년 1위야. 참고로 우리 엄마는 성하리다. 앞으로 잘 부탁해."
"……."
성하리.
그 이름이 나오자 모든 학생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한때 최강의 히어로라 불리며 칭송받았던 성하리는 일본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도 유명했다.
“최다연이야. 학년 4위고 우리 가문은 금화 그룹을 운영하고 있어."
"……."
이번에도 학생들은 침묵했다.
금화 그룹. 모르는 척 무시하기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기업이었으니까.
“자, 자, 교류생들이 무안하게 아무 반응이 없으면 안 되죠. 여러분 박수로 교류생들을 환영해주세요!"
짝짝짝!
우라타미 네네가 먼저 박수를 치자 학생들도 박수를 쳤다. 우라타미 네네를 향한 호의가 보인다. 학생들로부터 꽤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성 군! 최 양! 저기 빈자리 보이죠? 성 군은 뒤쪽에, 최 양은 저기 왼쪽 자리에 앉으면 돼요."
나와 최다연이 자리로 향했다. 최다연은 긴 검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도도하게 걸었다. 새침한 얼굴과 아우라는 학생들이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긴다.
"아가씨네."
"금화 그룹이면 거기지? 스마트폰 만드는 곳?"
"분위기부터가 장난 아니야…. 가까이 가지 말아야겠다."
최다연은 친구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가 뛰어난 외모와 분위기로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나에 대한 시선은 별로 없었다.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관천의 뇌성의 아들이라…."
"마루한 아카데미의 학년 1위면 얼마나 강한 거지?"
"못해도 사천왕 수준은 되지 않겠어?"
"겉모습은 딱히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자리로 향하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만약, 여기서 내게 대놓고 시비 거는 놈이 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박살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비 거는 놈은 없었고 무사히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가 인사를 건네온다. 검은 머리에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평범할 것 하나 보이지 않는 인상.
흔히 말하는 일본식 주인공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안녕, 성 상. 효도 유우키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남자가 먼저 내게 인사했다. 나는 그 이름을 듣고 멈칫했다.
효도 유우키.
원작에서 일본 교류전 에피소드 한정으로 주연에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는 놈이다. 워낙 내용이 라노벨스러운지라 좋아하는 팬들은 별로 없지만.
'설마,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될 줄은 몰랐군.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바로 알아보지도 못했어.'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그래. 잘 부탁해. 학년 순위가 어떻게 돼?"
“아, 그게…. 아직 아라시 아카데미는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아서 학년 순위는 안 나왔어. 난 입학 순위 300위야. 부끄럽지만 꼴찌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라노벨 소설 주인공 중에는 힘숨찐인 경우가 더러 있는데0… 효도 유우키가 그러하다. 효도 유우키는 입학시험 때 본의 아니게 지각하면서 필기시험을 망쳤다. 학장인 텐라이 나기사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긴 했지만, 꼴찌인 300위다.
'효도 유우키의 진짜 실력은 학년 10위권 안에 가뿐히 들 정도지.'
여러모로 골때리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2달 정도지만… 잘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