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6화 > 1406. 아카데미의 구원자
다다미가 깔린 넓은 방.
그곳에 다부진 체격의 한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검은색 기모노를 입은 노인은 다다미에 정좌한 채 찻잔을 양손으로 공손히 들고 있었다.
노인의 정체는 사나다 켄시. 마도정(魔道亭)의 수장이다.
그는 조용히 뜨거운 찻물을 한 모금 삼켰다.
지지직.
사나다 켄시의 주위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한 형상이 나타났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일종의 화상통화 같은 마법 중 하나였다. 그의 주위에는 어느새 4명의 형상이 나타났다.
사나다 켄시까지 합쳐서 총 5명.
사나다 켄시와 함께 마도정을 이끄는 간부들이었다.
오늘은 긴급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일본 아라시 아카데미에서 생겨난 변수 때문이다.
"아라시 아카데미에 한국 아카데미 학생들이 오늘 도착했다더군."
먼저 사나다 켄시가 운을 뗐다. 긴급회의를 위해 그들을 부른 건 사나다 켄시였기 때문이다.
-겨우 그런 일로 긴급회의를 한다고? 어차피 교류전을 위해 온 거겠지. 우리랑은 아무 상관 없다.
-맞습니다. 한국이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지금은 계획에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아카데미를 건들어 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말한 건 사나다 켄시, 바로 너다.
사나다 켄시는 천천히 여유롭게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극비리에 입수한 정보가 있다. 한국 아카데미의 보호자 중에 성하리가 포함되어 있다더군."
일순간 4명의 간부들이 침묵했다.
성하리.
그 이름을 모르는 자들은 이곳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정부가 우리 계획을 눈치채고 성하리에게 도움을 청한 건가?
-말도 안 됩니다. 일본 정부가 알았다면 우리에게 정보가 들어왔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나서서 성하리가 일본에 오지 못하도록 손을 썼을 거고요.
-아라시 아카데미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답은 간단하지. 텐라이 나기사. 그 여자가 손을 쓴 거군.
-그 여자는 우리 계획의 전부를 몰라도 일부는 알아차린 듯하니… 말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군.
-어쩔 겁니까? 이대로 계획을 진행합니까? 아니면 관천의 뇌성이 일본을 떠날 때까지 기다립니까?
-30년 이상을 준비해온 일이다. 이제 막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나? 한국과 관천의 뇌성은 계획을 성공시킨 뒤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
모두는 조용히 넘어가기로 원했다.
하지만 마도정의 수장인 사나다 켄시는 달랐다.
"성하리는 예전의 성하리가 아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한다. 계획에 성공하면 텐라이 나기사와 성하리는 바로 처리할 수 있다."
-...30년을 준비해온 일이다. 고작 몇 개월을 더 못 기다리나?
"겨우 하나의 변수에 마도정이 멈춰야 하나? 성하리 한 명 때문에 실패할 일이라면… 차라리 실패하는 게 낫다. 나이가 들더니 겁도 많아진 모양이군."
-사나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겨우 한 명 때문에 계획이 실패한다면… 그건 우리가 그만큼 무능하다는 뜻이기도 하지.
-마무리를 앞두고 있습니다. 30년간의 계획이 결실을 보려 하는 순간입니다! 자존심이 아니라 실리를 따지십시오!
“실리는 충분히 따졌다. 성하리는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핫토리."
-...말해라.
“계획대로 진행해라."
-그러지.
할 말을 끝낸 사나다 켄시는 다시금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의 귀로 간부들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계획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뒤에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자유 시간을 어떤 여자와 보내냐는 고민이었다.
성하리와 못다 한 육체의 대화를? 윤희정을 찾아가 깔아뭉개며 섹스하는 것도 괜찮다. 고은하에게 당하는 플레이도 나쁘지 않다. 오랜만에 이시은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도 괜찮고.
'목욕탕에서 섹스할까? 아니지. 지금 목욕탕은 보나 마나 다른 학생들이 쓰고 있을 테니.'
고민하며 복도를 걷는다. 복도 끝에는 휴게실이 있었다. 휴게실은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금발의 여자가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클라라 페이레드다.
“바깥 풍경이 좋아?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클라라는 놀란 눈으로 날 보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학년 순위 1위인 성유진이지? 난 클라라 페이르데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 잘 부탁해."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웠고, 목소리는 가수답게 청아하고 깔끔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다. 분명 교성도 잘 지르겠지.
'찰나.'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찰나를 사용해서 그녀의 몸을 천천히 감상했다.
클라라는 서양 금발 미녀의 환상을 모조리 때려 박은 듯한 미녀였다. 노란 금발은 보기 좋았고, 푸른 눈은 보석 같았다. 새하얀 피부는 말할 것도 없다. 육체의 피지컬은 당연히 뛰어났다. I컵은 될듯한 커다란 가슴에 잘록한 허리. 가슴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터질 것 같은 골반. 키도 170으로 컸다.
"안 그래도 돼."
“응? 뭐를?"
“사람을 상대로 항상 웃고 착한 척하는 거 귀찮잖아. 지금 나를 상대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지?"
클라라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그 시간도 짧았다. 1초도 되지 않는다. 허나 나는 그녀의 얼굴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기에 그 찰나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워낙 예쁜 얼굴인지라 집중하려고 하지 않으려 해도 집중된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혹시 기자나 파파라치에게 이상한 부탁 받고 떠보는 거야?"
"내가 사람을 잘 파악하거든. 클라라 페이레드. 네바다 주 출신. 어렸을 때부터 가수로서 두각을 보였지. 좋아하는 과일은 체리, 좋아하는 요리는 시카고 피자, 싫어하는 과일은 두리안, 싫어하는 요리는 감자 요리 전반. 타임지를 즐겨 읽고, 영어뿐만이 아니라 독일어, 불어, 한국어도 할 줄 알지. 또 친한 연예인으로…."
"그만! 네가 나에 대해 잘 아는 팬이란 건 알겠어. 어디에 사인해줄까? 티셔츠 같은 곳에도 해줄게."
"남들이 모르는 것도 알고 있는데?"
"내가 널 상대하기 귀찮아한다는 말 말이야? 그건 전부 네 착각이야. 팬을 상대하는 일이 귀찮을 리 없잖아.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팬들 덕분이니까.”
클라라가 웃는다.
관심을 끌려고 지랄 짓 좀 해봤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여기서 물러나면 그땐 진짜 끝이다. 좀 세게 나가야겠군. 역효과가 걱정되긴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다. 무관심으로 끝내는 거보다 조금 미움받는 것도 괜찮을 거다.
“그리고 3년 전에 빨간 머리 양아치로부터 고백을 받았지."
클라라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 그 빨간 머리 양아치는 헤밍포드 가문의 후계자인 햄슨 헤밍포드다. 헤밍포드 가문은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가문 중 한 곳이다.
클라라는 햄슨 헤밍포드의 고백을 거절했고, 그 보복으로 미국에서 가수 활동을 못 하게 되었다. 햄슨은 돈과 권력으로 클라라를 가스라이팅하려고 했으나, 클라라는 헤밍포드의 힘이 닿지 않는 한국으로 유학 와 가수 활동을 이어갔다.
"그걸 어떻게…."
"햄슨의 압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너. 햄슨의 사주를 받고 내게 접근한 거야?"
널 따먹고 싶어.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럴 리가. 내가 누군지 몰라? 우리 엄마는 성하리야."
“……그럼 대체 왜 내 앞에 나타난 건데? 날 협박하려고?"
"협박해서 뭐 하게."
클라라는 외강내강의 인물이다. 헤밍포드를 적으로 돌리고서도 가수로 당당히 활동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지간한 협박은 통하지도 않는다. 협박은 최선의 수가 아니다. 억지로 강간한다? 그건 지금 내 무력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선 재미가 없다.
"난 네 팬이야. 널 도와주고 싶어."
"…후우. 내 팬이라면 부탁이니 날 곤란하게 하지 마. 내 사정을 알고 있다고 해서 나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굴지말고 …그래도 일단 내 팬이니 사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해줄게."
“네 노래를 정말 좋아해. 앞으로도 계속 듣고 싶어. 원래 있는 곡들이 아니라, 네가 만들고 부를 새로운 노래들을 말이야. 하지만 헤밍포드가 방해하면 그게 곤란해지지. 그러니 난 날 위해서라도 널 돕고 싶어."
“하…. 내 노래를 위해 헤밍포드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거야? 고작 노래 때문에?"
"네 노래는 고작 노래가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널 도와주면… 너도 언젠간 나한테 보상하지 않겠어? 나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준다거나."
클라라는 피식 웃었다.
“난 단 한 사람을 위해 노래하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어. 내 노래를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네가 날 도울 필요는 없어. 난 이만 가볼게. 사실 윤희정 선생님과 만나려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었던 거거든. 사인은 나중에 해줄게."
클라라는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갔다.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카락과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골반이 내 자지를 설레게했다.
'걸음이 너무 빨라서 도망치는 것처럼도 보이네.'
나는 휴게실 벽을 기대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두운 풍경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햄슨 헤밍포드에 대해 생각했다.
'헤밍포드를 적대하는 건 곧 미국을 적으로 돌린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만큼 헤밍포드 가문이 미국에 끼치는 영향력이 엄청났다.
어지간하면 나도 헤밍포드 가문을 건들지 않을 것이다.
‘근데 햄슨 헤밍포드는 내 여자를 건드렸지.'
클라라는 내 여자다.
아직 자빠뜨리진 못했지만, 내 여자라고 정했다.
'내 여자를 건드렸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그게 설령 미국이라 할지라도.'
미국이 나를 방해한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미국을 죽여버릴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미국인들이 좀비를 그렇게 좋아한다지…?'
휴게실을 나온 나는 최다연의 방으로 향했다.
내 계획에 있어 최다연은 필수였다.
똑똑똑.
천천히 최다연의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나야, 성유진.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들어가도 될까?”
“……기다려.”
문이 열렸다. 최다연은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팔짱을 끼며 도도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용건이 뭐야? 들어오지 말고 여기서 말해."
"들어가서 얘기하고 싶다니까?"
“…아직 짐 정리가 안 끝났어."
“크크."
나는 웃으며 억지로 최다연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끼고 있던 최다연은 날 막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방안을 둘러봤다. 책상 위에 놓인 아로마 향초가 타오르며, 방안을 아로마 향기로 가득 채웠다. 웃음이 계속 나왔다. 최다연의 눈동자는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흔들린다.
사실 나는 최다연의 문을 노크하기 전부터 천안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최다연이 방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책상으로 향하는 척하다가 몸을 획 돌려 침대에 달려들었다.
"성유진…! 치, 침대에서 떨어져! 여자 침대에 함부로 올라가는 거 아니야!"
“응. 싫어."
여름용 이불을 걷어 낸다. 파란색 침대 시트 중심에는 물을 흘린 듯 살짝 젖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베개 아래에 숨겨져 있는 물건을 꺼냈다.
하얀 팬티였다. 팬티의 중심 부분은 끈적한 액체로 흠뻑 젖어 있었다. 꼬불거리는 보지털 하나가 묻어 있는 건 덤이었다.
“이야, 따뜻하네? 방금까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