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404화 (1,399/1,497)

< 1404화 > 1404. 아카데미의 구원자

기말 고사가 끝났다.

학년 순위는 바로 다음 날 오전에 발표되었다. 게시판 앞에는 학생들이 모여 자신의 성적을 확인한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었다.

나는 웃는 쪽이었다.

게시판 가장 왼쪽. 그리고 가장 위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1위. 성유진.

'당연한 결과군.'

내 시선은 아래로 내려갔다. 일본 교류전에 참가할 수 있는 자는 상위 10명. 순위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2위. 류하나.

3위. 김천우.

4위. 최다연.

5위. 안기산.

6위. 유미나.

7위. 클라라 페이레드.

8위. 황성주.

9위. 이시은.

10위. 마진배.

10위 권의 학년 순위를 싹 훑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내의 결과로군.'

아마 이들 전부가 교류전을 승낙할 것이다. 일본 아라시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 게다가 상대가 일본이다. 한국인으로서 절대로 패배해서도, 도망가서도 안 되는 상대.

'도망가면 역적으로 몰리겠지.'

나는 유일한 외국 이름인 클라라 페이레드를 바라봤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클라라는 유학생이었다. 반이 다르고, 행동방식도 좀 많이 달라서 클라라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문제는 없어. 클라라는 원래 플레이어블 캐리겉가 아닐 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니까. 이번 기회에 안면을 트고 친해지자.'

클라라는 아카데미 학생인 동시에 유명한 가수였다.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아카데미 내에서 그녀를 만나기 상당히 힘들다. 그녀는 아카데미 수업이 끝나면 바로 연예 활동을 하러 떠난다.

'방학식은 일주일 뒤군.'

방학을 코앞에 둔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들떠 있었다. 방학을 환영하는 건 어느 학교나 똑같았다.

일본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준비된 버스를 타고 도쿄 아라시 아카데미로 이동했다.

일본의 아라시 아카데미의 역사는 한국의 마루한 아카데미 이상으로 길었다. 일본의 아라시 아카데미는 마루한 아카데미보다 그 규모가 컸다. 대충 2배 더 크다고 보면 된다. 놀라운 건 아니다. 일본의 인구수는 한국보다 2배 정도 많으니까.

"낡았네."

내 옆에 앉아 버스 창문을 바라보던 이시은이 말했다.

아라시 아카데미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낡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뭐, 그렇다 해도 건물 붕괴가 걱정될 정도로 낡은 건 아니었다.

"낡은 건물만 있는 건 아니야. 잘 봐. 새로운 건물도 있잖아."

“으음. 유진이 네 말대로네. 건물을 새로 지을 능력이랑 돈은 충분히 있는 것 같은데… 왜 낡은 건물을 사용하는 걸까?"

"전통과 역사를 지키기 위해? 일본 꼰대들은 상당히 보수적이잖아."

"우리 아카데미랑은 다르네. 우리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건물을 새로 지으려고 혈안이 되었있는데."

“크크. 그렇긴 하지."

마루한 아카데미의 교사들은 기회가 되면 전공 건물을 새로이 만들고 싶어 한다. 건물 연식이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낡았다고 행정실에 항의하는 교사는 부지기수로 많았다. 물론 행정실에 씨알도 먹히지 않지만.

버스는 어느 낡은 건물 앞에 멈췄다.

“자, 얘들아! 짐 쟁겨서 내리렴!"

2명의 인솔 교사 중한 명인 윤희정이 소리쳤다.

"대충 빨리 해라, 대충."

다른 한 명의 인솔 교사는 백수처럼 생긴 30대 남성이었다. 그는 아무렇게 자란 턱수염을 박박 긁으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2학년 3반의 담임인 조무상이다.

나를 포함한 1학년 학년 10명과 2학년 10명이 버스에서 내리고 낡은 건물 앞에 섰다.

나무로 된 5층 짜리 건물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윤희정 선생님. 정말 여기가 저희가 2달 동안 머물 기숙사예요?"

최다연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저래 보여도 최다연은 윤희정에게 화내는 게 아니다. 이 낡은 기숙사를 준비한 아라시 아카데미와 마루한 아카데미의 행정실에 분노를 느끼고 있겠지.

"건물이 좀 낡았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행정실에 따지면 바꿔주지 않을까요?"

"여기 오기 전에 우리가 사용 가능한 기숙사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어."

"그게 무슨…!"

최다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악을 쓰려 할 때였다.

"최다연! 엄마가 항상 말했지. 화를 낼 때도 우아하게 화내라고!"

건물 옆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두 명의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들을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명은 성하리였다. 청바지에 가죽 재킷깃을 걸친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성하리의 옆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검은 단발머리 여성이 있었다. 입고 있는 옷과 액세서리, 들고 있는 가방까지 모조리 명품이었다. 분위기에서부터 압도적인 재력이 느껴진다.

“어머니?!"

최다연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최다연의 어머니였나. 확실히 닮은 것 같긴 했어. 보지도 닮았으려나?'

나는 최다연의 어머니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름은 대충 알고 있다. 최다연이 워낙 유명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최정화. 금화 그룹 회장의 딸이자, 황금 나무 클랜의 마스터.'

최정화는 겉모습은 성하리 또래로 보였다. 다시 말해 엄청난 동안이라는 뜻이다.

'모녀 덮밥 가능하려나? 딱 봐도 성질이 보통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최다연과 최정화의 모녀 덮밥 보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여차할 경우에는 절대 최면 스티커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들은 어느새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성하리는 와락 내 몸을 끌어안았다.

"유진아. 이렇게 보니 키가 좀 큰 것 같네?"

"3일 전에 만났잖아."

"안 큰 것 같기도 해."

성하리의 등장에 주위가 웅성거린다. 성하리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곧바로 나를 놓아 주었다. 그래도 내 팔은 계속 잡고 있었지만.

“자, 모두 조용!"

윤희정이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성하리 씨와 최정화 씨는 임시 교사 자격으로 한일 아카데미 교류전 기간 동안 함께하기로 했어. 모두 성하리 씨와 최정화 씨께 인사드려. 이분들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지?"

S급 히어로인 성하리.

한국의 대형 클랜 마스터인 최정화.

한국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그 이름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일본에 왔는데 인솔 교사가 2명뿐이라 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군.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건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던 건가?'

서프라이즈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나 조차도 깜짝 놀랐으니까.

그녀들은 우리에게 자기 소개를 했다.

"성하리야. 교류전 기간 동안 잘 부탁해."

"최정화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우선은… 이 썩어빠진 기숙사부터 바꿔볼까?"

최정화는 말한 뒤 명품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려고 했으나, 누군가가 그녀에게 소리없이 다가가더니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짝 내려쳤다.

“어허, 썩어빠진 기숙사라니! 말이 심하구나. 여기 동운관은 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아라시 아카데미의 기숙사니라."

겉모습은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9~10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검은 머리는 흔히 말하는 히메컷 스타일이고, 눈동자는 요사스러운 보라색이다. 그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녀의 한국어는 한국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능숙했다.

"…텐라이 학장…!"

최정화가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텐라이를 노려봤다.

텐라이 나기사.

아라시 아카데미의 학장인 그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그녀의 실제 나이는 70세 이상이니까.

나는 원작을 통해 텐라이 나기사를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 이상의 정보는 잘 모르겠군.'

내 취향이 아니라서 캐릭터 정보를 제대로 조사한 적 없었다. 그냥 전형적인 어린애 외모를 한 할망구 캐릭터라 보면 될 것이다.

“아라시 아카데미의 학장인 텐라이 나기사다. 학장으로서 한국 대표로 교류전에 참가한 너희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옛 인연을 여기서 다시 만나니 기분이 좋구나."

텐라이 나기사는 성하리와 최정화를 보며 싱긋 웃었다.

성하리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고, 최정화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할망구. 나잇값 못하는 모습은 여전하네."

"너도 말괄량이 기질은 여전하구나. 옆에 있는 아이가 네 아들이냐?"

"유진이에게… 아니, 애들에게 수작 부리면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너무 경계하지 말거라. 그 시대와 지금은 다르지 않느냐. 그리고 최정화. 애석하게도 네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겠구나. 마루한 아카데미는 교류전 동안 동운관에서 머물러야 한다."

단호한 텐라이 나기사의 말에도 최정화는 물러나지 않았다.

"돈이라면 제가 내죠. 근처 호텔에서 숙박할 거예요. 교류전 일정에 차질이 가진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동운관을 배정한 건 마루한 아카데미에게 면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루한 아카데미에도 말했듯이 현 아라시 아카데미에 여유가 있는 기숙사는 동운관 뿐이라 그렇다."

“그러니까, 제가 사비를 들여서 호텔을 구한다고 말했잖아요."

“숙박 시설의 중요도가 학생들의 안전보다 중요하느냐?"

"……안전이요?"

"지금 일본의 분위기가 마도정의 쓰레기들 때문에 흥흉하다는 건 너희도 알 거다. 마도정은 내가 있는 아라시 아카데미만 큼은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그러니 이곳에서 지내거라. 아카데미 밖에서 머물면… 내가 너희를 지켜주지 못한다."

"……."

성하리와 최정화는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낡은 기숙사에 머물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텐라이 나기사는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한 명, 한 명씩 손을 잡아 악수하며 인사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나와 악수했다. 겉모습만큼이나 작은 손이었다.

"반갑구나, 교류전 동안 잘 부탁하마. 뇌성의 아이야."

"예, 뭐, 잘 부탁합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적당한 자리에서 모두에게 말했다.

“낡은 기숙사를 배정한 건 미안하다고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느니라. 너희를 홀대하기 위해 낡은 기숙사를 배정한 건 아니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다오."

윤희정이 텐라이 나기사의 앞으로 나섰다. 성하리와 최정화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선 것이다. 다른 1명의 교사인 조무상은 말년 병장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학생들의 안전이 우선이니 이해할게요. 그런데… 학장님이 직접 나와주시다니 좀 의외네요."

“내가 너희를 초대했으니 당연히 내가 마중하는 게 도리에 맞지 않느냐. 마음 같아선 직접 동운관을 너희에게 소개해주고싶다만… 이래 보여도 학장인지라 스케줄이 안 되는구나. 혹여 불편한 게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말하거라."

텐라이 나기사는 그 말을 끝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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