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0화 > 1390. 신의 아틀란티스
창백한 피부를 가진 검은 머리의 꼬마 여자아이는 나를 보고 붉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
여자아이가 당혹스러운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당혹감은 처음뿐이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상황을 파악한다.
사실 이런 상황은 꽤 겪어봤다. '뱀파이어 형사' 세계에서 뜬금없이 젊은 여자가 나타나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상황.
'대충 10번 정도 겪어봤지.'
처음에는 내 재산을 노리고 사기 치는 줄 알았지만, 유전자 검사를 통해 그녀들 모두가 내 딸이란 걸 밝혀냈다. 뭐, 내 재산을 노리고 접근해온 건 맞았지만.
'뱀파이어 형사 세계에서는 좇을 좆대로 놀렸으니까. 임신 제어 능력도 가지기 전이었고.'
나는 딸을 건드렸다. 어미를 닮아서 그런지 대부분 미녀였다. 어쩌다 못생긴 딸이 나타나면, 적당히 돈을 쥐여주고 내보냈다.
'솔직히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내 자식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았고.'
나는 부성애가 없었다. 원래 내 본성이 그런지, 아니면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아마 후자겠지. 유리아나, 엘레나가 내 자식을 가졌다고 상상하면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요컨대 그거였다. 자식을 내 자식으로 인정하느냐의 차이.
나는 다시금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딸이라고 하기엔 좀 너무 큰 것 같은데?'
여자아이는 10살 정도로 보였다. 그리고 내가 아틀란티스에 온 것은 2년 전쯤이다. 그때 애를 낳았어도 3살은 넘지 않을것이다.
“네가 내 딸이라고?"
"…천마 아니야? 카샤 언니가 아빠는 천마라고 했는데."
“내가 천마 맞다. 너는 누구지?"
"바토리 에르시아."
에르시아는 날 보며 또박또박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때, 옥정이 나와 에르시아 사이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에르시아를 지키듯 내 앞에 서며 긴장했다. 에르시아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매우 건방졌기 때문이다.
"주, 주인님. 에르시아는…."
"말하지 않아도 돼. 알고 있으니까.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딸이겠지."
바토리.
그 성을 듣자마자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에르제베트를 임신시켰었다.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 더 정확하게는 뱀파이어의 자식을 부하로 쓰기 위해서. 원래 에르제베트는 그런 역할로 데려왔다.
'뱀파이어면 이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도 말이 되지.'
인간이 아니니, 인간과 다른 건 말이 된다.
'음.'
에르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크면 상당한 미인이 될 것 같긴 해.'
자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시아가 내 자식이란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에르시아는 내 피를 이었고, 필요로 인해 탄생한 존재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성애가 조금 정도는 생기는 것 같군.'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니 애비다."
"정말?!"
에르시아가 옥정의 옆을 지나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에르시아를 잡아 위로 들었다. 처음으로 안아보는 딸은 따뜻하고 묵직했다.
"아빠!"
“그래."
“천마님!"
“그것도 나지."
기뻐하던 에르시아는 갑자기 텐션이 급격히 낮아졌다. 어딘가 울먹이는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왜 이제 온 거야?"
"바빠서."
애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에르시아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나 에르시아의 얼굴은 썩어들어갔다.
"내려줘."
"왜? 이 아빠가 놀아주는 게 마음에 안 드나?"
“이런 게 재밌을 리 없잖아. 그리고 아빠는… 정말 날 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넌 내 딸이지."
“그럼 천마신교의 후계자는 나겠네?"
"……."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거봐. 대답 못 하잖아."
"…좀 놀랐을 뿐이야. 설마 면전에서 날 죽이고 천마의 자리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할 줄이야.. 내 딸이지만 대단하군."
"어? 나, 난 아빠를 죽이겠다고 한 적 없어!"
"천마신교를 가지겠다는 건 그런 뜻이야."
"그, 그럼 천마 같은 건 안 할게."
“그러든가."
나는 에르시아를 내려두었다. 에르시아는 잠깐 내 눈치를 보더니, 내 오른쪽 다리를 끌어안았다.
'애가 힘이 왜 이렇게 세지? 뱀파이어라서 그런가?'
평범한 인간 수준은 뛰어넘은 것 같았다. 에르시아는 내 옆구리에 얼굴을 파묻고 비비적거렸다.
“이게 아빠구나.”
“아빠한테 이게라니… 뭐, 됐다."
나는 옥정에게 에르시아의 능력치를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에르시아에게서 왔다. 에르시아는 또박또박 자신의 상태창을 읽었다.
「이름: 바토리 에르시아
클래스: 담피르
칭호: 핏빛 미래를 걷는 자
신좌: 피의 백작 부인
소속: 제 8회 아틀란티스
근력: 44 민첩: 31 체력: 30 마나: 61 행운: 13
고유 특성: 혈마지체(A)
특성: 흡혈(A)
스킬: 혈마술(B). 검술(B).」
'대단하잖아. 어지간한 추방자보다 뛰어난 능력치야.'
에르시아는 겉모습은 10살처럼 보여도, 실제 나이는 2살도 되지 않았다. 나이를 감안하면 그냥 뛰어난 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뛰어났다.
「마천의 왕이 당신의 딸을 살펴봅니다.」
「마천의 왕이 웃습니다. 에르시아는 당신의 딸이 확실하다고 확언합니다. 당신의 딸에게서 천마의 힘이 느껴집니다.」
에르시아의 고유 특성 혈마지체(A).
내 특성인 천마지체(S)의 영향을 받아 발현한 고유특성이 틀림없었다. 마천의 왕의 반응을 보면 확실하다.
'우연일 가능성은 적지. 그렇다고 해도 천마지체가 자식의 고유 특성에 영향을 끼칠 줄이야. 행운 능력치의 영향인가?'
나는 에르시아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르시아는 빠르게 강해질 것이다. 저 뛰어난 능력치가 에르시아의 재능을 증명하고 있다.
콱.
"크악!"
에르시아가 내 옆구리를 깨물었다. 그것도 엄청 강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니 에르시아가 내 옆구리에 송곳니를 꽃고 피를 쪽쪽 빨고 있었다. 표정은 술에 취한 것처럼 몽롱했다.
"악! 그만! 그만 빨아!"
다급히 에르시아를 잡고 들어 올렸다. 다행히 에르시아는 저항하지 않았다. 에르시아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내린다. 내 피다.
“세상에! 에르시아!"
옥정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옆구리를 닦았다. 그러면서 내 눈치를 본다. 내가 에르시아를 죽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느낌이다.
옥정의 눈빛을 받으니 좀 억울했다. 아무리 나라도 고작 딸의 장난에 진심으로 화내지 않는다.
'……아니지. 피까지 나왔는데 화내야 할 타이밍인가?'
에르시
아직도 몽롱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밤피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한번은 봐주기로 했다.
“에르시아. 피를 먹고 싶으면 달라고 말해. 지금처럼 아무 말 없이 송곳니 박아 넣지 말고. 피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아빠. 아빠는 엄청 맛있구나."
“……말이 좀 묘하다?"
“아빠는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난 맛있는 남자니까."
"주, 주인님…!"
농담 좀 했을 뿐인데 옥정이 얼굴을 붉히며 기겁한다. 나는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실제로 옆구리에 뚫린 작은 구멍 2개는 이미 회복하고 있었다.
“결정했어."
느닷없이 에르시아가 말했다. 나를 보는 눈이 무척 뜨거웠다.
"난 아빠의 인정을 받을 거야.'
"난 널 인정하고 있어."
"거짓말."
“……내 인정을 받아서 뭐 하려고?”
"아빠를 뛰어넘고, 아빠를 가질 거야.”
"날 가져? 왜?"
"아빠는 맛있으니까."
"식량 취급인가…."
뱀파이어의 본능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내 피가 그렇게 맛있나? 나는 옆구리 묻어 있는 피를 찍어 입에 넣었다.
철맛이 났다.
"에르제베트를 닮아서 그런지 아주 당돌하군."
“제가 볼 때는 주인님을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만났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그녀의 분위기는 어둡고 차가웠다. 우울하다 못해 광기마저 느껴졌다.
"변했군."
지금 그녀에게서 광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우울함도 없다. 어두운 방안에서도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아이가 나를 변화시켰지. 나는 아직도 그대를 원망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의 딸, 에르시아를 사랑하느니라."
“제법 귀엽긴 했어."
"그대여. 에르시아는 나의 딸이자, 그대의 딸이다. 나는 그대의 옆에 설 수 없음을 알고 있느니라, 하지만… 에르시아의 몸에는 그대의 피가 흐른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다오."
"알고 있어."
내 앞에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남매가 서 있었다. 둘 다 모래색의 피부를 가졌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특히 여자 쪽은 노출도가 꽤 심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아마드 나크비와 카샤 나크비. 남매는 나를 보며 제각각 다르게 반응했다.
"천마님!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쿵!
아마드 나크비는 바닥에 부복하며 외쳤다. 감탄을 끌어낼 정도로 신속한 부복이었다.
"왜 이제야 온 거야?!"
카샤는 울컥한 얼굴로 내게 따졌다. 날 때릴 듯한 기세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그녀의 노출된 허리를 팔로 안았다. 매끄럽고 따뜻한 촉감이 내 심장을 뛰게 한다.
손이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를 쓰다듬으려고 할 때였다. 카샤가 내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이럴 시간 없어. 지금 천마신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기나 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반란이 일어났어. 나와 오빠가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어. 천마신교는 반란자들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이야."
"어처구니가 없군. 자리 좀 비었다고 반란을 일으켜? 주동자가 누구야?"
“카록 리오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뭐 하는 놈이야?”
"검은 모래 악어 부족의 후계자야. 그가 사막 전사들을 포섭하고 반란을 일으켰어."
"검은 모래 악어 부족? 뭐 하는 부족이야?”
"……."
카샤는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렇게 바라봐도 어쩔 수 없다. 카록 리오스니, 검은 모래 악어니 전부 처음 들어본다.
하지만 반란이 일어났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이 어수선하니 정리해야지. 반란자 놈들은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