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7화 > 1367. 신의 아틀란티스
대기실 문이 열리고 핑크 러브가 기세 좋게 안으로 들어왔다.
7명의 여인이었다. 6,700 구역의 현 최고의 아이돌 걸그룹 답게 모두 비주얼이 뛰어났다. 물론 포비츠의 멤버만큼 비주얼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건 아니었다.
'핑크 러브’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녀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핑크색이 아니었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조합된 웃이다. 부드러운 분위기와 달리 의상은 시크했다.
"안녕하세요! 핑크 러브입니다!"
대기실에 들어온 그녀들은 활발하게 인사했다. 인사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멤버들 간의 합이 딱딱 맞았다. 인사를 받은 나는 약간의 흐뭇함을 받았다.
“포비츠예요!"
“…포비츠입니다."
“…포비츠라고 합니다."
"……."
반면에 우리 포비츠 멤버들은 개성적이었다. 미령은 그나마 활발한 어조로 말했지만, 엘레나는 입도 떼지 않고 시큰둥한 얼굴로 핑크 러브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핑크 러브 쪽으로 다가갔다. 정확하게는 핑크 러브의 중심, 검은색 긴 머리카락에 고양이상의 얼굴이 인상적인 자신감 넘치는 여인 쪽으로. 그녀가 바로 핑크 러브의 리더인 연유리다.
"핑크 러브가 무슨 일로 저희를 찾아온 겁니까?"
"거창한 이유는 없어요. 저희는 포비츠의 팬이거든요. 포비츠와 인사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포비츠 분들을 저희가 반갑지 않은가 보네요."
"포비츠의 데뷔 무대가 코앞인지라….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거죠."
"아하하…. 그렇죠. 데뷔가 코앞일 때는 긴장되죠. 저희도 그날엔 밥도 제대로 못 먹었죠. 그래도 방송국 대기실 전체를 돌아다니며 선배님들에게 인사했지만요."
연유리의 말에는 교묘하게 뼈가 서려 있었다. 신입인 포비츠는 왜 선배들에게 인사하지 않는가, 라고 질타하는 듯했다. 물론 나는 연유리의 말을 대충 무시하고 멤버들을 돌아봤다.
“핑크 러브 선배님들께 궁금한 거 있는 사람?"
"……."
멤버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핑크 러브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듯한 반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들은 딱히 아이돌이 되고 싶어서 아이돌이 된 게 아니니까.
"……."
웃고 있던 연유리의 미소에 금이 간다. 덩달아 핑크 러브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포비츠에게서 선배 대접을 받고 싶어 찾아 온 모양인데… 우리 애들이 그런 걸 잘못하다 보니 핑크 러브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내가 나섰다.
"포비츠가 곧 데뷔하는데… 먼저 연예계에 데뷔하고 활동 중인 선배로서 조언 하나만 해주시죠."
연유리는 표정을 수습했다. 다시 미소를 장착하며 내 질문에 답한다.
"조언이요? 여러분에겐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연습했을 때패처럼 잘하면 돼요. 여러분도 이날을 위해 수천 번을 연습했잖아요. 음, 굳이 조언하자면 인사를 많이 하는 것? 이게 별거 아니긴 한데… 의외로 연예계에선 많이 도움이 돼요."
수천 번을 연습 했다라….
나는 포비츠의 연습량을 떠올렸다. 수천 번은커녕 수백 번도 연습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기껏해야 80번 정도?
다른 걸그룹에 비하면 연습량이 턱없이 불안하지만,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평범한 여자들이 아니니까. 저번 연습에서도 완벽했으니, 무대에서도 완벽할 거야.'
그리고 인사? 나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할 예정은 없었다.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쇼콜라즈입니다. 포비츠에게 인사하러 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데이비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사마라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마라가 문을 열었다.
세련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핑크 러브와 같은 7명인 그녀들은 핑크 러브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는 포비츠를 향해 90도 허리를 꺾었다. 대충 고개만 숙인 핑크 러브와의 인사와는 천지 차이였다.
"안녕하세요, 쇼콜라즈입니다! 포비츠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참고로 쇼콜라즈는 3년 차 아이돌이었다.
나는 뒤에 서 있는 데이비드를 바라봤다. 나르 엔터테인먼트의 데이비드 실장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90도. 완벽한 직각 인사였다.
"데이비드입니다. 포비츠의 데뷔를 축하드립니다."
“어, 데이비드 실장.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성 PD님과 포비츠에게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설마하니, 핑크 러브가 먼저 와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음. 이제 곧 리허설이거든? 인사는 잘 받았으니 좀 나가. 복잡하잖아.”
"예. 뮤직킹덤의 PD와 스태프들에겐 제가 잘 말해뒀습니다."
"어 그래? 수고했어."
데이비드는 쇼콜라즈를 데리고 끝까지 정중함을 유지하며 사라졌다. 떠나는 쇼콜라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데이비드가 무슨 말을 지껄인 건지는 몰라도 나와 포비츠를 보는 눈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핑크 러브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다.
"쇼콜라즈 선배들이 이렇게 인사라니… 말도 안 돼…."
특히 연유리는 이게 꿈이라고 생각하는지 자기 손등까지 꼬집었다.
핑크 러브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낄 때였다. 사마라가 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핑크 러브와 쇼콜라즈의 악연은 꽤 유명합니다. 외부인들은 잘 모르지만… 핑크 러브가 데뷔할 때 인사를 똑바로 안 했다고 쇼콜라즈랑 싸웠거든요."
"말싸움이 있었나 보군."
"아니요. 몸싸움이었습니다. 서로 머리채 잡고 장난 아니습니다."
나는 그날을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핑크 러브는 충격받은 얼굴로 대기실을 떠났다.
"포비츠! 포비츠! 포비츠!"
무대 아래 관객석을 가득 채운 포비츠의 팬들이 소리쳤다.
포비츠의 팬들을 관리, 감독하는 건 사마라의 역할이었다. 나는 무대 뒤편에서 흥분한 팬들을 진정시키는 사마라의 고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팬들의 성비는 남자 반, 여자 반이군. 아니지. 여자가 좀 더 많나?'
최악은 남자 팬들만 덕지덕지 붙는 경우인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포비츠의 비주얼은 여자들의 관심도 끌 정도로 뛰어나지. 솔직히 내가 여자라도 그녀들의 비주얼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스마트폰을 들어 인터넷 여론도 확인했다.
릴리트가 제대로 밀어주기로 한 만큼 인터넷 기사에는 포비츠의 데뷔 소식이 도배되고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도 포비츠 데뷔라는 단어가 떴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데뷔 무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실시간 검색어 1위라고…?'
주작의 냄새가 났다.
'뭐, 나쁘지 않네.'
시간은 계속 흘려, 음방 시작 시간인 오후 5시로 향한다. 조연출이 나를 향해 소리친다.
"포비츠! 무대에 올라가 주세요! 방송 시작 2분 전!"
나는 멤버들을 향해 무대로 가라고 손짓했다. 포비츠가 무대로 향한다. 데뷔를 코앞에 둔 그녀들은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유리아마저도 표정이 알게 모르게 굳어 있다.
"와아아아아아아! 포비츠!!"
팬들이 환호한다. 그 환호성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방송 시작합니다!!"
조연출의 고함과 함께 커다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포비츠의 데뷔곡인 ‘'데이트'의 반주다.
'드디어 시작이군.'
그녀들이 무대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무대 의상을 입었음에도, 그녀들의 미모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4명의 요정이 무대 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들의 목소리와 동작에 점점 빠져든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녀들이 무대에서 내려온다. 지친 기색은 당연히 없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의 얼굴은 평소 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무대에서 가장 먼저 내려온 엘레나에게 물었다.
"가분이 어때?"
“나쁘지 않군."
엘레나가 대답했다. 살짝 상기되었던 그녀의 표정은 냉엄하게 변했다.
대기실에서 포비츠와 함께 음악 방송을 지켜봤다. 음방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건 음방 1위인 핑크 러브였다. 듣자 하니 3주 연속 1위라고 한다.
'다음 주에 핑크 러브를 넘어야 한다. 다음 주에 핑크 러브를 넘지 못하면 공략은 때려치워야지.'
초특급 신인, 포비츠.
데뷔전부터 말 많던 걸그룹이 데뷔했다.
6,700 구역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모두 음방을 실시간으로 포비츠의 데뷔 무대를 시청했다. '뮤직킹덤'의 시청률은 평균 50% 안팎인데, 포비츠의 데뷔 무대만큼은 그 시청률이 65%에 달했다.
"포비츠…. 엄청나다…. 연예계의 판도가 바뀌겠어."
"포비츠! 포비츠! 포비츠!"
"언니들, 아름다워요…."
“처음에는 그저 촌스러운 의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요정들이 무대에 강림했어."
"뭐지. 노래 자체는 가볍고 쉬운데… 멜로디가…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잖아!"
데비 무대와 함께 인터넷에 뮤직비디오도 공개되었다.
"가벼운 뮤직비디오네. 생각 없이 보기 딱 좋네."
“우와…. 비주얼은 진짜 역대급이다."
"비주얼도 좋고, 안무도 좋고, 노래도 좋고, 소속사도 대형 기획사인 릴리트 엔터고… 포비츠는 확실하게 뜨겠어."
"포비츠…는 정보가 왜 이렇게 적어? 덕질을 하려고 해도 콘텐츠가 없잖아."
“행사 같은 것도 뛰려나? 행사 뛰면 꼭 직관해야지!”
공개된 뮤직비디오의 조회수가 가파르게 오르기 상승하기 시작했다. 10만은 10분도 되지 않아 찍었고, 음방이 끝날 무렵에는 조회수가 무려 50만에 달했다.
실시간으로 조회수를 확인하고 있는 릴리트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대박! 대박이야!"
그녀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마우스를 클릭하며 인터넷 여론을 확인했다.
돈을 뿌린 기자들은 포비츠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미리 개설해둔 팬카페는 가입자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뮤비 공개 1시간 만에 조회수 50만! 이대로면 3시간 안에 조회수 100만을 찍겠지?!'
조회수 100만.
인구수가 1,000만인 6,700 구역에선 결코 가볍지 않은 숫자다.
'포비츠는 뜰 수밖에 없어!'
이미 확신하고 있는 사실을 재차 확신했다.
부르르르르.
노트북 옆에 두었던 스마트폰이 진동한다. 발신자를 확인한 릴리트가 웃으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어머, 국장님. 뮤직킹덤 시청률이 65%까지 올라갔다고요? 대박이네요. 아, 물론 알고 있어요. 이 정도 임팩트만으로 연예계를 장악하는 건 불가능하죠.”
포비츠의 존재감은 6,700 구역에 확실히 알렸다.
그리고 다음은 포비츠 멤버의 매력을 대중에 어필하는 것이다.
"프로그램 제안이죠? 걱정 마세요. 포비츠는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출연할 테니까요. 출연료요? 적당히 받을게요. 양심적으로요."
포비츠에게 방송 프로그램을 밀어준다.
TV에 자주 나오면 대중들은 싫어도 포비츠를 볼 수밖에 없었다. 대중들을 사로 잡는 건 포비츠의 몫이지만, 멤버들의 개성과 매력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릴리트는 성유진의 말을 떠올렸다.
'한 달 내로 6,700 구역을 지배권을 얻어낸다는 그 말….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릴리트의 시선이 노트북 모니터로 향했다. 뮤직비디오 속의 포비츠 멤버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가능할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