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8화 > 1358. 신의 아틀란티스
엘레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6,700 구역으로 왔다. 적어도 한나절은 걸릴 줄 알았는데… 그녀가 오기까지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연습실로 바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사실 너도 아이돌을 하고 싶었구나."
"웃기는 소리. 일하기로 정했으니 머뭇거리지 않는 것뿐이다. 입장권의 경우 찾아보니 가문 창고에 있더군. 예전에 가문을 찾아온 객이 선물이랍시고 주고 간 물건이다."
"진짜 선물이야?"
"진짜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선물이란 이름의 뇌물일 것이다. 자리가 높을수록 그런 선물이 많이 들어온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엘레나를 빤히 바라봤다.
"엘레나 맞지?"
"시시한 질문이군."
엘레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금 엘레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습과 좀 다르다. 환술을 이용해 외모 일부를 바꾼 것이다. 단발인 건 똑같으나, 파란색이었던 머리카락은 붉은색이었다. 파란색 눈동자는 현재 짙은 갈색 눈동자다.
이목구비도 살짝 변했다. 얼굴만으로 엘레나를 떠올리기 힘든 수준이다. 그러나 그녀 특유의 분위기는 엘레나, 그 자체였다.
"환술인 건 알겠는데… 좀 불안하지 않아? 그 정도로 네 정체를 가릴 수 있을까?"
"괜찮다. 사람의 인상이란 머리카락만 염색해도 확 바뀌는 법이다. 거기에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귀족들을 제외하면 내 얼굴을 알고 있는 평민은… 거의 없지."
엘레나는 앞으로 나서서 평민을 선동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환상공이란 이름에 걸맞게 신비주의다.
뭐, 어쨌든 그녀가 여기에 왔다는 건 모든 준비를 끝내고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철저한 엘레나이니 내가 그녀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유리아. 오랜만이군."
엘레나는 유리아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인재를 보는 눈이다. 유리아를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네. 오랜만입니다. 엘레나 님."
"너는 여전하군. 그리고 그 옆에는… 여우군."
유리아의 옆에는 미령이 있었다. 미령은 여우 귀와 꼬리를 구태여 감추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돌로서 데뷔할 때도 감추지 않을 것이다. 아틀란티스에서 수인은 흔하지 않지만, 드문 존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령의 여우 귀와 꼬리는 매력 포인트가 될 것이다.
"저한테는 미령이란 이름이 있다고요. 뭐, 여우지만요. 그런데 꽤… 특이하신 분이네요. 환술로 모습을 덧씌운 게 아니라… 신체 안쪽에서부터 환술을 이었네요?"
"호오. 그걸 알아본 건가? 보통 여우가 아니군."
"미령이라니까요."
“그래. 미령. 혹시 내 밑에서 일할 생각 없나? 네게서 유능함이 느껴지는군."
“싫어요. 일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아쉽군."
그녀들의 짧은 대화가 끝났다.
“얘들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서현이도 데리고 올게."
나는 연습실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본 그녀들은 팔짱을 끼며 서로를 보고 있었다. 어딘가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궁금했으나, 주서현을 데려오는 게 급했다.
'주서현, 유리아, 미령, 엘레나. 4명이 다 모일 줄이야! 이 연예계는 우리가 씹어 먹을 거야!'
새벽까지 내게 시달렸던 주서현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 잠자고 있었다.
주서현을 데리고 연습실로 돌아왔다.
주서현은 그녀들을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연습실에 모인 그녀들은 하나같이 모두 미녀였다. 주서현도 미모가 뛰어나지만, 이곳에 모인 그녀들은 외모만으로 연예계를 씹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레벨이었다.
"자, 얘들아. 리더 데려왔어."
나는 굳어 있는 주서현의 등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주서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그… 주서현입니다."
"유리아라고 합니다."
"엘레나다."
"미령이예요. 제가 막내죠. 잘 부탁해요, 서현 언니."
미령이 총총걸음으로 주서현에게 다가가더니, 먼저 주서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주서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령과 달리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나는 미령의 말 때문에 마음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막내가 미령이라고?'
내가 알기로 미령은 수백 살이다. 비록, 유리아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긴 하나, 막내가 될 나이는 절대 아니었다.
그때, 미령과 두 눈이 마주쳤다. 미령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윙크한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얘들아. 주서현이 그룹의 리더야. 불만 있는 사람?"
사실 리더라는 감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내가 그녀들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주서현에게 리더라는 감투를 준 건, 단순히 그녀를 중심으로 걸그룹을 만들 거라 그렇다. 이 걸그룹의 시작이 주서현이기도 했고.
"딱히 불만은 없어요. 아, 리더라고 해서 권력이 있는 건 아니죠? 리더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거나."
미령은 주서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주서현의 몸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른 걸그룹은 몰라도… 우리 그룹에서 너희 전원 평등해. 내 말을 들으면 돼."
"흐음. 권력이 없다면 굳이 리더가 될 이유는 없지."
엘레나는 리더 자리에 흥미를 껐다.
나는 혹시나 해서 유리아를 바라봤다. 유리아는 리더 자리에 관심 없을 것 같지만… 속단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내 예상을 깨고 리더가 되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저도 이견은 없습니다. 아이돌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니까요."
유리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이돌에 대한 지식만 따지면… 주서현이 더 모를 테지만. 나는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었다.
"유리아 언니랑 티아 언니의 의견이 이러니까… 우리 상관하지 말고 서현 언니가 리더하세요."
“…귀찮아서 내게 떠넘기는 것 같은데."
주서현은 감이 좋았다.
"…티아 언니?"
나는 저도 모르게 엘레나를 보며 되물었다. 엘레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가명이다. 설마 내가 본명으로 활동할 거라 생각했나?"
“아니, 그건 아니야. 당연히 가명을 쓰겠지. 근데 티아라니… 좀 안 어울려서."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고, 나는 그녀들을 불러 모았다.
무척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제 그룹 이름을 정해야 해. 좋은 아이디어 있는 사람?"
"저요! 여우시대 어때요?"
미령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나는 별로였다. 너무 별로라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퉷."
“서방님!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진짜 너무하시네요!"
“…서방님?"
의외의 호칭에 주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쏘아본다. 그러고 보니 호칭 문제도 있었다.
"걸그룹을 활동하는 동안 날 매니저님…. 아니, 프로듀서라고 부르도록. 그쪽이 더 듣기 좋네."
공식 활동 중 날 서방님이나, 주인님으로 불렀다가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일이 귀찮아진다.
"프로듀서! 나쁘지 않네요. 사실 그 호칭은 저도 듣고 싶지만, 서방… 아니, 프로듀서께 양보할게요."
"양보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네가 말한 여우시대 말인데… 별로야. 촌스러워."
“너, 너무 직설적이시네요. 그럼 프로듀서의 의견은 뭔데요?"
"나? 나는… 보지악."
"네?"
"보지악 말이야. 보지악. 별자리를 뜻하는 단어야. 내가 이래 보여도 보지 자리의 주인이거든. 그래서 보지악은 어감도 좋고, 별처럼 빛나는 너희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연 건 유리아였다.
“프로듀서님. 별자리… 황도 12궁을 뜻하는 단어는 보지악이 아니라 조디악입니다."
"어, 그랬나. 그럼 조디악으로."
“프로듀서! 조디악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커요. 조디악이라 불리는 연쇄살인마가 있거든요."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 그룹의 컨건셉인 청순함에 걸맞은 버진 플라워…. 어때?"
"우리가 쓰기엔 양심에 찔리는 이름이군."
엘레나가 질색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멤버들을 한 명, 한 명을 훑어보며 물었다.
"여기서 처녀인 사람 있나?"
"……."
"……."
"……."
누구도 손을 들지 못했다.
아이돌 걸그룹인데 모두가 비처녀였다. 전원 남자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남자는 나다.
"다른 의견은… 잘 모르겠는데. 너희도 의견 좀 내봐."
"프루커스의 여자들…. 어떤가요?"
유리아가 의견을 냈다. 굉장히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나는 마음에 들었지만 엘레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중들은 프루커스가 뭔지 모른다. 알게 되면 더 질색하겠지만… 걸그룹의 이름으로 알맞지 않군. 차라리 여우시대가 낫다."
“……그런가요."
“아이스바인 어떠냐? 이름도 예쁘고 단어가 입에 착 달라붙지."
"와인의 한 종류군요. 술의 이름을 사용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엘레나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는 주서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견을 말하지 않은 건 그녀뿐이었다. 다른 멤버들도 주서현을 바라봤다. 주서현은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세이버. 지금 떠오르는 건 그 정도뿐이야."
“서현 언니! 걸그룹 이름이 세이버라뇨!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여우시대 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여우시대가 어때서요?!"
"여우시대는… 너무 나이 들어 보이잖아.”
"나이 들어 보인다니…."
미령은 충격받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들고 떠오르는 이름들을 나열했다. 여러 가지 이름이 나왔으나,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연습실 문이 열리고 릴리트가 들어왔다.
"성 매니저! 문자 봤어. 멤버 전부 모았다며? 주서현 급은 되겠지?"
말을 쏟아내며 들어온 릴리트는 연습실 중앙, 내 주위에 모여 있는 멤버들을 보고 두 눈을 치떴다. 그녀는 유리아, 미령, 엘레나를 차례대로 바라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판타스틱…. 성 매니저! 완전 대박이야! 대체 이런 여자들은 어디서 모은 거야?! 비주얼만 따져도 이미 탑급이잖아! 내 감이 말해주고 있어! 데뷔만 해도 바로 똘 거야! 끼야아아아아앗!"
릴리트는 지나칠 정도로 좋아했다. 괴성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뛸 정도였다.
"대표님.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나는 걸그룹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흐응? 아직 이름 못 정했어? 대표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포비츠 어때?"
"포비츠요?"
"금단의 열매. 포비든 후르츠를 줄인 말이야. 그리고 4명이니 포(four) 비츠(beats). 괜찮지 않아?"
포비츠. 포비츠. 포비츠.
그 이름을 입안에 굴리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을 둘러보니 모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대표님, 좀 치시네요."
릴리트는 피식 웃더니 허리에 손을 올리고 외쳤다.
"성 매니저! 나 릴리트 대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