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3화 > 1343. 고스트 로맨스
팔짱을 끼며 허허벌판을 바라봤다.
산이 통째로 사라지며 시야가 탁 트였다. 백귀야행의 영향으로 어두워졌던 하늘은 다시 맑아졌고, 태양은 눈부시게 빛난다.
'이게 내가 만든 광경이라 말이지.'
산 하나를 통째로 없애버리는 규격 외의 힘!
뇌천류(雷天流) 극기(極技) 뇌천명(雷天命).
물론, 이 힘은 현실에서 사용하기 힘들었다. 현실의 내 스펙이 지금의 내 스펙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 기술을 못 쓴다고는 생각 안해. S급 정도가 되면… 사용할 수 있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S급 이상으로 강해질 것이다. 유희 생활 어플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이 감각을 기억해야지.'
내가 만든 극기인 뇌천명은 사실 기술이라고 하기엔 뭐 했다. 그 위력은 대단하나, 그 구조는 심플 했기 때문이다.
'그 원리는 뇌천류(雷天流) 뇌명(雷鳴), 두 개 이상의 뇌전을 공명시키는 기술이지.'
그냥 공명하는 것도 아니다. 공명시키는 뇌전을 완벽히 통제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현실 기준으로 뇌명의 한계는 대충 뇌전 6개. 무리한다면 뇌전 8개를 공명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뇌천명은 수천 줄기의 벼락을 하늘에서 공명시킨다. 통제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방향성을 정하는 것뿐이다.
'뇌전이 워낙 많다 보니, 시작만 잘 잡으면 뇌전을 통제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공명하는 거지.'
뇌천명의 원리는 심플하다.
그리고 심플한 문제도 있었다.
'에너지. 수천 줄기의 벼락을 생성할 에너지가 문제야. 그리고 한번 공명을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 이건 별로 문제가 아니군.'
S급 헌터의 마나로 뇌천명을 사용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지금 내가 뇌천명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수백 마리의 귀신들이 죽으며 발생한 귀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공명하는 뇌전을 줄이면 위력이 제대로 안 나올 테고…, 애초에 공명도 중간에 실패할 수 있어. 마나 능력치만 죽어라 올리는 게 답인가?'
곰곰이 생각한다. 뇌천명은 내가 처음으로 만든 뇌천류의 극기라 애착이 간다.
그때, 푸른 하늘의 저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구름이 보였다.
'구름…. 그래. 뇌운을 이용하면 대량의 마나 소모 없이도 뇌천명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근데 그런 환경이 잘 갖춰지는 건 아니란 말이지. 역시 구름을… 아니, 기상을 다루는 힘이 있으면 편할… 음?'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만이 아니다. 실제로 내 미간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그것은 나와 5m 정도 떨어진 정면에 형체를 취한다.
검은색 장발의 근육질 사내.
드라큘라처럼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삐죽 삐져나왔다. 피부는 잿빛에 가까운 검은색이다. 공막은 검은색이고, 홍채는 붉은색이다. 흔히 말하는 마족 눈깔이다. 그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내가 손에 쥔 참귀도와 똑같이 생겼다.
"너, 도진이냐."
“그렇다."
"뭐야, 나올 수 있었어?"
"귀기를 이용해 잠시 실체화했을 뿐이다. 나의 진짜 영혼은 여전히 네 정신 속에 있다."
“내 몸에 대한 미련은 포기했나?"
"웃기지 마라. 그 육체는 내가 만들었다. 빌어먹을 항아리 속에 갇혀 있을 때 모으고 모은 귀기를 이용해 환골탈태시킨 게 나다!"
"확실히 육체가 좀 좋아지긴 했어. 근데 내 몸은 내 거다."
도진에게 몸을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몸은 내 것이다. 주도권은 내가 꽉 쥐고 있다. 도진이 귀기를 사용해 실체화 한 것도 그 때문이고.
“…아니, 잠깐. 내 허락 없이 내 귀기를 사용해 실체화한 거잖아."
"네 귀기? 어이가 없군. 그 귀기도 내 것이다."
"지랄."
나는 몸 상태를 살폈다.
귀기가 1할 정도 줄어들었다.
'저놈이 사용할 수 있는 귀기가 1할 정도인가.'
도진이 허공에 칼을 획획 휘두른다. 나를 보는 눈에는 투지와 살의가 가득하다.
"당분간은 네게 육체의 주도권을 넘기겠다. 그러나 나는 언제고 다시 내 육체를 기필코 되찾을 것이다."
"내게 계속 붙어 있겠다는 거군.”
"왜. 내가 떠날 거라고 기대했나?"
"아니, 안심했다. 네가 떠나면 귀기를 못 쓰잖아."
귀기는 귀신의 힘이다.
귀신이 아니면 사용하지 못한다. 도진이 내 몸에서 사라지면, 난 육체만 좋은 인간이 될 뿐이다.
'귀기가 얼마나 편리한 힘인지 알았는데… 놓아줄 것 같냐.'
솔직히 남자 새끼가 내 정신에 기생한다는 건, 심히 불쾌하다. 그러나 귀기를 사용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유진.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네 안에서, 너를 분석하며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이 몸이 너를 뛰어넘는 순간. 그 육체는 다시 내 차지가 될 것이다."
"평생 그럴 일 없겠군.”
"하, 언제까지 그 여유가 이어질지 궁금하군."
도진이 자세를 잡는다.
무게 중심을 살짝 아래로 내린 자세.
내겐 익숙한 자세였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을 사용할 때 취하는 자세다. 물론, 뇌천류는 어느 위치에 다다르면 초식의 구애를 크게 받지 않는 무공이라, 자세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놈이 뇌천류를 흉내 냈다는 것.
파직, 파지직.
도진의 칼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뇌광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뭐,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상대해주마."
나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도진이 뇌천류를 사용한다고 해서 나와 똑같아지는 건 결코 아니다. 육체의 성능, 뇌기의 총량. 그 모든 게 내가 압도하고 있다. 게임으로 치자면 레벨 10에 불과한 도진이 레벨 100인 나를 상대하는 것이다.
“잘 들어라. 일격필살이다. 방심하면 너라도 치명상을 입을 거다."
"방심? 방심하는 건 너겠지."
키잉.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나는 도진을 지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도진은 다급히 내게 칼을 휘둘러 반격했다. 두 개의 번개 궤적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이기는 건 당연히 나의 뇌광이었다. 도진은 크게 베여 피를 사방에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진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느리구나… 쓰러지는 것조차.”
“크어어억… 이 새끼가…!”
“너무 강한 말은 쓰지 마, 약해 보이니까."
“언젠간… 기필코…!!”
도진이 분해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급히 귀기를 움직였다. 귀기가 가슴팍에 보인다. 도진에게 살짝 베인 상처가 있었다.
'시발. 쪽팔리게. 이건 들킬 수 없어.
귀기를 잔뜩 사용해 회복력을 높이자,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튼 내 정신에 기생하고 있는 이상… 내 명령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거다."
"…힘의 논리인가.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네놈에게 어울려주마…."
도진이 실체화한 육체는 귀기로 변하여 사라졌다.
『Day 5 체크 포인트가 저장되었습니다.』
Day 5의 날이 밝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거추장스러운 장발을 자르고 잤다. 혹시 모를 변수의 발생을 막기 위해 4일째를 서둘러 보낸 것이다.
'이걸로 또 Day 4를 보낼 필요는 없겠지.'
Day 5.
오늘은 결전의 날이었다.
나는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거리에서 신오정과 마주쳤다. 신오정은 나를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가 더 커지고 피부가 더 하얘졌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심심했던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신오정에게 말했다. 어제 일을 숨길 이유도 딱히 없었고.
"본가에 봉인되어있던 나찰귀를 받아들여 백귀야행을 처리했다고?!"
대충 지껄인 신오정은 두 눈을 반짝이며 주먹을 쥐고 잔뜩 흥분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된다는 말인가… 크흑. 니체 센세의 말이 옳았군!”
"존나 좋아하네."
신오정. 이놈은 리액션이 꽤 재밌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놈은 선을 넘지 않는다.
"귀기는 어떻게 이용하나? 역시 정석대로 신체 강화와 염력?"
"신체 강화는 기본이고… 염력은 모르겠고 이런 건 할 수 있지."
파지지직.
손바닥 위에 뇌전을 일으켰다. 신오정의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심호흡을 반복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번개요정 성유진…!"
“이 새끼가."
갑자기 선 넘네.
빡!
신오정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한 대 맞은 신오정은 기죽지 않고 내 옆을 걸었다. 그는 어젯밤에 인터넷으로 수집한 정보를 쫑알거렸다. 이 동네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있는 귀신들에 대한 정보들이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내가 그동안 귀신을 퇴마했던 건 귀기도를 낮춰 설녀를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귀신의 힘을 얻은 이상 귀찮게 퇴마를 위해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교정을 넘은 나는 바로 방향을 틀어 설지영의 반으로 향했다.
"지영 선배 없어요?"
“지영이? 아직 안 왔어. 평소에는 가장 먼저 등교하던데… 오늘은 좀 늦네."
늦은 게 아니라 오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수작을 부렸겠지.
나는 서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내가 굳이 학교에 와서 설지영을 찾은 건, 설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원작에서 설녀는 미녀였으니까.'
그래서 기회를 줬다.
그 야욕을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면 조용히 봐주려고 했다.
'기어코 나랑 해보겠다는 거지. 뭐, 어디에 있을지는 뻔해.'
나는 학교를 나와 폐병원으로 향했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귀기가 훨씬 많이 느껴진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동네에 있는 모든 귀신을 끌어모았군. 마지막 저항인가? 아, 내가 백귀야행을 처리한 걸 알고 있나?'
어쩌면 백귀야행도 설녀의 짓일지도 모른다. 설녀의 출신은 일본이니까.
'설녀가 백귀야행에 언질을 줬기에 백귀야행이 예언을 이유로 날 죽이려고 한 걸지도 몰라.'
뭐, 지금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백귀야행은 죽었고, 설녀는 날 감당할 수 없다.
나는 챙겨온 참귀도를 손에 들고 폐병원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