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1화 > 1341. 고스트 로맨스
도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백 마리의 귀신들이 보인다.
백귀야행이라고 해서 딱 백 마리의 귀신들만 있는 게 아니다. 백귀야행이란 단어는 상징적인 것에 가깝다. 실제 귀신의 숫자는 수백 마리, 수천 마리가 될 수 있었다.
'어림잡아도 300이 넘는군.'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되었다.
60년 동안 항아리에 봉인되어 있으며 농축된 귀기가 꿈틀거린다. 이 뛰어난 육체와 참귀도라면 수백 마리의 귀신이라도 혼자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도진은 투지를 불태웠다. 그렇다고 멧돼지처럼 무작정 돌진하지 않았다. 하늘은 공간이 뻥 뚫려 있었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공격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 될 것이다. 흥분하더라도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놈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올 것이다.
"나찰귀."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백귀야행의 귀신들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기모노를 입은 노인이 앞으로 나선다. 인간이라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비대한 머리를 가진 그 요괴는 보이는 것과 달리 어마어마한 귀기를 가지고 있었다.
도진은 저 노인이 백귀야행을 이끄는 누라리횬임을 바로 알아봤다.
"몇십 년 전에 이 반도에서 날뛰던 나찰귀의 소문을 들은 적 있다. 그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너로군."
“그렇다. 내가 바로 나찰귀 도진이다."
그들의 대화는 일본어도, 한국어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인간은 사용할 수 없는 언어. 귀신의 언어였다. 귀신에 씌인 성유진은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희에 대한 소문은 수백 년 전부터 들어왔다. 열도에 자리 잡았으면서 뭐 하러 반도에 행차한 것이냐?"
"우리는 네가 빙의한 인간을 죽이러 왔다."
“원환 관계인가?"
"아니다. 그 인간과 우리들은 아무 관계 없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그저 우리는 그 인간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크하하. 요컨대 그거냐? 전초제근? 고작 인간 하나를 두려워하다니… 백귀야행도 갈 만큼 갔군."
"…우리 쪽에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귀신이 있다. 그가 말하기를. 그 인간을 내버려 두면 수천, 수만의 귀신이 당할 수 있다더군. 그리고 이미 그 인간은 지난 사흘 동안 수십 마리의 귀신을 퇴치했다. 일류의 퇴마사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 인간은 여기서 죽어야 한다."
적개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누라리횬의 태도에 도진은 감탄사를 흘렸다.
"보통 인간은 아닌 줄 알았으나,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나찰귀여, 그 인간의 몸에서 나와라. 우리와 너는 같은 귀신이다. 서로에게 칼을 겨눌 필요는 없다. 오니를 벤 것은 용서하마. 너는 사정을 몰랐고, 오니는 너무 성급했으니."
“거절한다. 이 몸은 이제 내 것이다. 너희 중에 예언가가 있다고 했나? 다시 예언해라. 내가 이 육체를 차지한 이상… 너희가 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누라리횬은 팔짱을 꼈다. 그가 백귀야행을 돌아본다.
"쿠단."
백귀야행의 무리 중에서 소의 몸과 사람의 얼굴을 한 귀신이 앞으로 나섰다.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요괴였다.
"미래가 바뀌었나?"
쿠단은 느릿하게 바라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 인간은 귀신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도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딴 게 예언이라고? 저건 그저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에 불과하다.”
"나찰귀여, 쿠단의 예언은 적중률이 9할 이상이다."
"1할은 개소리라는 거군.”
"9할의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나찰귀여, 그 인간의 몸에서 나와라. 우리는 같은 귀신인 너와 대립할 생각이 없다."
도진은 참귀도를 들어 누라리횬을 가리켰다.
“몇 번을 말해야 하지? 이 육체는 이제 내 거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 그 육체를 버려라. 인간의 육체야 얼마든지 다시 구할 수 있지 않나.”
"하하하. 아무것도 모르는군. 이 정도로 상성이 좋은 육체를 구하는 건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도 불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군. 너도 귀신일 터인데, 왜 인간의 육체에 집착하는 거냐?"
"살아 숨 쉬는 감각은 마약과도 같다. 한 번 맛보면 절대로 못 끊지.”
누라리횬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오른손을 들었다. 백귀야행에 속한 귀신들이 귀기를 내뿜으며 투지를 일으킨다. 도진은 씨익 웃었다. 전투를 앞둔 그의 몸이 흥분으로 덜덜 떨린다.
"나는 너와 같은 귀신으로서의 도리를 지켰다. 그렇게 그 인간의 육체가 좋다면… 그 인간과 함께 죽어라."
백귀야행의 무리 속에서 세 마리의 귀신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긴 코에 검은 날개를 가진 다이텐구.
개의 얼굴을 한 이누가미.
거대한 해골인 가샤도쿠로.
백귀야행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도진에게 달려든 것이다.
"나찰귀 도진! 네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얼마나 강한지 궁금했었다!"
"네놈을 잡아먹고 더 강해지겠다."
“흐흐, 흐흐흐…. 이놈은 내 먹이다…!"
도진은 그들을 비웃으며 참귀도를 크게 휘둘렀다.
"잡귀 놈들이…. 옛날이었다면 네놈들 따위는 내 그림자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죽어라!"
귀기가 압축되어 형성된 거대한 검기가 세 마리의 요괴들을 향해 날아간다. 그러나 요괴들은 가뿐하게 도진의 검기를 피했다. 다이텐구는 위로 날아서, 이누가미는 땅을 달리며, 가샤도쿠로는 거대한 몸에 맞지 않게 가볍게 점프했다.
당황하는 도진에게 누라리횬이 웃으며 말했다.
"나찰귀여. 반도와 열도는 다르다. 퇴마사가 강세인 반도와 달리 열도는 귀신들의 땅이다. 귀신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기에 귀신들 간의 영역싸움은 늘 있는 일이었지. 평화에 찌든 반도의 귀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누라리횬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바람을 타고 날아온 다이텐구가 도진의 뒤를 점했다. 그의 주먹이 도진의 등을 때린다. 도진은 공격을 허용하면서도 반격했다. 참귀도가 다이텐구의 오른팔을 베어낸다.
“흐흐흐….”
위에서 가샤도쿠로의 거대한 뼈로 된 손이 도진을 찍어 누른다. 도진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격렬하게 다리를 움직여 가샤도쿠로의 손을 피했다. 역으로 팔을 타고 올라가 가샤도쿠로의 해골 이마에 칼을 찔러넣는다.
"나는 나찰귀 도진이다! 이 빌어먹게 큰 해골을 시작으로 네놈들 전원 베어 죽여주마!"
도진은 호기롭게 외치며 가샤도쿠로의 머리를 베려고 했다. 그러나 이마에 박힌 칼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샤도쿠로의 내구성이 상상 이상이었다.
-뭐해, 등신아. 아래에서 온다.
성유진의 목소리에 다급히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이누가미가 길쭉한 주둥이를 벌리며 뛰어오고 있다. 도진은 귀기를 사용했다. 귀기가 그의 몸을 감싼다. 직후, 그의 몸이 지상에 다시 나타났다. 도진의 비장의 기술인 축지였다.
도진은 땅을 박차고 무방비한 다이텐구의 뒤를 노렸다. 다이텐구는 품에서 깃털 부채를 꺼내더니 휘둘렀다. 바람이 도진의 몸을 때렸다. 바람의 칼날에 도진의 몸에 자잘한 상처가 일어났다. 피부가 찢어지며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크으윽….”
상당량의 피를 흘린 도진이 비틀거렸다.
“나찰귀여, 너는 강하다. 그러나 너무 무식하다. 수십 년의 차이인가. 너의 동작은 세련되지 못하다. 1대1이라면 모를 일이지만, 1대 다수는 네게 맞지 않는 모양이군.”
누라리횬의 목소리는 도진의 성질을 건드렸다.
"닥쳐라! 이놈들을 베고 난 뒤, 네놈의 목도 곧 베어주마!”
"후우. 어리석은 것…. 네놈의 패인은 네가 혼자라는 거다. 지금이라도 그 육체를 버리고 내게 고개 숙인다면 나의 백귀야행에 들어올 기회를 주겠다."
"네놈의 백귀야행은 이곳에서 끝난다. 이 내가 끝낼 것이다!"
누라리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왼손을 들자, 하늘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무수히 많은 귀신이 일제히 도진을 향해 떨어졌다.
"크헤헤! 나찰귀를 죽인다!"
“나찰귀를 죽이면 간부가 될 수 있어!"
"약해빠진 나찰귀!"
도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참귀도를 휘둘렀다.
"이 빌어먹을 잡귀 놈들이…!"
힘이 약한 귀신들은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참귀도에 베여 쓸려나간다. 그럼에도 귀신들은 물러나지 않고 도진에게 달라붙었다. 도진은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드는 잡귀를 씹어 삼켰다.
누라리횬은 도진의 전투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오호. 사람을 먹는 나찰이 귀신을 먹어 귀기와 체력을 회복하는가…. 대단하군. 그야말로 투신이로다. 허나, 나의 백귀야행에 대적할 수는 없다."
도진은 귀신들을 향해 계속 칼을 휘둘렀다. 잡귀들은 그의 칼을 피하지 못하고 절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잡귀들 속에 섞여있는 진짜들이다. 도진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들이 잡귀무리에 섞여 도진을 공격한다.
"커으으윽!"
도진의 복부에 갓파의 박치기가 박혔다. 뒤로 쭉 날아간 도진은 돌덩어리에 등을 부딪쳐 바닥에 쓰러졌다.
-뭐 하냐.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아예 개쳐발리고 있잖아. 그럴 거면 내게 몸을 넘겨라. 칼질이 무엇인지 네게 똑똑히 보여주지.
“시끄럽다…. 인간 주제에 네놈이 뭘 할 수 있다고 하는 거냐 이 몸은 내 것이다."
도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3번의 환골탈태를 겪은 육체는 이미 상처 대부분을 회복하고 있고, 부족한 귀기는 잡귀를 씹어 먹어서 빼앗으면 된다. 아직 얼마든지 더 싸울 수 있다.
푸드드득.
발아래에서 썩은 나무뿌리가 튀어나오더니 도진의 몸을 휘감았다. 도진은 당황했다. 축지를 써서 물러나는 건 불가능했다.
축지를 쓰려면 일단 발을 움직여야 했으니까.
"크헤헤헤! 지금이다! 놈을 죽여!"
근처에 있는 나무가 천박한 웃음을 터트리며 외친다. 나무인 척 모습을 숨기고 있던 귀신 나무였다.
"이런 젠장…."
수십 마리의 잡귀가 동시에 도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힘을 원하나?
머릿속의 인간이 개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짜증이 난 도진은 소리치려고 했다. 귀기를 터트려 자신에게 달라붙은 잡귀를 단번에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생각만큼 움직이지 않는다.
'아직 그 정도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병신 새끼. 진짜 못 싸우네. 도저히 안 되겠다. 내 몸 내놔.
육체의 주도권이 성유진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 자식. 설마 처음부터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데도 내게 넘기고 있었던 건가?! 대체 왜?!'
성유진은 도진의 생각을 듣고 있음에도, 그 의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 마라, 성유진! 네놈은 귀기를 다루지 못한다! 이대로 육체의 주도권을 가져봤자 저 잡귀놈들에게 죽을 뿐이다! 개죽음을 원하는 거냐?!'
-병신아. 그 반대다. 네놈이 죽을 것 같으니 내가 나서는 거다.
도진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육체의 주도권은 결국 성유진에게 넘어갔다.
파지. 파지직.
귀기가 뇌기로 변해 시퍼런 스파크가 튀었다.
뇌천류(雷天流) 전자기막(電磁氣幕) 최대출력.
뇌전으로 이루어진 원형의 전자기막이 일시적으로 커지더니 달라붙은 잡귀들을 일제히 밀어냈다. 밀려난 잡귀 대부분은 뇌전에 감전되어 죽었다. 성유진은 살아남은 잡귀들을 향해 친히 칼을 휘둘러줬다.
도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험이 담긴 참격에 잡귀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썰려 나갔다.
"좋군. 현실의 내 몸보다 훨씬 나아."
성유진은 자신을 둘러싼 귀신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