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2화 > 1332. 고스트 로맨스
『1. 빨간 마스크를 퇴마한다.』
『2. 도망친다.』
『3. 빨간 마스크에게 살려달라고 빈다.』
『1. 빨간 마스크를 퇴마한다. V』
선택지를 고른 순간 몸이 멋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몸을 강제하는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싸우는 건 알아서 하라는 거군.'
오히려 잘 됐다. 시스템의 개입은 불쾌할 뿐이다. 나는 퇴마봉을 흔들며 빨간 마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빨간 마스크는 내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자 코트 속에 손을 쑥 넣더니 식칼을 꺼냈다.
"키에에에에엑!"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나를 향해 뛰어온다. 나는 퇴마봉을 꽉 쥐고 빨간 마스크에 맞섰다.
'…팔을 휘두르는 속도가 사람보다 훨씬 빠르군.'
일반인은 빨간 마스크의 공격에 대응하기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 휘둘러지는 팔이 너무 빨라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꼭 휘둘러지는 팔을 볼 필요는 없다. 빨간 마스크의 시선과 어깨의 방향만 보면 어느 방향으로 휘두를지 예측할 수 있다.
까앙!
퇴마봉과 식칼이 부딪쳤다. 주춤거리는 건 빨간 마스크 쪽이었다. 퇴마봉에 힘을 주어 식칼을 쳐냈다.
퇴마봉을 힐곳 바라봤다. 기스 하나 나지 않았다. 이거 하나 있으면 귀신 따윈 다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다.
"키에에에엑!"
빨간 마스크가 다시 달려든다. 이번에도 시선과 어깨의 방향을 보며 공격 방향을 예측한다.
'목을 노리는군. 이번에는 막지 않고 피한다.'
고개를 숙인다. 머리 위로 빨간 마스크의 식칼이 획 지나갔다. 나는 퇴마봉을 번쩍 들어 빨간 마스크의 머리를 후려쳤다.
“뚝배기! 뚝배기! 뚝배기!"
"커억! 키엑! 컥!"
뚝배기가 깨진 빨간 마스크가 피를 흘리며 다리를 비틀거린다. 그러면서도 나를 향해 식칼을 휘두른다. 공격 본능 하나는 대단하다.
그래도 머리가 깨져서 그런지 식칼의 경로가 훤히 보인다. 나는 빨간 마스크의 공격을 피하며 퇴마봉을 계속 휘둘렀다.
"머리! 어깨! 허리! 허벅지! 무릎!"
퍽퍽퍽퍽퍽!
골고루 때려준다.
"끼에에엑…."
빨간 마스크가 식칼을 떨어뜨리며 넘어졌다. 나는 빨간 마스크 위에 올라타 퇴마봉을 계속 휘둘렀다.
빨간 마스크는 움직일 힘도 없어진 듯 몸만 간헐적으로 떨었다. 마무리를 지으려던 찰나… 문득 빨간 마스크의 굴곡진 몸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몸매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코트와 옷을 전부 벗긴다. 벗겨보니 몸은 시체 같았다. 그래도 있을건 다 있었다. 젖꼭지라던가, 보지라던가.
“보지가 파란색이잖아. 으음. 박을까. 말까."
유세미, 지다혜, 설지영.
끝내주는 미녀 히로인 셋이 있는데 이런 못생긴 귀신에게 내 자지를 박아야 하나?
“지금 나는 정력이 무한하지 않단 말이지…. 이 못생긴 년에게 박았다가 나중에 정력이 부족해지면 너무 손해야.”
"키에에엑!"
빨간 마스크가 물고기처럼 몸을 펄떡거리더니 상체를 들어 올렸다. 찢어진 입을 크게 벌리고 내 목을 물어뜯으려 시도한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빠악!
퇴마봉으로 정의를 선사했다. 빨간 마스크의 삐죽삐죽한 이빨이 후두둑 떨어졌다.
“건방진 년. 곱게 끝내려 했더니… 감히 기습을 해?”
『1. 빨간 마스크를 마무리한다.』
『2. 빨간 마스크를 봐준다.』
갑자기 선택지가 떠올랐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런 선택지가 뜨는지 모르겠군. 빨리 마무리 짓지 않고 놀고 있어서 그런가?'
선택지가 말하는 마무리는 내가 생각하는 마무리가 아닐 것이다.
'룰 브레이커를 쓴다.'
『†당신은 룰 브레이커를 사용합니다.』
"페이탈리티!"
천장을 향해 퇴마봉을 번쩍 든 나는 빨간 마스크의 오른 다리를 잡아 강제로 들어 올렸다.
"끼에에엑?!"
자연스럽게 빨간 마스크의 파란 보지가 벌어진다. 나는 퇴마봉을 역수로 지고 보지를 향해 내려찍었다. 단숨에 보지와 자궁을 박살 냈다. 좀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다. 페이탈리티는 원래 그런 것이니까.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빨간 마스크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른다. 나는 퇴마봉을 꺼내 비명을 지르는 빨간 마스크의 오른쪽 눈에 찔러 넣었다. 눈동자는 물론이고 뇌까지 뭉개지는 감촉이 느껴진다.
『†당신은 빨간 마스크를 처형했습니다.』
『†당신의 잔혹함이 귀신들에게 퍼져나갑니다.』
『†빨간 마스크는 지옥에서 당신을 저주합니다.』
『†이 지역의 귀기도가 하락합니다.』
빨간 마스크가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진 빨간 마스크의 이빨이나, 퇴마봉에 묻은 빨간 마스크의 피도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후. 상쾌하군."
그동안 일이 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아서 스트레스가 쌓였었는데, 이번에 빨간 마스크를 처리하며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풀렸다.
"다음은…."
보일러실 옆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은 잠겨 있었다.
'원작 게임에서는 열쇠가 필요하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나는 퇴마봉으로 창고 창문을 깨부수고 안으로 침입했다.
"여기 있군."
내가 찾은 건 시너통이었다. 이게 꽤 쓸 곳이 많았다.
나는 시너통을 들고 4층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4층은 미술실, 과학실 등이 있어서 평소에는 사람이 없는 곳이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과학실에 들어갔다. 원작 게임처럼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성냥을 들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온다.
'4층 남자 화장실. 가장 안쪽에 있는 4번째 화장실 칸막이….'
화장실 칸에 들어왔다. 문을 잠그고 변기를 노려보며 잠깐 기다렸다.
-흐 , 흐흐흐흐흐흐.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섬뜩한 웃음소리다. 괜히 목덜미가 간지러워졌다. 나는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슥슥 비볐다.
덜컥덜컥덜컥!
변기 뚜껑이 덜컥거리더니 열렸다. 물이 있어야 할 변기에는 시커먼 공간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어두운 공간에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존재한다.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세계가 멈춘다.
『1. 빨간 휴지를 요구한다.』
『2. 파란 휴지를 요구한다.』
『3. 하얀 휴지를 요구한다.』
『4. 비데를 요구한다.』
『5. 똥까시를 요구한다.』
『6. 선물을 준다.』
무려 6개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원작대로군.'
여기서 빨간 휴지를 달라고 하면 몸이 찢겨 죽는다. 파란 휴지는 변기물에 익사해 죽는다. 하얀 휴지는 내장과 피가 털린다.
비데를 원하면 변기 속으로 끌고 간다. 똥까시를 해달라고 하면 빡친 귀신이 나타나 산 채로 잡아먹는다.
'사실상 이놈과 마주한 순간부터 배드엔딩이지. 죽는 선택지밖에 없으니까.'
원작에서는 퇴치하지 않더라도 스토리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귀신이다.
'하지만 퇴치하면 귀기도를 낮출 수 있지.'
『6. 선물을 준다. V』
시너통의 뚜껑을 열어 변기통에 그대로 시너를 콸콸 부었다. 그리고 성냥 한 개비에 불을 붙여 변기통에 던졌다.
화르르르륵!
불타는 변기가 완성됐다.
-끼야아아아아아악!
귀신이 비명을 내지른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활활 타오르는 변기통을 내려다봤다.
『†당신은 화장실 휴지 귀신을 처형했습니다.』
『†당신의 잔혹함이 귀신들에게 퍼져나갑니다.』
『†화장실 휴지 귀신이 지옥에서 당신을 저주합니다.』
『†이 지역의 귀기도가 미약하게 하락합니다.』
시너통은 화장실에 버려뒀다. 어차피 내가 한 짓인지 모를 거다. CCTV는 피했고, 증거는 딱히 남기지 않았다. 땡땡이를 쳐서 알리바이가 없긴 한데…. 경찰이 나서도 내가 안 그랬다고 잡아떼면 된다. 어차피 이 세계의 경찰은 무능하다.
바로 과학실을 향했다. 과학실 뒤편에 서 있는 인체 모형을 향해 걸어간다.
과학실에 있는 인체 모형이 살아 움직인다.
라는 이야기는 살아가다 한 번쯤 들어볼 정도로 유명하다.
절반은 뼈, 절반은 인간의 내장이 보이는 인체 모형 앞에 섰다.
덜그럭덜그럭.
인체 모형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의 하나밖에 없는 눈동자가 기괴하게 회전하며 나를 바라본다.
『1. 인체 모형 귀신을 퇴마한다.』
『2. 도망친다.』
빨간 마스크 때도 뜬 선택지였다.
여기서 2번인 도망친다는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귀신 놈들은 집요해서 집까지 쫓아 온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집까지 쫓아온 놈들에 의해 죽는다. 그러니까 싸워서 퇴마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공략법을 숙지하고 있으면 매우 쉽게 퇴마할 수 있다.
원래 인체 모형 귀신을 퇴마하는 방법은 전신 거울을 가져오는 것이다. 무용실에 있는 전신 거울을 본 인체 모형은 그대로 깜짝 놀라 사라진다. 근데 거울을 가지러 가기 귀찮았다.
『1. 인체 모형 귀신을 퇴마한다. V』
덜그럭덜그럭.
인체 모형이 움직인다.
나는 퇴마봉을 들어 인체 모형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빠악!
"퇴마! 퇴마! 땅땅! 퇴마퇴마땅땅!!!"
땅땅땅!
나는 신명나게 인체 모형 귀신을 후려쳤다.
『†당신은 인체 모형 귀신을 처형했습니다.』
『†당신의 잔혹함이 귀신들에게 퍼져나갑니다. 귀신들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인체 모형 귀신은 지옥에서도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이 지역의 귀기도가 미약하게 하락합니다.』
오후4시 44분.
학생들의 하교가 거의 끝나 학교가 지독하리만큼 고요해지는 시간이었다.
음악실에서 피아노 음악 소리가 울린다. 음악은 그 유명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다.
『1. 피아노 귀신과 마주한다.』
『2. 도망친다.』
『1. 피아노 귀신과 마주한다. V』
나는 음악실 문을 확 열고 들어갔다. 음악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아노가 저절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피아노를 바라봤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귀신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놈을 나를 노려보고 있다.
"피아노 존나 못 치네."
쾅!
놈이 분노를 표하듯 피아노 건반을 강하게 두들겼다.
나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 귀신에게 말했다.
"불합격입니다. 당신의 연주에는 소울이 없어요. 소울. 즉, 스웩이 없단 말입니다."
귀신은 내 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아노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유튜브 영상을 하나 켰다.
한국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영상이었다. 피아노 귀신은 영상을 보더니 고개를 떨궜다.
"수준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당신은 피아노 귀신에게 절망을 안겨줬습니다.』
『†당신의 잔혹함이 귀신들에게 퍼져나갑니다. 귀신들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피아노 귀신은 두 번 다시 피아노를 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지역의 귀기도가 미약하게 하락합니다.』
밤 11시 58분.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남았다. 신오정과 함께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스마트폰이나 만지고 있었다.
“성유진. 슬슬 시간이다. 준비해야 한다."
"아씨. 집에 가야 하는데 왜 하필 12시만 가능하냐고…."
나는 투덜거리며 신오정과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돼지 새끼랑 마주 보고 앉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책상 위에 하얀 도화지를 올려두고, 그 위에 볼펜을 세웠다. 세운 볼펜은 나와 신오정이 한 손으로 잡았다. 신오정은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12시. 자정.
나는 입을 열어 주문을 외웠다.
“사바. 사바. 분신사바. 사바. 사바. 분신사바. 시발. 시발. 분신 시발."
"주문이 틀린 거 아닌… 헉?!"
볼펜이 부들부들 떨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나와 신오정의 손을 덮었다. 신오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내 눈에는 긴 검은 머리의 귀신이 보였다. 얼굴이 썩은 귀신이었다. 나는 귀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귀신님. 귀신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
귀신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손을 움직여 도화지에 글을 썼다.
-나는 네게 맞아 죽는다.
"정답."
벌떡 일어난 나는 정의의 왼손에 쥔 퇴마봉으로 귀신을 후려쳤다.
『†당신은 분신사바 귀신을 처형했습니다.』
『†당신의 잔혹함이 귀신들에게 퍼져나갑니다. 귀신들이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분신사바 귀신은 팔이 부러져 글을 쓰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 지역의 귀기도가 하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