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9화 > 1329. 고스트 로맨스
『†당신은 심한 가위에 눌렸다가 일어났습니다.」
두 눈을 번쩍 떴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불 꺼진 형광등 천장이 보인다. 두 번째 보는 거라 아직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다.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시작부터 배드엔딩을 볼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최고 난이도가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러면 내가 알고 있는 공략법도 소용없어지나?'
시스템이나 선택지 등을 보면 원작 게임에 충실하면서도 내용이 다르다.
'아까 호감도가 갑자기 치솟았어. 어쩌면 해피엔딩의 조건은 호감도가 아닐지도 몰라.'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다. 나는 확신이 필요했다. 공략이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아침 9시 30분까지 학교에 가야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하고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소파에 앉은 나는 식탁이 있는 부엌을 바라봤다. 가까이 가지 않아서일까. 식탁에 놓인 빵을 봤는데도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식탁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상호작용을 하듯이 세계가 멈추고 선택지가 떠오른다.
『1. 빵을 먹는다.』
『2. 먹지 않는다.』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었다. 나는 2번을 선택했다.
『2. 먹지 않는다. V』
선택지가 꽃잎 흩날리듯 사라지고, 멈췄던 세계가 다시 굴러갔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1번을 선택했던 것처럼 몸이 멋대로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빵을 잡았다. 시스템은 날 막지 않았다.
'…먹지 않는 선택지를 선택했음에도 빵을 먹을 수 있는 건가? 한 번 먹어 볼까? 어쩌면 이전과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몰라.'
30초 정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먹기로 했다. 선택을 번복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납치 감금 배드엔딩이라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래도 기왕이면 잠들지 않는 게 낫다. 나는 빵을 베어 물었다.
『†당신은 식탁 위에 놓인 빵을 먹었습니다.』
『†아뿔싸! 수면제가 들어있는 빵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에 빠졌습니다.』
다시 눈을 뜨니 몸은 구속되어 있고, 정면에는 지다혜가 있었다.
"유진 선배…. 앞으로 평생 제가 선배를 보살펴 줄게요. 하악…."
교복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된 지다혜가 위험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온다.
'이렇게 된 이상 섹스나 한 번 했으면 좋겠지만….'
『†지다혜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지다혜의 호감도: 117』
『†당신은 지다혜에게 잡혀 영원히 감금당할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J
『†당신은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2. 먹지 않는다. V』
빵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한 입 먹자마자 잠드는 수면제를 넣은 빵이라니…. 그런 강력한 수면제는 지다혜가 어떻게 구한 거야?'
게임일 때는 뭐가 나오든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다.
지다혜는 학생이었다. 특별한 거라고는….
'지박령에 씌인 상태지. 지박령의 힘인가.'
생각해보니 이 세계에는 초현실적인 힘이 존재했었다.
나는 혀를 차며 집안 곳곳을 둘러봤다. 원작 게임에서는 특별한 아이템 몇 개가 있었다. 그 아이템에 따라 스토리가 진행되기도 하고, 공략법이 변하기도 했다.
'찾았다.'
옷장 아래에 놓인 봉을 꺼낸다. 단소와 비슷한 길이와 두께의 거무튀튀한 봉이다. 봉의 끝에는 '퇴마봉'이란 한글이 적혀 있었다.
원작 주인공이 사용하던 퇴마 무기다.
'가지고 다니기 불편할 것 같은데…. 아, 혹시!'
나는 허공을 보며 외쳤다.
"인벤토리! 가방! 배낭!"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퇴마봉을 가방에 챙겼다.
집을 나선다. 학교로 가는 길은 몰랐지만, 돈은 있었다. 택시를 타고 등교했다.
바로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문 앞에 서서 학교를 바라봤다. 서늘한 아침 공기와 학교로 들어가는 학생들.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드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계속 감상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내 눈에는 학교에 서린 귀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원작 주인공은 퇴마 가문에서 태어난 퇴마사다. 다시 말해 퇴마 활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퇴마를 하지 않는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귀신에게 살해당하거나, 동네 자체가 귀신에 의해 학살당하는 최악의 배드엔딩이 된다.
또 귀신을 내버려 두면 공략에 방해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싹 다 정리해 둬야 한다.
'퇴마봉을 가져온 이유가 퇴마를 위해서이긴 한데…. 퇴마봉은 기본 무기야. 다른 방식으로도 귀신을 잡을 수 있어.'
나는 원작 [고스트 로맨스]의 고인물이 아니다. 플레이 타임으로 따지면 10시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고민물의 공략법과 노하우는 모두 숙지했다.
'우선은….'
갑자기 세계가 멈춘다. 소리가 사라지고, 등교하던 학생들이 멈췄다. 하늘을 날던 참새는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는다.
『1. 정문으로 들어간다.』
『2. 후문으로 들어간다.』
두 개의 선택지가 떴다.
뜬금없이 뜬 선택지라 결과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1. 정문으로 들어간다. v』
우선은 정문을 선택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내 몸은 멋대로 정문으로 들어간다. 몸은 학교 입구까지 가고 나서야 멈췄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이, 어이,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고…. 설마 너와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크큭."
웬 개좆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려봤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안경 낀 돼지가 있었다. 키는 나보다 작은 주제에 배는 남산만큼 튀어나왔다. 나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았다. 그는 미연시 게임에 흔히 있는 주인공의 친구다. 역할은 주인공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주는 것.
이름은 신오정이다. 주인공이랑 같은 반이다. 심지어 바로 옆자리가 신오정이다. 신오정은 컴퓨터를 잘 다루고 귀신에 관심이 많다. 장래 희망은 퇴마사의 협력자…. 간단히 말해 주인공에게 빌붙어 살려는 것이다.
"신오정…. 그 좆같은 말투는 어떻게 못 하냐?"
"흐흐, 이 말투는 내 아이덴티티다."
"티티는 지랄. 뭐, 어쨌든 만나서 잘 됐다. 앞장서서 걸어."
평소 같으면 이딴 남자 새끼랑은 말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신오정은 꽤 쓸만하다. 이놈을 통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 보고 앞장서서 걸으라고…? 뭐, 어려운 일은 아니군. 너의 협력자로서 그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십새끼가 진짜."
"흐흐. 오늘따라 까칠하군. 지옥의 육단봉 성유진….”
"육단봉? 그건 또 뭐야? 이상하게 부르지마."
“네 별호를 부정하지 마라."
별호? 원작에서는 없던 이야기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고,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일찌감치 증거를 수집해뒀지."
"증거?"
“지옥의 육단봉이 탄생한 순간 말이다…. 그때는 정말 짜릿한 순간이었지."
그가 스마트폰을 조작해 사진을 한 장 보여준다.
내가 찍힌 사진이었다. 내가 불량배들을 향해 퇴마봉을 휘두르는 사진이었다. 퇴마봉은 물론이고 나와 불량배들 모두 피투성이였다. 장담하는데 내 피는 아니다.
'이 새끼 원래 괴롭힘당하는 찐따였지. 원작에서 이놈을 구해주는 게 주인공이고….'
주인공과 신오정이 친해지는 계기. 아마도 이게 그게 아닐까 싶다.
“고기 육(肉) 단죄할 단(斷), 봉 봉(棒)…. 육단봉. 네 명성은 이미 이 주위에 퍼졌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일진놈들이 너를 안 좋게 보고 있다는 말이 있으니까…."
"단죄할 단이랑 봉 봉은 또 뭐야. 네가 붙인 이름이지?"
"후후후후.”
“이 새끼가 진짜."
죽일까 하다가 관뒀다. 죽이더라도 이용한 뒤에 죽여야 한다.
신오정은 앞장서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놈… 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하며 잘난 척하는 걸 좋아했다.
“그거 알고 있나? 오늘 새벽에 오비 편의점 주인이 살해당했다. 아까 오면서 봤는데 경찰들이 쫙 깔려 있더군."
"오비 편의점?"
"후문 근처에 있는 편의점 말이다."
“아."
후문.
선택지가 뜬 건 살인 사건 때문인 모양이다.
'이벤트가 뜬 걸 보니 평범한 살인 사건은 아니군. 젠장. 원작 게임에선 살인 사건은 없었는데….'
히로인 공략과는 상관없는 일이길 바랄 뿐이다.
"신기한 점은 범인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타살은 맞는데 정작 범인의 흔적은 조금도 없다. 지문은 당연히 없고, CCTV나 블랙박스에도 범인은 찍히지 않았다. 편의점 내에 설치된 CCTV에는 편의점 주인이 살해당하는 장면만 없다고 하더군. 영상이 조작된 흔적은 당연히 없다."
"오, 그래?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형사들이 하는 말을 몰래 엿들었다."
"형사 새끼들. 일 대충 하네."
“내 생각에는 귀신의 짓으로 보인다만… 전문가인 네 의견은 어떻지?”
"어떻게 죽었는데?"
“긴 칼에 베여 죽었다더군.”
"일본도 같은 칼?"
“그래."
"그럼 귀신의 짓이겠네."
"…이 사건. 나설 건가?"
"내가 왜? 난 의뢰도 받지 않았어."
“이번이 세 번째 살인 사건이다. 놈을 내버려 두면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길 거다."
“경찰이 알아서 하겠지."
"아니! 네가 나서야 한다! 경찰은 무능하다! 세금 도둑놈들이지!"
신오정은 한참 동안 경찰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대충 흘러들었다. 어느새 교실에 도착했다. H학년 4반.
신오정은 자기 자리에 앉더니 가방을 열어 삼각김밥을 꺼내 우적우적 먹었다. 나는 신오정의 왼편, 창가 자리에 앉았다.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교과서를 꺼냈다. 내 이름이 적힌 교과서가 있었다.
'내 자리가 맞군.'
우적우적우적우적우적.
거슬리는 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신오정은 어느새 삼각김밥을 6개나 처먹고 있었다.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신오정의 등 뒤로 귀신이 보인다. 비쩍 마른 팔다리에 비해 복부는 비이상적으로 튀어나왔고, 얼굴의 절반은 입이 처지하고 있다. 아귀(餓鬼)다.
'이 새끼도 귀신 들렸네.'
꽤 심각한 일이었다.
아귀는 원작 시점 중반부 이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가장 빡센 루트인 퇴마 루트에서만 등장한다.
'슈퍼 사나이 난이도답게 강제로 퇴마 루트인 건가.'
다행히도 아귀를 처리할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다.
“신오정. 점심시간에 퇴마의식을 시작한다. 그러니 이따가 밖에 나가서 물건 좀 사와라.”
"크흠? 퇴마의식?! 알겠다!"
신오정은 다시 8번째 삼각김밥을 우적우적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