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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325화 (1,325/1,497)

< 1325화 > 132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나는 적당히 높은 건물 위에 나타났다.

시끄러웠다.

고함, 비명, 건물이 불타고 무너지는 소리, 검과 창이 교차하는 소리. 온갖 소리가 뒤얽혀 혼돈을 이룬다.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아군과 적군, 반란군이 뒤엉켜 있었다.

반란군은 피난하지 못한 시민들을 지키는 데 집중하고 있다. 반란군의 목적이 새로운 왕좌를 차지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수월하게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선 시민들의 지지가 필수다. 따라서 그들은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아군은 날뛰고 있었다. 적이 보이면 죽이고, 주택이 보이면 들어가서 약탈한다. 전쟁 중인데도 성욕을 참지 못하고 강간하려는 놈들이 수두룩하다.

나는 아군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전쟁에서는 약탈이나 강간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멜리사의 부탁도 있고 하니 최대한 온건하게 전쟁을 끝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뭣도 아닌 버러지들이 내 명령을 무시했군."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형이다.

나는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땅에 착지한다. 도망가는 여자를 붙잡고 강간하려던 병사가 나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뜬다.

"사, 사령관님!"

"이번 전쟁에선 강간을 하지 말라고 말했을 터다."

"가, 강간이 아닙니다! 포로를 붙잡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지랄. 상관의 눈이 없다 보니 아주 제대로 날뛰더군."

화련비도를 소환해 손에 쥐고 아군을 향해 휘둘렀다. 검기가 날아가 병사의 목을 베었다.

강간당하기 일보 직전의 여자를 슬쩍 훑었다. 아줌마였다. 나는 모르는 척 주위를 둘러봤다. 아군 병사들이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날 바라본다.

"전우가 엇나가면 방조하지 말고 막았어야지. 너희도 똑같은 죄다."

"사, 살려 주십…."

눈에 보이는 아군을 죽인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니 적군도 죽인다. 반란군은 내버려 뒀다. 반란군을 죽이면 전쟁 후에 이런저런 말이 나올 테고, 지휘관인 멜리사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왕성의 대로를 걸었다. 아군 병사를 처형하고, 적군은 척살했다. 목적지는 왕궁이었다.

"주군!"

말을 타고 대로를 정리하던 여기사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골든 로즈 기사단이다.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군. 기사단 전원이 왕도에 왔나?"

"네. 스칼렛 장군의 명령대로 반란군과 협력해 외곽부터 천천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둘리바드는?"

"왕궁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법 장벽이 왕궁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뚫는 게 쉽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거군."

둘리바드는 도망칠 수 없다.

성벽밖에는 보이지 않는 파장이 둘러싸고 있다. 텔레포트 마법을 대비한 일종의 결계다. 놈들은 기껏해야 성벽 안에서만 텔레포트 할 수 있다. 물론 공간 이동 주문서도 예외다. 에이션트 드래곤급의 마법이라면 파장을 무시할 수 있다지만… 레오시오는 이곳에 없다. 아마 둘리바드를 도와줄 생각도 없을 것이다.

"아군에 선을 넘는 버러지들이 좀 많더군."

"처리하겠습니다."

여기사의 눈에 스사한 기운이 감돈다. 그녀를 비롯해 골든 로즈 기사단은 아군 병사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뒤에서 그녀들을 가지고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기사가 무장한 말을 끌고 아군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의 검이 자비 없이 아군 병사를 생명을 앗아가고, 육중한 군마는 아군 병사를 짓밟아 곤죽으로 만든다. 직후, 그녀는 무전기를 꺼내 골든 로즈 기사단에게 내 명령을 전파했다.

나는 왕궁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사의 말대로 마법 장벽이 왕궁을 지키고 있었다. 마법 장벽은 영원하지 않다. 마나를 연료로 발동할 뿐이다.

'마법사를 쥐어찌짜고 있거나, 마석을 쓰고 있겠지.'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러면 성가셔진다. 왕궁에 쌓아둔 마석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마법 장벽은 최소 일주일은 갈 테니까.

'유리아, 프리실라, 샤르넬의 도움으로 마법 장벽을 없애 버리는 건 쉽겠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지. 겨우 이런 일로 그녀들에게 도움받아야겠어?'

화련비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단전에서 마나가 움직이고 푸른색 오러가 붉은 칼날을 덧씌운다. 오러는 날카롭게 정련되어 새로운 칼날이 되었다. 오러 블레이드로 마법 장벽에 찔러 넣었다.

키이이이이잉!

마법 장벽이 반발하며 화련비도를 튕겨내려 한다. 나는 양손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동시에 뇌천류도 본격적으로 운용했다.

칼날에 붉은 뇌전이 서렸다. 붉은 뇌전은 마법 방벽에 흘러 들어갔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마법 방벽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러나 칼날은 마법 방벽에 박힌 채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부족하다.

투명한 마법 방벽을 타고 흐르는 붉은 전류를 보던 나는 잠깐 탄성을 흘렸다.

"아, 맞다."

이 상황에 적절한 기술이 있음을 뒤늦게 떠올렸다.

'자주 안 사용하다 보니 가끔씩 깜빡한단 말이지.'

뇌천류(雷天流 극기(極技) 봉뢰(封雷).

마나를 찍어 눌러 일시적으로 제압하는 봉뢰. 마나가 중심인 마법에는 극상성이라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효과는 바로 나왔다.

마법 방벽이 출렁이더니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나는 화련비도를 허공에 털어내며 왕궁의 커다란 문으로 걸어갔다. 강철 문 너머로 수십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뛰쳐나올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문이 열리는 것만큼은 막겠다는 느낌이다.

나는 문에 화련비도를 갖다 댔다. 그리고 뇌전을 일으킨다. 붉은 전류가 문을 타고 안쪽으로 흐른다. 인기척이 전부 사라지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문을 발로차서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명의 병사가 쓰러져 있었다. 기사도 2명 정도 섞여 있었다.

왕궁으로 들어선 나는 여기저기 둘러봤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방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바닥에 넙죽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나는 구태여 그들을 죽이지 않고 지나쳤다.

"둘리바드는 어디 있냐?"

"모, 모르겠습니다. 살려 주세요, 제발…!"

"귀족들은 어디에 있지?"

"2층! 2층 객실에 있습니다!"

나는 하인들을 지나쳤다. 병사와 기사는 항복하면 살려줬다. 다만, 귀족은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현재 왕궁에 있는 귀족들은 모두 둘리바드를 따르는 놈들이지. 어차피 숙청될 놈들이긴 한데… 절차를 따르려면 물고 늘어질 수도 있으니 이참에 처리해 두자.'

2층의 방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방안에는 시체들이 가득했다.

'독을 먹고 죽었군.'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둘리바드를 찾았다. 놈은 알현실에 있었다. 당당하게 왕좌에 앉아 나를 보고 있다. 왕좌 아래에는 시체들이 있었다. 고위 귀족과 그 자식들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상처 부위가 없다는 것이다.

"유진 프루커스. 네놈이 올 줄 알았다! 네놈이라면 분명 직접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올 거라 예상했다!"

둘리바드가 흥분해 소리쳤다. 두려움에 잠겨 발악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놈은 자기가 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왕좌 아래에 놓인 시체들이 신경 쓰였다.

“그놈들은 왜 죽은 거냐? 독을 마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질문에 둘리바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악마와 거래를 했다. 이것들은 제물이다. 재상과 공작, 후작의 직계들이지. 직위가 높은 만큼 제물로의 가치도 높더군."

놀라지 않았다. 놈이 판테움과 손을 잡은 시점에서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적성만 있다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악마의 힘을 쉽게 뿌리치지 못할 테니까.

“……계약이 아니라 거래라고?"

"겨우 악마 따위에게 질질 끌려다닐 생각은 없다.”

"어떤 악마와 거래했지?"

"하하. 맞춰봐라.”

파지지직!

둘리바드에게 뇌전을 쏘았다.

"(막아라.)"

시체 한 구가 일어나더니 둘리바드를 대신해 뇌전을 맞았다. 타는 냄새와 함께 시체가 쓰러진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마법이지만, 마법이 아니었다.

"용언…. 드래곤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반의 반도 안 될 텐데…. 어떻게 용언을 쓴 거지?"

"내가 드래곤이기 때문이지. (죽어라.)”

주변의 마나가 요동친다. 동시에 나는 심장을 옥죄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뇌천류를 사용하며 대응했다. 심장이 편해졌다.

둘리바드가 혀를 찼다.

"역시 직접적인 죽음은 통하지 않는 건가."

의문이 생긴다. 지금 둘리바드가 보여주는 힘은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광년은 떨어져 있다. 상식적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악마의 힘이 끼어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악마의 거래로 드래곤이 된 건가. 대충 상황이 그려지는군. 넌 진화의 악마와 거래했다. 그렇지?"

원작에서 언급된 최상급 악마 중 하나. 생물을 진화시키는 힘을 가진 악마다.

둘리바드는 용인이기에 그 악마의 힘으로 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연 전문가군. 네 말대로다. 나는 드래곤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아마도 오늘 진화한 건 아니다. 무려 드래곤으로 진화한 일이다. 저 왕좌 아래에 있는 시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량의 제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6]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스킬을 사용하고 둘리바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용언을 쓰는 꼬라지를 보니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더 성가셔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죽인다.

까앙!

내 공격은 그를 지키는 배리어에 막혀 튕겨 나갔다. 왕좌에 박힌 보석이 번쩍 빛나는 게 보였었다.

'저 왕좌 자체가 마도구인가.'

나는 개의치 않고 오러 블레이드로 배리어를 두들겼다. 이깟 배리어가 영원히 유지할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둘리바드는 오만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한때, 멜리사는 내 모든 것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렸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왕좌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다. 네놈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나는 무력함을 통감했다. 이 세상이 힘이 전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소리가 좀 많이 시끄럽군. 네가 무슨 발악을 하든, 멜리사는 내 여자다. 그 사실은 절대 안 변해."

까앙! 까앙! 깡!

배리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네가 내게서 멜리사를 빼앗았듯, 너의 모든 걸 빼앗겠다!"

배리어가 부서진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4]

완벽한 타이밍에 찰나를 사용했다. 칼끝은 둘리바드의 오른쪽 눈을 노린다. 칼끝이 그의 눈동자에 닿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시간이… 아니, 공간이 멈췄다. 주변의 마나를 한순간에 장악한 거군.'

이 주변 일대의 마나는 모두 둘리바드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도 드래곤의 능력이다.

호신강기를 일으킨다. 내 몸에서 푸른 불꽃 같은 오러가 피어올랐다. 칼끝이 다시 움직인다. 둘리바드의 눈에 닿기 직전, 놈이 입을 열었다.

"(껴저라.)"

용언은 가차 없이 내 몸을 뒤로 밀어냈다. 땅바닥을 구르기 전에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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