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8화 > 1318.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유리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웨인을 바라봤다.
“살리지 않으십니까?"
웨인은 무감정한 눈으로 로르프의 시체를 바라봤다.
"로르프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 힘을 쓰는 것보다 내가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진즉에 나서지 그러셨습니까."
"나는 전투에 그다지 자신이 없다. 그리고 너와 싸우게 되면 최소 30년 이상의 수명을 소모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과연 수명을 아끼고 싶으셨군요. 저를 이기려면 30년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겁니다."
“그 말에는 반박하지 못하겠군. 그러나 문제는 없다."
웨인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갈라진 공간에 손을 넣더니 물건을 꺼냈다.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구슬이었다.
“이걸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꺼내는 건 처음이군."
“…유물이군요.”
"레오시오에게서 선물 받은 유물이다. 100년의 수명을 저장할 수 있다. 일회용이란 점이 아쉽지만, 너는 수명을 아껴야 할 정도로 쉬운 상대가 아니니 말이다. 나의 여유 수명은 총 150년. 시간은 충분하다."
웨인이 씨익 웃더니 구슬을 입에 넣고 삼켰다.
웨인의 긴 금발이 펄럭거린다. 유리아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막대한 부정의 마나를 확인했다. 부정의 마나를 그의 등 뒤에 모여 형태를 이룬다.
보라색의 거대한 해골이었다. 이마에는 붉은 시계가 박혀 있고, 텅 빈 동공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른다. 시간의 악마 무파파다.
"무파파. 오랜만의 거래다. 내 수명을 가져가라!"
보라색 해골의 입이 벌어졌다.
웨인의 몸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나왔다. 연기 같기도 한 그것은 무파파의 입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 전능감… 언제 느껴도 최고로군."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간과 공간이 제 몸처럼 느껴지는 이 감각. 그 어떤 것들보다 황홀하다.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를 감각이다.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게 아쉽군."
이 상태에선 1초에 수명 일주일이 사라진다. 전능감에 취해 능력을 오래 유지했다간 죽게 될 것이다.
"우선은 가볍고 확실하게 20년을 소모하겠다."
후우우우우웅.
웨인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투명한 파장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결계를 형성한다.
세계의 시간을 멈추는 게 아니다. 우선은 적당한 결계를 만들고, 그 안의 공간만을 확실하게 멈추는 방식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모양 빠지긴 해도 결계 내의 당사자들에겐 시간이 멈추는 현상이었다.
"끝났군."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오직 웨인만이 움직였다. 스스로의 강함에 취한 웨인은 1초가 지날 때마다 수명이 깎여 나가는 걸 알면서도 여유롭게 움직였다.
그의 손에 시간의 힘으로 형성한 검이 형성된다. 자그마치 10년의 수명을 때려 박아 만든 검이다.
'시간의 검은 상대가 드래곤이라 해도 죽일 수 있는 특별한 검이다. 이걸로 30년의 수명이 확 사라졌군.'
수명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는 지금까지 상대해 온 그 누구보다 강했다. 번개의 악마 로르프를 가지고 논 여자. 기회가 있을 때 전력을 다해 죽여야한다.
웨인은 시간의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유리아의 몸을 정확하게 절반으로 벨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리아의 몸이 아슬아슬하게 뒤로 움직이며 시간의 검을 피했다.
그는 경악했다. 유리아는 검을 보고 피한 것이다. 이 시간이 멈춰진 세계에서 그녀 또한 움직인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움직이는 거냐?!"
“시간이 되돌려지는 걸 200번 넘게 보았습니다. 덕분에 시간에 대한 개념을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로르프를 계속 죽인 이유는 단순히 내가 지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가…. 아니, 허세 부리지 마라. 시간의 힘을 목격한다고 해서 시간의 개념을 깨닫는 건 말도 안 된다. 너는 단순히 목격했을 뿐이잖냐."
“사실 30번 정도 봤을 때 실마리가 잡혔고, 100번 정도 봤을 때 확신했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딱히 당신의 신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믿겠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군. 너는 로르프를 272번이나 죽인 괴물. 그런 괴물에게 상식을 바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의심하는 대신에 전력을 다해 너를 죽이겠다. 너는 너무 위험하다."
“과연. 그 빠르고 냉철한 판단력이 당신의 최대 강점이군요."
유리아는 어느새 오른손에 단검을 쥐었다.
그녀는 웨인과 대화하며 시간의 힘을 사용하려 했었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빨리 감는 게 목적이었다. 악마가 아닌 유리아에겐 시간의 악마 무파파처럼 시간을 조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의 압도적인 재능으로도 악마의 권능을 흉내 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건 재능과는 관련 없는 다른 차원의 종류다.
그러나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시간에 대한 개념을 깨달았기에 멈춘 시간 속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시간에 대한 저항력을 얻은 것이다.
"신의 속도로 널 죽이겠다."
유리아의 정면에 있던 웨인이 사라졌다. 웨인은 유리아의 뒤편에 나타나 시간의 검을 휘둘렀다. 유리아는 그림자 이동으로 웨인의 뒤로 회피했다. 웨인이 얼굴을 굳히며 뒤를 돌아본다.
"신의 속도라…. 거창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별거 없군요. 단순히 육체의 시간을 가속해 움직인 것이 전부지 않습니까."
“이 속도에 반응한다고…?! 제길. 늙어라! 늙어서 자연사해라!"
웨인의 등 뒤에 있는 보라색 해골이 입을 벌리며 시간을 내뿜는다. 시간의 바람이 유리아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갓난아기라도 죽을 날의 노인으로 바꿔버리는 시간의 바람은 유리아에게는 평범한 바람에 불과했다. 시간 저항력을 얻은 그녀에겐 직접적인 시간 조작은 통하지 않았다.
“이제 더는 볼 게 없군요. 그 악마와 함께 죽으십시오.”
영천류(影天流) 암전(暗轉).
유리아를 중심으로 어둠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시간이 멈춘 공간은 어둠으로 잠식되었다.
웨인은 다리를 주춤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無)의 공간에 자신 혼자만 남은듯한 감각이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공포에 몸을 떨면서 사방을 향해 시간의 검을 휘둘렀다.
무언가가 그의 오른팔을 훑고 지나갔다. 털썩. 팔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팔뚝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팔이 잘렸다.
‘…다리도 잘렸다. 몸이 쓰러지고 있다. …망할 입도 안 열린다. 목이 갑자기 아파지는군. 목도 잘린 건가?'
웨인은 자신의 죽음을 인식했다.
그러나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시간이 되돌아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기회는 올 거다. 버티면 이길 것이다.'
그녀가 무한한 체력과 마나를 가진 게 아님을 이미 확인했다. 웨인은 언젠간 반드시 찾아올 반격의 때를 기다렸다.
어둠이 사라진다.
다시 세상이 환하게 보였다.
웨인은 서 있었고, 유리아는 그의 정면에 조금 떨어져 있었다. 유리아는 살짝 지친 기색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
"발악은 다 끝났나 보군. 이제 내가 공격할 시간이다."
유리아의 푸른 눈이 웨인을 주시한다.
“그 몸으로 말입니까?"
“뭐?"
웨인은 뒤늦게 자신의 손등을 확인했다.
쭈글쭈글해져 보기 흉한 손등.
그는 경악하며 다급히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손바닥을 통해 주름 가득한 얼굴이 느껴졌다. 또 찬란한 색으로 빛나던 황금색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했다. 윤기 없는 창백한 백발이다.
"말도… 말도 안 된다…!"
입에서 나오는 건 노인의 목소리였다.
웨인은 있을 수 없는 일에 당황하며 뒤를 돌아봤다. 시간의 악마 무파파는 부서져 있었다. 해골의 절반은 없고, 나머지 절반에는 금이 쩍쩍 가 있다. 오른쪽 눈두덩이 속의 푸른 불길은 촛불처럼 미약하다.
"웨인이여…. 신선한 제물이 필요하다….”
무파파가 화관을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공간이 어두워지고 10초도 안 지났을 거다! 그런데 대체 왜?!"
"82초가 지났습니다. 저는 그 시간에 당신과 악마를 총 311번 죽였습니다."
“그딴 말을 내가…."
"당신의 의식이 없던 약 70초. 당신이 죽어 있던 시간입니다. 정확하게는 시간이 돌려져 회복하기 전에 죽이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전력으로 움직이는 적은 오랜만이라… 어깨가 뻐근하네요."
웨인은 그녀의 말이 100% 진실임을 알았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고, 죽어가는 무파파의 모습이 그 증거다.
키이이이잉.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웨인이 황급히 무파파를 바라봤다. 무파파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콰직! 그 해골은 유리잔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털썩.
웨인은 바닥에 무릎 꿇었다.
"너는 대체 뭐냐…!"
"메이드입니다."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짐승 머리가 웨인의 머리를 씹고 사라졌다.
유리아는 홀로 남은 베젤을 바라봤다. 버려진 고양이처럼 애처롭게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3개의 눈을 가진 검은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몽상의 악마 레브스다.
"레, 레브스. 도망! 도망가자! 당장 날 여기서 밖으로 보내줘!!"
“…냐옹."
레브스가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는 힘이 공간 이동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때처럼 놓칠 것 같습니까? 당신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공간 이동을 방해하는 결계를 설치했습니다."
"나, 나도 죽일 거야?"
“그러고 싶습니다만, 지금 당신이 죽어 몽상 세계가 닫히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저와 대화나 나누시죠."
유리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수백 개의 고문 도구가 튀어나와 공간을 채웠다. 베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쪽의 귀여운 악마분도 함께요."
“……냐옹."
레브스가 베젤의 몸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림자가 치솟아 레브스와 베젤을 붙잡았다.
강제로 고문 의자에 앉은 베젤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녀의 사타구니에서는 뜨거운 액체가 흐른다. 유리아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날카롭고 작은 칼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 살려줘. 전부 말할게.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이러는 거지? 그때는 내가 잘못했어. 나도 웨인에게 임무를 받은거라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빌게! 발을 핥으라면 핥을게! 제발 고문만은 하지 말아줘…!"
“저는 그때, 주인님이 몽상 세계로 사라졌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상실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죠. 베젤, 저는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히이이익!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괜찮습니다. 죽이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