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0화 > 1310.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나는 연회장이 아닌 주방에 있었다. 방금까지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방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따끈따끈한 치킨을 옆으로 지나 주방 밖으로 나왔다.
"꺄아아아아악!"
오른쪽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본다. 정작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저택은 미궁화 되었다.'
거울의 막마, 비루비루의 능력이다.
비루비루는 미궁을 만들고, 미궁 속의 인간 중 한 명을 지정한다. 지정된 인간을 거울로 비추어 가능성을 미궁에 구현해 미궁 내에 있는 인간을 사냥한다.
'가능성이란 일종의 평행 세계지. 원작에서는 평행 세계의 카일이 나타나 사람들을 죽여 댔고.'
평행 세계의 인간을 죽여도 미궁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미궁을 비루비루의 계약자를 찾아내 죽여야 한다.
또는 비루비루의 본질을 죽이는 건데… 오러 마스터 최상급이었던 원작의 카일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유리아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유리아는 없다.
'악마 계약자만 찾아내 죽이면 돼. 문제는 변장술이 뛰어난 놈이라는 건데…. 귀족, 기사, 하인…. 아마 귀족으로 변장해 있을 가능성이 커. 귀족으로 변장하면 일할 필요가 없어서 여러모로 편하니까. 원작에서도 귀족으로 변장했고.'
귀족이란 귀족을 전부 찾아내 죽이는 건 안 된다. 그랬다간 아르헨 공작가의 힘이 줄어든다. 지금 나와 아르헨 공작가를 동맹이다.
뚜벅뚜벅.
복도를 걷던 나는 멈칫했다. 또 다른 내가 복도에서 나타났다. 피부는 창백했고, 두 눈은 피처럼 붉었다.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으며, 손에는 악마 해골이 박힌 지팡이를 쥐고 있다.
"…젠장. 내가 지정되었군."
나는 강하게 혀를 찼다.
"네가 본체군. 별로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군."
창백한 피부의 나는 지팡이를 올렸다가 바닥을 찍었다.
쿵!
그의 마나가 움직인다. 그림자 속에서 썩은 살점의 기사가 기어 나왔다. 검은색 갑옷과 검을 들고 있다. 데스나이트다.
"네크로맨서냐?"
"보면 모르나?"
데스나이트가 나를 향해 검을 겨눈다.
데스나이트의 등에 숨은 네크로맨서는 나를 보며 조용히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진다. 피로가 전신을 덮친다.
'저주인가.
다행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네크로맨서. 넌 내가 본체라는 걸 알고 있어. 즉, 네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지."
"그런데?"
"넌 지금 거울의 악마, 비루비루에게 조종당하고 있어. 굳이 날 공격할 이유가 없다는 거야. 널 조종하는 악마에게 화나지 않는 거냐?"
"조종이라…. 확실히 너를 비롯해 사람들을 보니 살해 충동이 찾아오더군."
"네가 유진 프루커스라면… 누군가에게 조종받는 걸 극도로 싫어할 거야. 그러니 나랑 손을 잡자. 같이 비루비루의 계약자를 찾아내 고통스럽게 죽이자.”
"거절한다."
네크로맨서가 말했다. 그의 붉은 눈은 한점의 흔들림도 없다.
"확실히 네 말대로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회가 있다면 비루비루와 그 계약자도 죽여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네크로맨서 유진 프루커스는 진지했다. 어쩐지 나와 성격이 좀 달랐다.
'평행 세계의 나니 성격이 다른 건 당연한가?'
데스나이트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화련비도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 중요한 일이란 게 나를 죽이는 일이냐?"
"너를 죽이고 스마트폰을 빼앗는 일이다."
“…뭐?”
네크로맨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스마트폰이었다. 얼떨결에 받아들였다. 내가 가진 스마트폰과 똑같은 기종이었다. 버튼을 눌러봤다. 화면은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없나?"
“병신 새끼."
"……."
짜증 섞인 그 말에 뻘쭘해졌다. 설마 나한테 욕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내 스마트폰은 유희 생활 어플을 각성한 그 날부터 전기를 충전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배터리의 충전도는 항상 100%였다. 따로 배터리를 충전할 필요가 없어서 엄청 편했다.
"유희 생활 어플이 목적이었군…. 네가 내걸 가지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성유진이다. 유희 생활 어플을 사용하지 못할 리가 없다."
못할 거다.
놈은 가짜다. 비루비루에 의해 만들어진 평행 세계의 나일 뿐이니까. 유희 생활 어플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마음 같아선 당장 스마트폰을 던져주고 놈이 절망한 꼴을 보고 싶지만….
사람 마음이 좀 이상해서 혹시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놈이 유희 생활 어플을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든가."
“그러려고 했다.”
촤르르륵.
바닥과 천장에서 사슬 수십 개가 튀어나왔다. 사슬은 나를 향해 뻗어오는 대신 사방을 감싼다. 이건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용도다.
"가라, 카일. 놈을 죽여라."
"카일… 이라고?!"
데스나이트가 보법을 밟으며 접근한다. 확실하다. 화산파의 무공이다. 데스나이트의 검이 허공에 매화를 그린다. 나는 앞으로 접근하며 데스나이트의 검을 쳐냈다.
매화검법의 파훼법, 그 첫 번째는 상대가 매화를 완전히 그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거다.
데스나이트는 내 공격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매화를 그렸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언데드만이 가능한 짓거리다.
하나의 매화가 완성되었다. 매화는 두 개에서 네 개. 네 개에서 여덟 개로 늘어났다. 데스나이트의 매화검법에서는 향긋한 매화향 대신 썩은 시체 냄새가 났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데스나이트의 하체를 공략했다. 매화검법의 약점 중 하나는 하단이었다.
카앙! 캉!
검이 부딪친다. 밀려나는 건 데스나이트 쪽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카일보다 약하다. 오러 마스터 상급 최대한 좋게 봐줘도 최상급 정도의 수준인가.'
파지지직.
화련비도의 도신을 중심으로 붉은 번개가 회전한다.
뇌천류(雷天流) 만뢰(卍雷).
회전하던 붉은 번개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데스나이트가 허공에 그린 매화를 부수고, 데스나이트의 몸을 감전시킨다. 데스나이트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번개에 의해 시체가 불타는 것이다.
쿵!
네크로맨서가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바닥에서 그림자가 치솟아 데스나이트를 뒤덮는다. 데스나이트를 태우던 불꽃이 꺼지고, 데스나이트의 덩치가 1.2배 정도 커졌다.
“대충 알겠다. 너는 검과 번개와 관련된 특성이나 스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그러는 너는 시체를 부리는 스킬을 가지고 있냐?"
"잘 아는군. 추가로 말하자면… 사슬을 부리는 스킬도 가지고 있다."
벽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내 목을 노리고 쇄도한다.
뇌천류(雷天流) 전자기막(電磁氣幕).
전자기막에 닿은 사슬은 그대로 방향을 꺾어 네크로맨서에게 날아간다. 깡! 사슬은 네크로맨서의 배리어에 막혀 튕겨 나갔다.
“자기력을 이용한 건가. 그럼… 자기력을 없애면 그만이다."
그가 지팡이를 흔든다.
촤르르르르륵!
천장과 바닥, 벽에서 시커먼 기운을 품은 사슬이 나타나 달려든다. 정면에서는 데스나이트가 매화를 그리며 전진해오고 있다.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막는 것도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돌파한다.'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6]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허공에 생성된 8개의 매화를 지나치고 네크로맨서에게 접근했다. 화련비도의 칼날이 네크로맨서의 배리어를 가른다. 네크로맨서의 붉은 눈은 조금의 동요도 없다. 다시 칼날을 위로 올린다.
"클로디아."
천장에서 적이 나타났다. 교차한 두 개의 검이 아래에서 올라가는 내 검을 짓눌렀다. 적의 발차기가 날아오기 전에 백스텝을 밟아 물러났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적을 확인했다. 검은 갑옷을 빈틈없이 입고 있었다. 다만, 갑옷의 가슴 부위가 동그랗게 튀어나왔고, 허리가 잘록하며 엉덩이 부분이 크다. 명백한 여체의 형태다.
“…클로디아라고? 설마 그녀인가?"
“그래. 원작에서 나온 카일의 히로인이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 모험왕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내 노예일 뿐이다."
쌍검을 쥔 클로다아가 달려온다. 뒤에서는 데스나이트 카일이 허공에 매화를 그리며 다가온다.
'젠장. 성가시군. 저놈부터 노릴 게 아니라, 데스나이트부터 차근차근 없애야 했나.'
나는 지면을 향해 발로 찼다. 뱀처럼 스멀스멀 기어 오던 검은 사슬이 걷어차여 날아갔다.
네크로맨서는 냉철한 붉은 눈으로 날 지켜보고 있다.
'놈은 평행 세계의 나지만, 가지고 있는 스킬과 특성이 나와 다르다. 가속이나 완전 회복이 없는 것 같으니… 자살 공격 한번 해볼까. 제대로 허를 찌르면 그대로 놈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주저되는 건 다른 이유였다.
거울의 악마 비루비루. 놈이 또다시 가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다. 최악의 경우, 네크로맨서 보다 더 성가신 놈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네크로맨서의 붉은 눈이 옆으로 움직였다. 내 눈도 옆으로 움직인다.
거대한 불덩이가 밤하늘을 밝히며 날아오고 있었다. 불덩이는 창문과 부딪혀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벽을 감싸고 있는 사슬은 멀쩡했다.
키이이잉!
드레스를 입은 멜리사가 오러 블레이드를 이용해 사슬을 베고 내 옆에 섰다.
"주인님. 무사한가?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끼고 왔다만… 상황은 꽤 심각해 보이는군. 주인님이 둘이라…. 마님이 좋아하려나?"
“여기까지 와서 농담이냐."
멜리사가 내 옆에 섰다. 그녀의 방정맞은 입과 다르게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주인님. 우린 버티기만 하면 된다."
"버티면 못 이겨."
“아버지가 옥상에서 악마 계약자를 찾았다. 붙잡고 심문 중이다. 3분 뒤에 죽이기로 했으니… 2분 30초 정도만 버티면 되겠군."
"그건 안 되지."
네크로맨서가 말했다. 그와 데스나이트 카일과 클로디아는 그림자 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사슬들도 사라졌다.
코앞에서 놓쳐 버렸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멜리사의 젖탱이를 손바닥으로 쳤다.
짝!
“이 바보야! 그걸 대놓고 말하면 어떻게?"
"주인님에게 바보 소리를 듣다니…. 장난 아니게 기분 나쁘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거짓말이니까. 놈이 다시 공격해 오기전에 악마 계약자를 찾아내 죽이면 된다."
“거짓말이었나…. 너 진짜 머리 좋구나. 근데 이 악마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마님에게 들었다. 판테움에 속한 악마들을 알려주면서 주의하라더군."
나와 멜리사는 복도를 내달렸다. 저택 어딘가에 있을 악마 계약자를 찾아내 죽여야 했다.
“그 네크로맨서가 평행 세계의 주인님인가? 의외로군. 주인님에게 그런 가능성도 있다니."
나는 별로 놀랍지 않다.
내겐 재능이 없어도 유희 생활 어플이 있으니까. 유희 생활 어플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네크로맨서도 그걸 알기 때문에 내 유희 생활 어플을 빼앗으려 했고.
“설마 놈에게 반한 건 아니지?"
“이런 들켰나. 솔직히 말하지. 네크로맨서 주인님을 보고 보지가 격렬히 떨리더군.”
"오케이. 넌 나중에 벌이다. 보지가 붓다 못해 찐빵이 될 때까지 따먹어주지."
“그것도 나름 기대되는…."
복도를 달리던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창문 밖을 쳐다봤다. 하늘에 거대한 검은색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 안에서는 스켈레톤과 좀비가 후두둑 쏟아진다.
누구의 짓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