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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305화 (1,305/1,497)

< 1305화 > 1305.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비밀 통로를 걷는다.

썩 좋지는 않다. 어둡고 습기 찼다. 특히 마음에 안 드는 건 벌레들이다. 거미, 바퀴벌레, 지네 등이 여기저기 보인다.

타닥!

번갯불이 번쩍였다. 내게 달려들던 독거미가 전기에 감전되어 타 죽은 것이다.

타닥! 타닥!

그 외에도 벌레는 내 주위에 다가올 때마다 죽어 나갔다.

뇌천류(雷天流) 전자기막(電磁氣幕).

보이지 않는 전자기막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전자기막은 내구도면에서 실망스럽지만, 지금처럼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벌레를 감전시켜 죽이는 일에는 최적이었다. 지금 나는 움직이는 전기 파리채다. 뭐, 출력은 전기 파리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나지만.

"여기저기 더러운 게 보이는군. 아르헨 공작가는 비밀 통로를 아예 관리 안 하는 거야?"

"아르헨 공작가에서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직계뿐이다. 직계가 비밀 통로 청소 같은 걸 할 것 같나?"

“아무리 그래도 벌레가 너무 많은데."

따닥! 따닥! 따다다닥! 따닥!

손전등의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벌레 때문에 귀가 시끄러웠다.

“이 정도는 버틸 수준은 되지 않나. 음. 주인님과 함께 와서 다행이군.”

"내가 없었으면 마법을 썼겠지. 유리아에게 들었어. 얼마 전에 마스터 경지에 올랐다며? 검과 마법, 양쪽 모두 말이야."

"음. 마님은 역시 주인님을 대상으로 입이 너무 가벼워진다. 덕분에 주인님을 놀라게 해주려는 내 계획은 물 건너갔군."

“들었을 땐 충분히 놀랐어. 두 가지의 길을 모두 마스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마님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아마 수십 년이 걸려도 힘들었겠지. 그리고 주인님의 도움도 컸다. 주인님이 주는 영약을 먹으니 쑥쑥 강해지는 게 느껴지더군. 메이드랑 골든 로즈 기사단에게 나눠주던데… 대체 영약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 거지?"

"그건 비밀이야."

대부분 [광명승천도] 세계에서 가져온 영약이다. 그 세계에선 시간이 지나면 영약을 얻을 수 있다. 현실로 가져가면 효과가 절반도 나오지 않게 되지만, [백환] 세계에선 나름 좋은 효율을 보여준다.

"심심한데, 아르헨 공작가에 대해서 말 좀 해봐."

"흐음. 아르헨 공작가에 딱히 재밌는 건 없다만."

“가족에 관해서라던가 말이야. 남동생이 있지 않아? 갠 어때?"

"베르도 말인가. 글쎄…. 잘 모르겠군. 원래부터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멜리사에겐 나이 차이가 많은 남동생이 있다. 본래 그녀는 아르헨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 왔으나,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했다. 단순히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선 흔한 일이었다.

다른 귀족가였다면 여자가 후계자 자리를 계속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르헨 공작가는 고리타분한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이다.

"베르도가 태어나고 난 찬밥신세가 되었다. 후계자로서 누리던 특권을 모두 잃었지. 당장 가신들부터 시작해서 하인들까지 태도가 한순간에 변하더군. 후계자 교육도 바로 끝났다."

“그건 좋은 일 아니야? 귀찮은 교육은 안 해도 됐잖아."

"지금은 그랬지. 그때 당시에는…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르헨 공작. 오직 그 목표만을 위해 일평생을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그 목표가 사라지고 난 쓸모 없어졌다. 왕가에 시집가는 일만 남았었지."

"남동생을 원망해?"

"그때 당시에는 그랬던 것 같군.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도리어 불쌍하게 느껴진다. 아마 지금쯤 후계자 자리를 위해 하루 대부분을 교육에 힘쓰고 있겠지. 검과 마법을 동시에 수련하고, 읽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영학과 역사를 배우고.… 음. 가장 짜증 나는 건 예의였지."

"예의?”

"코발트 왕국은 기본적으로 금욕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순결을 지키는 건 당연하고, 음식도 많이 먹어선 안 된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금욕…. 즉, 예의를 강요하지."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야?"

"음. 식사 예절을 예로 들지. 코발트 왕국에선 식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셔야 한다. 요리에 대한 예의로서 물로 입안을 깨끗이… 어쩌고 같은 예의다. 그리고 반드시 오른손에 포크를 잡아야 한다. 왼손잡이라고 해서 예의는 아니다. 그리고 3가지의 요리를 맛보기 전까지는 입을 열어선 안 된다. 너무 빨리 먹어서도 안 되고, 음식을 소리 내서 먹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중간에는."

“그만, 그만. 코발트 왕국의 예의가 얼마나 좆같은 지 알았으니 그만둬."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코발트 왕국의 예의이긴 하지만, 사실 전부 지킬 필요는 없다. 고위 귀족 대부분이 세세한 예의까지 전부 지키지 못한다. 사는 데는 지장 없으니 딱히 집착하지도 않지. 하지만 아르헨 공작가는 예외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집착하지."

"골때리네."

"나는 골드 웨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야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그 이전까지 줄곧 아르헨 공작가에 있었으니 예절을 전부 지키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뭐, 그게 아님을 알고 나서는 의도적으로 예의를 무시했지."

"그쯤 되면 습관이 됐을 텐데 힘들었겠어."

"전혀 힘들지 않았다. 하루 만에 예의를 갖다 버렸지. 습관? 편리함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더군."

뚜벅뚜벅.

앞장서서 비밀 통로를 걸어가던 그녀가 멈췄다.

그녀는 손전등으로 울퉁불퉁한 벽면을 비추었다.

“……갑자기 뭐야?"

“이 앞에 함정이 있다. 꽤 성가신 함정이기에 처리하고 가려는데… 으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히는군."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물리적인 함정이야?"

"유물이다. 사람의 정신을 조작하는 계열의 유물이지. 안쪽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괜찮지만… 반대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때는 문제가 된다.”

“침입자를 대비한 함정이라는 거군."

“그리고 도망갈 때 유물을 조작해 추적자에게 엿을 먹일 수 있다."

"엿이라니. 상스럽잖아. 공작 딸내미."

"보지 도장 같은 걸 생각하는 주인님에게 듣고 싶지 않군."

멜리사는 벽을 노려봤다. 계속 노려봤다. 그 상태에서 10분이 지나자, 멜리사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렇게 5분이 더 지났을 때. 멜리사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까먹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이 비밀 통로에 대해 들었던 건 15년도 더 된 일이다. 인간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소한 일은 까먹기 마련이다."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잖아. 그리고 유리아라면 잊지 않았을걸?"

“마님과 비교하지 마라. 그건 촛불과 태양을 비교하는 짓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유리아아와 비교하는 건좀 아닌 것 같다. 유리아와 비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박살 내고 들어가자. 뒤로 물러나 있어."

"함정에 당하면 정신이 이상해진다고 아까 말했을 텐데."

"난 정신 공격에 면역이야."

나 혼자였다면 그냥 함정을 지나쳤을 것이다. 절대 정신을 가진 내겐 정신 공격은 의미 없으니까.

내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은 멜리사가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이 벽이 유물인 거지?"

“그렇다. 울퉁불퉁한 부분을 정해진 대로 만지면 함정을 해제할 수 있는데… 순서가 기억 안 나더군.”

그녀의 변명을 대충 흘려들으며 벽 앞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울퉁불퉁한 벽을 쓸어봤다.

우우우웅.

벽이 진동하더니 무형의 에너지를 발생했다.

지지직.

벌레 때문에 펼치고 있던 전자기막이 무형의 에너지를 막아냈다.

'…말이 무형의 에너지지. 이거 전자파랑 비슷하잖아? 전자파로 뇌를 건드리는 방식인가.'

우우우웅.

지지지직!

다시 한번 벽에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도 전자기막이 에너지를 막아냈다. 출력 자체는 낮은 모양이다.

“멜리사. 파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이대로 가자."

“그런 것 같군."

함정을 넘었다.

“앞으로 대충 10분이면 도착할 거다."

"10분이라… 아까일 때문인지 신뢰가 안 가는데?"

"대충이라고 말했잖나. 잠깐, 시간 재지 마라."

따닥. 따닥.

이놈의 벌레들은 여전히 나와 멜리사에게 달려들어 유명을 달리한다.

"멜리사. 나를 따라온 건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는다. 아카데미에서 주인님이 내게 한 짓을 떠올리면 좀 화가 나긴 하지만…. 둘리바드의 아내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대로 둘리바드와 결혼했다면… 아마 난 새장 속에 갇힌 카나리아 꼴이 됐을테지."

“새장 속에 갇힌 카나리아 꼴이라…. 나쁘지 않은데."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아무튼, 나는 지금 내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집은 따뜻하고 음식은 그 어느 곳보다 맛있다. 지금 하는 일도 적성에 맞고, 메이드들과 친해졌다. 나는 즐겁게 살고 있다."

멜리사가 웃으며 손전등을 장난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유리아… 아니, 마님은 내게 이런 말도 하더군. 주인님의 옆자리는 자신의 것이지만, 첩실 자리 정도는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고 말이야."

"유리아가 그런 말을…."

"나는 그 자리에 만족한다. 뭐라 해도 경쟁자가 마님이다. 경쟁해서 이길 자신이 없다. 하고 싶지도 않고.”

"네가 날 그렇게 사랑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착각하지 마라. 나는 사실 주인님을 별로 안 좋아한다. 주인님의 자지를 좋아하는 거지."

멜리사가 정색하며 말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뭐, 좋아. 유리아를 임신시킨 다음에 너도 임신시켜 줄게."

"주인님의 아기를 임신하는 건가. 나쁘지 않군."

비밀 통로의 끝이 보였다. 강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주인님. 부탁이 있다."

“부탁? 아르헨 공작을 죽여 달라는 부탁이면… 지금 당장은 무리야."

"어이가 없군. 왜 내가 그런 부탁을 할 거라 생각하지? 나는 아르헨 공작가와 연을 끊었지만, 연이 끊는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지 않나. 지금도 이렇게 아르헨 공작가를 찾아가고 있지. 나는 아르헨 공작가에 딱히 원한은 없다."

"그럼 무슨 부탁이야?"

“아르헨 공작…. 아버지에게 엿을 먹이고 싶다. 아버지 앞에서 나를 희롱해다오."

"아르헨 공작 앞에서 범해달라고?"

"아니, 희롱해달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근데 효과가 있긴 해? 넌 아르헨 공작가랑 연을 끊었잖아. 아, 예의를 중시한다고 했으니 효과가 있긴하겠다."

멜리사는 한 손으로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검푸른색 머리카락.

아르헨 공작가의 특징이다.

"나는 아르헨 공작가의 피를 이었다. 그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진실이다."

"…과연. 일부러 그런 노출도 높은 복장을 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좋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 들어줄게."

"감사한다, 주인님. 답례로 나중에 제대로 봉사해주지. 자, 가볼까."

멜리사가 강철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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