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9화 > 1289. 백작가에 환생한 매화검수
싸구려 창녀에게 동정을 헌납한 카일은 허탈한 걸음으로 화산파로 돌아왔다.
매일 하던 수련도 관두고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유진, 실리, 싸구려 창녀 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창녀와 뒹굴어 성욕을 해결했기 때문일까. 다행히 주화입마의 조짐은 없었다.
유진과 실리의 관계를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다. 그날, 축제 날 유진과 실리는 딱 봐도 평범한 남녀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시간이 좀 지나고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카일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화산파를 향해 달려오는 실리가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을 보니 방금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 갔다.
"……."
카일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리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자신과 실리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실리의 사생활에 관여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카일은 사람들이 새삼 다르게 보이는 걸 느꼈다. 특히 여자들을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자주 들었다.
실리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의 알몸과 함께 유진이 떠오른다. 예를 들면, 그녀가 화덕을 청소하려고 상체를 숙이고 엉덩이를 뒤로 쭉 내민 자세에선 유진이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허리를 흔드는 자세가 저절로 상상된다.
카일은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호기심과 성욕을 느꼈다. 실리와 창녀는 대체 얼마나 다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다른 여자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알몸은 어떻고, 섹스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라는 호기심이 계속해서 든다.
번뇌였다.
카일은 번뇌가 느껴질 때마다 수련에 집중했다. 번뇌를 떨쳐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실리가 카일을 찾아왔다.
"카일. 미안한데, 다음 주부터는 화산파에서 일하기 어려울 것 같아."
"…왜? 일이 힘들어?"
"그건 아니야. 이번에 프루커스 백작님 저택에서 일하기로 했어."
“프루커스 저택에서…? 출세했구나."
"응. 운이 좋았어."
운이 아니라 유진에게 몸을 판 것이겠지.
카일은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깜짝 놀랐다. 실리를 은연중에 무시하는 생각이다. 이래선 안 된다.
"축하해.”
“고마워, 카일."
실리가 환하게 웃었다.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에 심장이 잠깐 요동쳤다. 카일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방으로 돌아온 카일은 복잡한 마음을 달래듯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문득, 유리아와 유진이 떠올랐다.
유리아와 유진은 현재 약혼 상태다. 전쟁이 끝나면 공식적으로 결혼할 것이다. 성대한 결혼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실리와 마르티나를 저택으로 들인다고?'
실리와 마르티나. 그 두 사람은 유진의 정부였다. 동부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프루커스 백작이 모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니…. 세상이 알면 그들을 지탄할 것이다. 무엇보다 유진과 결혼할 유리아가 너무 가엾지 않은가.
'이대로는 유리아와 유진은 파멸할 뿐이야….'
유진은 불쌍하지 않다. 그는 외도를 저질렀다. 도리를 벗어났기에 마땅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유리아에겐 아무런죄가 없다. 그녀는 단순한 피해자일 뿐이다.
"후우우….”
명상에 집중하지 못한 카일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옷을 갖춰 입고 프루커스 본가로 찾아갈 준비를 했다. 각오는 굳혔다. 물론 이 일을 공론화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유진이 부정을 저질렀다고는 그의 동생이었다.
카일은 복잡한 심경에 괴로워하며 프루커스 백작가에 찾아갔다.
유진은 없었다.
하인에게 물어보니 요즘은 아침에 밖으로 나가서 저녁이 되면 들어온다고 한다. 유진이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카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너무 대놓고 외도를 저지르다니…. 너무 안일한 거 아닌가?
카일은 접견실에서 조용히 유리아를 기다렸다.
곧 유리아가 접견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푸른색 계열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액세서리로 과하지 않게 장식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차분한 기품과 아름다움에 카일은 한순간 정신이 팔렸다.
"카일 님. 오랜만입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카일은 입을 열었다 닫기를 몇 번 반복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피해자인 유리아는 더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카일은 각오를 굳히고 말했다.
"유리아. 믿기 힘든 말이겠지만… 유진은 외도를 저지르고 있어."
“외도… 말입니까?"
"유진은 평민 정부를 두고 있어. 사실, 네게 알릴까, 말까 많이 고민했지만… 네가 고통받지 않았으면 해서 알리는 거야."
카일은 유리아의 침착함에 당황했다. 약혼자의 외도를 들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로 카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카일 님은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냐니…."
카일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찡그렸다. 무엇을 원하고 유리아를 찾았는가. 정말로 유리아를 위해서인가?
카일은 자신 안에 있는 유진에 대한 분노와 질투, 증오 같은 추잡한 감정을 느꼈다. 거기에 자신은 아직 여전히 유리아를 포기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카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네가 유진과 파혼하기를 원해. 유진은 너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야."
"유진이 저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면… 저와 어울리는 남자는 누군가요?"
유리아의 질문에 턱하고 숨이 막혔다.
카일은 비어 있는 왼쪽 소매를 보다가 간신히 쥐어 짜내듯 말했다.
"내가…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유진보다 훨씬 더…! 바람 따윈 피지 않을 거고!"
유리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그녀는 비웃음에 가까운 헛웃음을 흘렸다.
"…실례했습니다. 잠깐 기가 차서 표정 관리에 실패했군요. 카일 님, 카일 님에 대한 제 속마음을 말해드리겠습니다."
유리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카일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경멸의 빛이 서려 있었다. 카일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는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처음에는 카일 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제게 다가오더니 귀찮게 굴기 시작하더군요. 이제는 귀찮음을 넘어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죽어주셨으면 합니다만, 유진의 형제시니 그럴수는 없겠죠."
유리아의 기운이 카일을 옥쥔다. 카일은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연신 닦아냈다. 유리아의 경멸과 혐오어린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자신이 바퀴벌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의 일을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저와 카일 님. 단둘만 남았다고 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자살할 겁니다."
"유리아… 나는…."
"부탁이니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역겨워서 두드러기가 날 지경입니다."
"……."
카일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그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요동쳤다.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길바닥을 전전하는 창녀뿐입니다."
카일은 고개를 벌떡 들었다. 경멸과 혐오의 눈빛에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얼마 전에 창녀가 반지를 팔려 저택으로 왔습니다. 상인들이 값을 후려치니, 제값을 받기 위해 저택으로 찾아온 것이었죠. 창녀가 가진 반지는 품질과 디자인이 뛰어났습니다. 일개 창녀, 그것도 늙고 성병에 걸린 창녀가 가질만한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심문 끝에 반지의 출처를 알아냈습니다."
“……그 창녀는 어떻게 됐어?"
“유진이 창녀에게 돈을 주어 입을 막았습니다. 물론 반지는 사지 않았습니다. 그런 역겨운 물건을 살 이유는 없으니까요."
"유진이… 나를 위해 창녀의 입을 막았다고…?"
“한낱 짐승도 은혜를 안다고 합니다. 짐승보다 좀 더 나은 머리를 가지고 계신다면… 유진에게 잘하세요. 당신이 지금 살아 있는 이유는 오직 유진의 자비 덕분입니다."
"……."
카일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죄책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유리아의 말은 모두 옳았다. 유진에게 받은 것들은 너무 많았다. 유진은 이 못난 형에게 너무 많은 것을 베풀었다.
"당신은 유진이 외도를 저지른다고 하셨죠. 당신은 틀렸습니다. 그건 외도가 아닙니다."
“…외도가 아니다?"
그가 놀란 듯 유리아를 바라봤다.
"놀이일 뿐입니다. 그 모녀는 유진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유진은 프루커스의 주인이고, 그녀들은 프루커스의 영지민입니다. 유진의 소유물이죠."
“넌 다 알고 있었구나. 전부… 알고 있었어."
"저는 유진이 얼마나 많은 여자를 품에 안아도 상관없습니다. 유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여자는 저일 테니까요."
유리아가 미소 지었다. 카일은 저 미소가 자신을 향한 미소가 아님을 알았다. 약혼자의 바람을 알았는데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거지? 카일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유리아에게 질문할 수 없었다.
유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 님. 앞으로는 제 눈에 띄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공식 행사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절 찾아오지 말아주세요."
유리아는 카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접견실을 나갔다.
카일은 한참을 조용히 접견실에 앉아있다가 화산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