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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285화 (1,285/1,497)

< 1285화 > 1285. 백작가에 환생환 매화검수

작은 화산판의 문주인 카일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새벽 5시. 카일은 해가 뜨기 전에 잠에서 일어난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간다. 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법을 수련한다.

아침 7시에 아침을 먹고 난 뒤에 화산파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들을 저녁 식사 전까지 가르친다.

지나칠 정도로 단조로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만족했다. 아니, 만족해야 했다. 화산파의 창설은 그의 꿈이었다. 비록 자신이 프루커스 백작이 되지 못했으나, 동생의 도움을 받아 화산파가 만들어졌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꿈이 이루어졌으니 분명 만족스러운 인생이다. 그러나 카일은 마음 한구석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공허함은 며칠이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카일은 공허함이 느껴질 때마다 수련을 멈추고 산책을 선택했다. 흐트러진 마음가짐으로 수련에 집중했다가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다. 이미 한 차례 주화입마에 빠진 전적이 있는 그다. 주화입마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일의 산책 루트는 화산파 주위와 도시 외곽이었다. 도시 외곽에는 피난민들이 자리 잡았다.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젊은 남자는 보기 힘들었다. 우연히 본 젊은 남자는 다리 하나가 없었다. 자신에게 왼팔이 없는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저들의 삶은 피폐해 지는군.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야 할 텐데….'

마음 같아선 피난민들에게 식량이라도 지원하고 싶으나, 지금 카일에겐 가진 재산은 화산파가 전부다. 프루커스 백작이자, 그의 동생인 유진에게 이런 일로 손을 벌리기도 뭐 했다. 카일은 유진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카일이 실리와 만난 건 우연이었다.

실리는 뭐가 그리 급한지 길을 뛰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바닥에 넘어졌고, 카일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줬다.

"고, 고마워요."

실리는 넘어진 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카일은 실리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고 순간적으로 놀랐다.

전생의 기억이 불현듯 찾아왔기 때문이다.

'난영 사저….'

그녀는 이제는 볼 수 없는 화산파의 난영 사저와 무척 닮았다. 외모는 물론이고 분위기까지.

"급한 일이 있나 보죠?”

"엘가 할머니에게 감자 스프를 전해주러 가는 길이었어요. 엘가 할머니는 늦는 걸 굉장히 싫어하시거든요."

"그래도 조심하셔야죠. 다친 곳은 없나요?"

"괜찮아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넘어지는 편이라 익숙해요. 안 아프게 넘어지는 요령이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감자 스프도 무사해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통에 담긴 감자 스프를 확인한 실리는 바로 다시 달릴 준비를 했다. 카일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어… 전 화산파의 카일이라 합니다."

"카일… 헉! 카일 프루커스시죠? 제, 제가 감히 귀족을 몰라뵙고…!"

그녀가 바닥에 무릎 꿇으려는 걸 카일이 서둘러 만류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전 당신을 무릎 굽히려고 이름을 밝힌 게 아닙니다. 그냥 제 이름을 알아줬으면 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아…. 저는 실리 제프닉이에요."

카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지금 같은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건 이대로 실리와의 인연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실리가 손에 든 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감자 스프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네요. 혹시 직접 만드셨나요?"

"네. 제가 만들긴 했는데요…."

실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카일이 감자 스프를 달라고 하지 않기를 빌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화산파의 주방일을 도와주시지 않을래요? 사람이 많다 보니 주방 일손이 좀 부족하더군요. 보수는 넉넉하게 쟁겨드릴게요. 한 달에 200만 네르는 어떤가요?"

실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200만 네르. 평민들에게 절대 적지 않은 돈이었다. 한 달에 200만 네르라는 고정적인 수입이 생긴다면… 삶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마르티나가 평소에 하던 말을 떠올린 그녀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감사한 제안이긴 한데…. 낮에는 밭일을 해야 해요. 어머니 혼자서 일하시는 걸 내버려 둘 수 없어요."

카일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경계심을 느꼈다. 원래라면 여기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럼 오후 시간에 와서 저녁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밭일은 오전에 끝난다. 밭 자체가 큰 편이 아니었고, 일하고 싶은 사람은 넘쳐났기 때문이다. 널널한 시간대인 오후에 일을 할 수 있다면…. 실리는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일할게요. 내일 오후부터 화산파에 가서 주방일을 도우면 되는 거죠?"

"네. 기다릴게요."

“그… 이만 가봐도 될까요?"

"당연하죠."

카일이 옆으로 비켜섰다. 실리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로 열심히 뛰어갔다. 흔들리는 그녀의 몸을 본 카일은 공허함이 사라진 걸 느꼈다.

그로부터 열흘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카일은 화산파 입구로 향했다. 저 멀리서 실리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밭일로 다져진 것일까. 의외로 체력이 좋은 그녀는 뭐가 그리 급한지 항상 뛰어다녔다.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하. 카일 님. 그녀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그의 밑에서 수련하는 기사가 카일에게 말을 걸었다. 카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너희들이 실리를 귀찮게 할까 걱정돼서 감시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녀는 아름다우니 우리 중에서도 인기가 많죠. 그저께는 신참이 그녀에게 고백했습니다."

"뭐?"

"하하. 카일 님. 얼굴 펴십시오. 그 신참은 바로 차였습니다. 신참의 말로는 이미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틈이 아예 없었다더군요."

"좋아하는 사람…?"

"누구겠습니까. 카일 님 말고 더 있겠습니까? 카일 님은 성격 좋고, 가문 좋고, 능력도 좋죠. 제가 여자였어도 카일 님에게 반했을 겁니다."

"…헛소리 말고 가서 수련이나 해."

"알겠습니다. 오늘 저녁도 무척 기대되는군요. 아, 카일 님. 일주일 뒤에 북쪽 전선에 올라갔던 3병단이 귀환한다더군요. 그 시기에 맞춰 귀환 축제를 연다고 합니다."

"그거라면 나도 들었어."

"그녀와 같이 축제를 즐기십시오. 이런 기회 좀처럼 없습니다. 저도 축제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기사는 웃으면서 수련장으로 향했다.

'축제라….'

카일은 순간적으로 유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녀는 곧 동생의 아내가 될 여인이었다.

"카일!"

실리가 그를 불렀다. 지난 시간 동안 카일과 실리는 제법 친해졌다. 둘만 있을 때는 서로의 신분을 신경 쓰지 않고 즐겁게 대화를 나눌 정도다.

“왔어?"

"응. 미안. 조금 늦었지?"

"약간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엘시랑 노느라 시간 가는 걸 잊었지 뭐야."

"엘시는 실리의 동생이지? 동생 돌보기 힘들면 같이 와도 돼."

"갠 안 올 거야. 엘시는 집에서 노는 걸 엄청 좋아하거든. 이만 주방으로 가볼게."

“실리."

카일은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를 급하게 불러세웠다.

"응?"

"다음 주에 3병단이 돌아오는 것에 맞춰 축제를 진행한다더라. 같이 축제에 가보지 않을래?"

"축제…. 그때 시간이 되려나…."

카일은 당황했다. 활달한 그녀의 반응이 예상외로 시원찮았다. 카일은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저번에 프루커스 백작 저택을 구경해보고 싶다고 했지? 이번 축제 때 내가 안내해줄게."

깜짝 놀란 실리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저택을 가까이서 보면 어떨까 궁금했을 뿐이야!"

"괜찮아. 정식으로 널 초대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지만…안내해주는 것쯤은 가능해. 나도 프루커스 가문의 일원이야."

"하, 하지만."

“아무 문제 없어. 그냥 저택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뿐이야."

"…정말 괜찮은 거야?"

"내가 장담할게.”

카일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실리는 고민하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프루커스 백작이 평소에 생활하는 저택이 너무 궁금했다.

“고마워, 카일."

“이 정도로 뭘."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해서 이만 주방으로 가볼게."

아침에 제브릭 가에 들어온 나는 엘시와 신나게 놀아줬다. 너무 신나게 놀아준 탓일까. 엘시는 의자에 앉자마자 잠들었다. 엘시가 편히 낮잠을 잘 수 있도록 방에 데려다줬다.

'실리는 화산파에 일하러 갔고…. 유일한 방해꾼인 엘시는 방금 막 잠들었지."

엘시는 저녁 무렵에 일어날 것이다.

나는 마르티나의 침실로 향했다.

똑똑똑.

"마르티나. 안으로 들어가도 되나?"

"네, 물론입니다. 백작님.”

문을 열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마르티나가 보였다.

그녀는 편안한 옷을 입고 있었다. 긴 갈색머리는 로우번으로 묶어 가늘고 하얀 목선을 드러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싱긋 웃었다.

“왼쪽 다리 상태는 어떻지?"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이젠 아프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걸어도 될 것 같습니다."

"안 된다. 의사의 말을 따라 좀 더 안정을 취해라."

"알겠습니다."

마르티나가 차분히 대답했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침대 옆의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의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조용했다. 도시 외곽 지역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도 잘 안 보인다.

"저… 백작님?"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마르티나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무슨 고민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제겐 백작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릴 능력은 없지만.. 들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저는 입이 무겁습니다."

“후우…. 마르티나. 그런 게 아니다. 이건 제프닉 가의 문제다."

"네?"

나는 한참을 고민하는 척 연기하다가 말했다.

"제프닉 가의 문제이니… 말해야겠지. 마르티나,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라. 알폰스 제프닉은 전사했다."

"네, 네? 거, 거짓말이시죠?"

“…나도 오늘 아침에서야 들은 정보다. 전투가 너무 격렬해서 시체조차 회수하지 못했다더군.”

"아, 아아… 알폰스…."

마르티나의 상체가 비틀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흐윽…. 흑…."

“이런 소식을 네게 전하게 되어 유감이다, 마르티나. 그리고… 네게 미안하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흑…. 백작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백작님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알폰스는… 흐윽…. 흑."

나는 마르티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두 딸의 어머니로서 항상 당당하게 있으려던 그녀가 무너지며 내게 안겼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내 상의를 적신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듯 아무 말 않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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