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4화 > 1284. 백작가에 환생환 매화검수
실리의 집에 들어갔다.
판잣집치고는 꽤 넓은 편이었다. 집 내부에 물건이 없어서 더 넓게 느껴졌다.
내부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한 명은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고, 한 명은 내 키의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여자 아이였다. 실리의 어머니와 여동생이다. 두 사람 모두 실리의 가족답게 외모가 뛰어났다. 특히 실리의 어머니는 실리만큼이나 가슴이 컸다.
“실리. 그분은?"
"언니. 그 사람은 누구야?"
"아. 이분은…."
실리가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앞으로 나가며 당당하게 스스로를 소개했다.
"유진 프루커스 백작이다. 웃이 마를 때까지만 실례하지."
"배, 백작님?!"
놀란 그녀들이 바로 바닥에 무릎 꿇는다. 나는 손을 휘저으며 그녀들을 말렸다.
“내가 불청객이란 건 알고 있다. 내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있도록."
“아, 네. 백작님."
실리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쭈뼛거린다. 편하게 있으라고 말해도 정말 편하게 있지 못 한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인생은 내가 던진 한마디에 파멸될 수 있으니까.
나는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이 없어서 집안은 어둡고 습했다. 그나마 문을 통해 빛과 바람이 들어오긴 하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는 채소와 고기가 올려져 있다. 내가 이 마을에 가져온 식량이다.
"내가 식사를 방해했나?"
“아니에요. 우린 저녁에 음식을 먹습니다. 백작님. 식량을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은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것 같습니다."
실리의 어머니가 말했다.
“톰에게 들었나 보군. 그런데 이 집에는 화덕이 없군? 설마 요리하지 않고 그냥 먹는 건가?"
"화덕은 집 밖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편하겠군."
“익숙해지면 괜찮습니다. 백작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물이라도 내오겠습니다."
"됐다. 불청객으로서 많은 걸 바랄 수는 없지."
나는 탁자 위에 오렌지 주스가 든 유리병을 꺼냈다. 내 것을 포함한 유리컵 4개를 꺼내 오렌지 주스를 부었다.
"오렌지 주스다. 이곳에선 흔히 먹을 수 없는 음료지. 한 잔씩 해라."
그녀들은 손을 뻗지 못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런 귀한 걸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주는 음료는 못 먹겠다는 건가?"
"겨, 결코 아닙니다!"
실리의 어머니가 당황하며 손을 뻗었다. 그녀는 딸들에게도 눈짓했다. 그녀의 딸들도 내 눈치를 보며 오렌지 주스가 든 컵을 잡았다. 내가 먼저 오렌지 주스를 마셨고, 그녀들도 오렌지 주스를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우와아아! 맛있어!!"
실리의 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다른 여인들도 오렌지 주스의 맛에 놀란 건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맛있는 음료는 처음입니다! 맛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오렌지 주스라고 했죠?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다니…. 놀랍네요."
그녀들의 분위기가 한층 풀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내가 부담스러운가 보군."
"아, 아닙니다!"
"괜찮다. 이해한다. 갑자기 백작이 나타났으니 무척 당혹스럽겠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차례 목소리를 낮추고 그녀들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너희…. 제프닉 일가를 찾아서 이 피난촌에 왔다. 우물가에서 운 좋게 실리 제프닉을 만났지. 뭐, 물벼락을 맞은 건 예상외였지만."
"죄, 죄송해요."
"장난이다, 실리. 고개 숙일 필요 없다. 아,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도록. 괜히 구설에 오르는 건 너희에게도 좋지 않을 테니까."
"저 백작님."
실리의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굳은 얼굴을 보니 어떠한 각오까지 끝마친 모양이다.
"질문해라."
“…저희 가족을 찾아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쁜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단순히 알폰스에게 받은 빚을 갚고 싶을 뿐이다."
"알폰스…. 그이를 아시나요?"
알폰스 제프닉.
실리의 아버지다.
알폰스 제프닉은 원작에서처럼 전사했다. 이미 조사를 끝마쳤다.
"알다마다. 그는 나의 전우다. 전장에서 알폰스에게 목숨 빚을 졌지. 알폰스의 아내…. 마르티나. 네 이름도 알고 있다. 첫째 딸은 실리, 둘째 딸은 엘시. 알폰스는 내게 항상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말했지."
거짓말이었다.
알폰스인가 뭔가 하는 놈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알폰스는 이미 죽어서 만날 수도 없다.
마르티나는 남편의 이야기에 울컥했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흐윽…. 호. 혹시 그이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북쪽 전선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전쟁이 끝난다면 돌아오게 될 거다."
"살아있다는 거군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마르티나는 안심한 듯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녀에게 하얀 손수건을 건넸다.
"이걸로 닦도록."
“…이런 귀한 걸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상관없다. 이건 이제 마르티나, 네 것이니."
나는 그녀에게 억지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손수건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마르티나에게 제안을 건넸다.
"마르티나. 편의를 봐줄 테니 저택에 와서 일하지 않겠나? 알폰스의 가족들이 이곳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군,"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백작님의 저택에서 일할 수준의 격식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이가 돌아오면 바로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마르티나가 거절했다.
그녀의 거절은 예상한 대로였다. 한때 마르티나는 귀족 저택에서 일했던 하녀였고, 도둑으로 몰려 재산을 전부 빼앗기고 쫓겨났다. 그때의 안 좋은 경험이 그녀를 붙잡고 있다.
“네 의견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나는 너희를 도울 것이다."
"저희는 정말 괜찮습니다."
“내 명예와 관련된 일이다. 설마하니 나를 은혜도 모르는 놈으로 만들 생각인 건 아니겠지?"
"아, 알겠습니다. 그럼 백작님께 약간의 도움만 받겠습니다."
마르티나는 부담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우선 거처부터 옮기지."
"네?"
“이런 열악한 곳에 내 은인들을 머물게 할 수 없다. 근처에 비어있는 집들이 꽤 있다. 그중에 하나를 너희에게 무료로 대여 해주지. 대여 기간은 알폰스가 돌아올 때까지다."
“그건….”
"마르티나. 부디 내 선의를 무시하지 말아다오."
“……네."
그녀들은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젖은 옷이 마른 뒤에 그녀들을 데리고 난민촌을 떠났다. 떠났다고 말해도 사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소개해준 집은 판잣집과 비교하면 도리어 민망해질 정도의 2층 주택이다.
도시 내의 중산층들이 사용하는 집이다.
"이런 엄청난 집을 정말 저희가 사용해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마르티나. 이 정도 집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의사도 불러야겠군.”
"의사입니까?"
“아까부터 왼쪽 다리를 절더군.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이건… 저번에 일하다 넘어져서 그렇습니다. 통증도 별로 없습니다. 생활에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그걸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라 의사의 일이다. 의사를 데려올 테니 들어가서 짐을 풀도록."
나는 늙은 의사를 데려와 마르티나를 진찰시켰다.
마르티나의 왼쪽 무릎을 진찰한 늙은 의사가 심각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뼈가 약해진 상태입니다. 조기에 발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조금 더 늦게 발견했다가는… 다리를 잘라야 했을 겁니다."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특히 마르티나의 딸들인 실리와 엘시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물론, 의사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마르티나의 왼쪽 무릎은 그저 타박상일 뿐이다. 며칠 푹 쉬면 흔적도 없이 나을 것이다. 의사는 사전에 내가 시킨 대로 지껄일 뿐이었다.
"부인. 다리를 영영 잃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그, 그럴 수가. 전 일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마르티나가 격앙된 말투로 말했다. 의사가 나를 돌아본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지. 의사, 조치해라."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마르티나의 왼쪽 다리에 약초를 바르고 붕대를 휘감았다.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와 경과를 확인할 테니, 그때까지 얌전히 휴식을 취하십시오. 저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늙은 의사가 떠났다.
마르티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마르티나. 걱정하지 마라. 당분간은 내가 돌봐줄 테니."
“…백작님."
"거절하지 마라. 아이들과 미래를 생각해야지."
이 세계는 사지가 멀쩡해도 살기 힘든 세계였다. 하물며 다리 한 짝이 없다? 가족들에게 짐만 될 뿐이다. 때문에 이 세계에서 장애인 가족을 버리는 일은 흔하고도 흔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마르티나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주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 가만히 있어요. 집안일은 제가 전부 할게요."
"엄마. 다리 잃으면 안 돼. 괜찮은 거 맞지?"
"실리,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엘시, 엄마는 괜찮아."
거실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잠시 후에 실리가 침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백작님! 정말 감사해요! 백작님 덕분에 어머니가 다리를 잃지 않아도 돼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신경 쓰지 마라. 은혜를 갚고 있는 건 내 쪽이니까. 너의 아버지…. 알폰스는 내 목숨을 구해줬다. 그 은혜를 겨우 이 정도로 갚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실리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실리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실리가 몸을 움찔대며 뺨을 약간 붉혔다.
"그래도…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저기…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음? 약속이라도 있나?"
"오늘부터 화산파의 저녁 준비를 돕기로 했어요.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올 거예요. 화산파는…."
"알고 있다. 그곳의 주인이 내 형제지. 혼자가기 뭐하면 내가 같이 가주지."
"괜찮아요. 길은 아니까요. 화산파가 위험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요.”
"흐음. 그래. 저녁까지 기다리지."
"기다리신다고요?"
"당장 할 일은 딱히 없고… 너희 걱정도 되니 말이다. 민폐인가?"
“절대 아니에요! 저녁도 먹고 가시겠어요? 부족하지만 꼭 저녁 식사를 백작님께 대접해드리고 싶어요!"
"호오. 요리에 자신 있나 보군?"
“어머니에게 배웠어요. 어머니는 예전에 귀족 저택에서 일했거든요. 그래서 요리만큼은 자신 있어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실리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그녀의 흔들리는 젖가슴을 여유롭게 감상했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2층 계단에서 엘시가 날 빼꼼 바라보고 있다. 마르티나와 실리를 닮아 귀여웠다. 대충 5년 뒷면 실리에 버금가는 미녀가 될 테지.
나는 엘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시. 심심하면 나와 놀아주지 않겠니?"
"그, 그럴게요. 백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