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3화 > 1283. 백작가에 환생환 매화검수
저녁을 먹고 다시 유리아에게 카일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카일은 현재 프루커스 저택 밖, 도시 외곽에서 생활 중이다. 내가 내쫓았다. 물론 카일을 강제로 내쫓은 건 아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화산파를 정식으로 창설하기 전에 기반을 닦는 것이다. 화산파 무공을 배우길 원하는 기사나 병사, 평민 몇 명이 카일의 밑에서 수련 중이다. 지금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카일이 머무는 건물에 감시 카메라를 몰래 설치하고, 사람까지 심어두었다. 카일의 일거수일투족은 내 손바닥 위에있다.
"카일이 누구를 만났다고?"
가신을 만나서 수작을 부린다. 라는 건 아닐 것이다. 카일의 성격 상 프루커스 백작위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털어냈을 테니까.
카일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바로 전장터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네. 이번에 도시로 피난 온 한 여성과 만났습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듯합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카일의 인생은 내가 설계해두었다. 카일은 약혼자인 배리엔 플라이트와 결혼하고, 평생 화산파를 운영하며 인재를 육성하게 될 것이다.
“여자라. 뭐 하는 여자야? 팔 병신인 카일에게 일부러 접근 한다라…. 카일의 재산으로 인생 역전을 노리는 여자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실리 제프닉입니다.”
"실리…!"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깜짝 놀랐다.
카일이 주인공인 원작에는 총 5명의 히로인이 존재한다.
라펠리 왕국의 공주 에이미, 엘프 노에 엘노아, 모험가 클로디아, 아카데미 동급생 샤르넬.
그리고 원작 마지막에 등장하는 다섯 번째 히로인 실리 제프믹.
실리는 원작의 카일이 그랜드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전에 등장한다. 모종의 이유로 힘을 잃은 카일을 돌봐주는 시골마을 여자다. 물론 히로인인만큼 그 미모는 시골 여자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하다.
"걔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무래도 전쟁을 피해 도시로 피난 온 듯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지요."
"……카일이 지금 실리와 썸을 타고 있다는 거지?"
“그 정도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와 그녀는 오늘 낮에 처음 만났습니다."
“아니. 카일이면 실리를 의식하고 있을 거야. 원작에서도 실리를 보자마자 의식했거든."
이대로 실리와 카일을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지 뻔하다.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그녀를 테브라의 저택으로 데려가 메이드로 만드는 편이 어떨까요?"
"간단한 방법이긴 하네. 돈이나 혜택으로 가족을 꼬시면 안 넘어올 수 없겠지. 지금 실리는 도시로 피난 온 시골 여자니까. 하지만… 그래선 너무 재미없지."
나는 유리아와 함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전.
나는 수행원 없이 저택 밖으로 나가 도시를 걸었다.
원래라면 활기차야 할 도시지만, 지금의 도시는 한산했다.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와 일하는 평민들은 대부분 여자와 늙은 남자들이다. 젊은 남자는 강제로 징집되어 병사로 복무 중이다.
도시 중심에서 외곽 쪽으로 나간다. 평민들의 복장이 점점 단순해지고, 느껴지는 기척도 점점 줄어든다.
외곽으로 나오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일하고 있다. 가죽을 두들기거나 밭에서 일한다.
나는 농지 옆에 있는 나무 건축물을 바라봤다. 대충 지어진 듯한 건물 앞에 화산파(華山派)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정신을
집중하자 화산파 건물 내에서 남자의 기합 소리가 들린다. 열심히 수련 중인 모양이다.
나는 한참 화산파 건물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다른 곳에서 피난온 평민들이 모인 곳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도시 중심보다 훨씬 더 우울한 분위기였다. 이곳에도 남자가 없는 건 매한가지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사방에서 경계 어린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이 귀족의 옷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나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자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센 노인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입고 있는 옷이 가장 좋다.
"프, 프루커스 백작님을 뵙습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오셨는지…? 세금이라면 일주일 전에 징수관에게 납부했습니다! 증명서도 있습니다!"
"세금 때문에 온 게 아니다. 네가 이곳에 대표인가?"
"그… 일단 제가 여기 피난민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치렐르 마을의 촌장인 톰 플론입니다."
"톰. 최근의 나는 백작위를 계승했다."
"예. 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계승을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원래라면 축제를 벌이고 고기와 술을 영지민들에게 베풀어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전쟁이 진행 중이지 않나."
"배, 백작님. 저희는 어떤 불만도 없습니다."
"알고 있다. 근데 영지민들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편치 않더군. 특히나 너희 같은 피난민들에겐 미안한 감정뿐이다. 그래서내 사비를 털어 피난민들에게 식량을 지원하기로 마음먹었지."
"…식량 지원 말입니까? 어, 어느 정도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두 눈이 반짝거린다. 주위에 있는 피난민들도 마찬가지다.
"톰. 난민촌의 식량 상황은 어떻지?"
"…솔직히 말해서 지원이 필요합니다. 식량이 없어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군."
나는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박스를 소환했다. 박스를 열자 채소를 비롯한 고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식량을 지원해주지. 이 정도면 일주일은 버틸 수 있겠지?"
“…피난민들이 많다 보니 이 정도 양이면 하루 만에 사라질 것입니다. 아, 백작님에게 식량을 더 달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 정도 식량만으로도 저희는 백작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프루커스 백작님 만세!"
톰을 비롯한 평민들이 바닥에 무릎 꿇고 만세를 열창한다. 같잖은 짓거리에 짜증이 치솟는다. 나는 표정을 관리하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만. 나는 너희의 찬양을 받으려고 식량을 지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프루커스 백작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다."
"대단…, 정말 대단하십니다! 프루커스 백작님!"
날 보는 톰의 눈빛에는 존경심이 가득하다.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너희의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분해라."
“그럼 제 아들을…."
"혼자서 둘러볼 수 있다. 아니면 내가 길도 못 찾을 정도로 멍청하다고 무시하는 거냐?"
"겨, 결코 아닙니다!"
극구 부인하는 톰과 식량에 정신 팔린 피난민들을 뒤로하고 난민촌을 걸었다. 판자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꽤 어지럽다. 길거리에 놓인 오물들도 심상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딴 더러운 마을이 내 영지에 있다니… 마음 같아서는 확 밀어버리고 싶군.'
커다란 나무가 있는 쪽에 도착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판잣집과 밭이 보인다. 밭에는 여자들 몇몇이 달라붙어 일하고 있다. 그중에 한 여자가 내 시선을 끌었다. 긴 갈색 머리카락을 땋고 두건을 썼다. 그녀는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를 가진 젊은 처녀였다.
'실리 제프믹. 마지막 다섯 번째 히로인이군.'
나는 그늘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켜봤다. 확실히 평민치고 굉장히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꾸민다면 어지간한 귀족 영애도 그녀 앞에선 빛을 잃을 것이다.
오전에 밭일을 끝낸 실리는 양동이를 들고 우물가로 향했다. 같이 밭일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집으로 향한다. 나는 실리의 뒤를 따라갔다.
마침 우물가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타이밍을 가늠하다 기척을 숨기고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도 이곳에 사는 피난민인가?"
"꺄악?!"
갑작스러운 등장에 실리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양손으로 들고 있던 양동이가 떨어지며 물이 내게 쏟아졌다.
옷이 흠뻑 젖었다. 실리는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내가 귀족인 걸 눈치챈 것이다.
"죄, 죄송해요. 까, 깜짝 놀라서…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지…."
실리는 안절부절못하고 손을 퍼덕거렸다. 귀족인 내 몸을 함부로 만지지도 못했다. 나는 천천히 옷에 묻은 물들을 털어냈다.
털썩.
실리는 바닥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젖소만 한 가슴이 크게 출렁인다. 직접 보니 압도되는 느낌이다.
'원작대로 5명의 히로인 중에서 가장 가슴이 크군.'
가슴만이 아니라 엉덩이도 컸다.
"일어나라. 이 일로 네게 책임을 물을 일은 없다. 따지고 보면 내가 너를 놀라게 한 탓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 하지만 귀족님에게 물을 뿌려버렸는데…."
"마침 더운 참이었다. 시원해서 좋군."
"히익…. 죄, 죄송합니다."
실리가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숙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상체가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그녀의 젖가슴은 역동적으로 출렁였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두건 아래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하얀 피부는 매끈하고 턱선은 가늘다. 눈은 컸으며, 눈꼬리는 아래로 처졌다. 부드럽고 순진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진한 모성애가 느껴진다.
“…나는 유진 프루커스 백작이다. 얼마 전에 아버지로부터 작위를 계승했다."
“여, 영주님이셨네요! 제, 제가 대단히 큰 실레를…!”
“이미 용서했다. 그러니 그렇게 벌벌 떨 필요 없다. 네 이름은 어떻게 되지?"
“실리 제프닉이요…."
“제프닉이라…."
나는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억지로 그녀를 취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실리. 내가 물에 젖어 있는 꼴을 다른 사람들이 봤다간 내 명예가 실추된다. 그래서 옷을 말리고 싶은데…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알고 있나?"
“아… 그게….”
실리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사,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집 말고는 없어요. …그, 괜찮으시다면 저희집에 오셔서 옷을 말릴래요…? 배,
백작님에게 너무 무례했나요?"
"무례하지 않다. 옷을 마를 동안 네게 신세 지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