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270화 (1,270/1,497)

< 1270화 > 1270. 다크문

유리아가 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와 대련을 진행 중이었다.

상대는 타오르는 불꽃 같은 붉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유리아보다 키가 컸다. 아니, 키뿐만이 아니라 체격 전체가 유리아보다 컸다. 다만, 비율로 따지면 유리아와 비슷한 몸매다.

"유리아, 왜 그러지? 갑자기 멍솔 때리다니. 너답지 않군."

걱정하는 듯한 말과 다르게 그녀는 사정 봐주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유리아는 손에 쥔 검을 위로 올려 검을 막아냈다. 상대의 힘이 엄청났다. 지금의 유리아로선 감당할 수 없었다. 유리아는 검을 미끄러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호오. 뭔가 더 부드러워졌군. 깨달음이라도 얻었나?"

그녀가 달려든다.

힘을 위주로 한 강검.

유리아는 부드러운 검술로 방어를 이어 나갔다. 본능적인 수비에 가까웠다. 그녀는 지금 대련이 아니라 떠오르는 기억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리아 그레이스.'

본래의 자신과 이 세상의 자신은 이름이 똑같았다. 외모도 똑같다. 그러나 살아온 배경이 달랐다. 유리아는 현재 이 세상의 자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하하. 좋은 걸, 유리아!"

그녀의 검에서 불꽃이 타오른다.

'불꽃이 아니야. 불꽃과 매우 흡사한 오러.'

불꽃처럼 뜨거운 오러였다.

유리아도 검날에 오러를 덧씌웠다. 상대방의 붉은 오러와 대조되는 푸른색의 오러였다.

검격을 나누면서 유리아는 기억의 정리를 이어갔다.

첫 기억은 고아원.

그곳에서 유리아는 자신의 전사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고아원장의 추천과 네오 원탁 의회의 후원으로 기사수련원에 들어갔다.

눈앞에서 싸우고 있는 여자는 기사수련원에서 만난 룸메이트다.

이름은 아르미나 브레이버.

원탁의 기사가 되어 몰락한 브레이버 가문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

그녀는 기사수련원의 수석이었다. 기사수련원 전대미문의 괴물. 이라는 별명의 주인이었다.

차석인 유리아와 둘도 없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물론 유리아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아르미나는 기억에 있는 여자일 뿐이었다. 친근감?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기사수련원의 기억을 별거 없었다. 기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반복하는 나날. 지루한 기억이었다.

"유리아!!"

아르미나가 유리아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가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오러가 검날에 압축된다. 아르미나가 검을 휘둘렀다. 불꽃의 검기가 유리아에게 쇄도한다.

유리아의 반응이 늦었다. 기억의 정리에 너무 몰두한 것이다. 피하는 건 불가능했고, 정면으로 막아낸다면 팔에 화상을 입을 것이다.

설령 치료할 수 있더라도 몸에 상처가 생기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녀의 몸은 주인이 따로 있었으니까.

유리아는 판단을 내렸다.

영천류 암영(暗影).

검날에 서렸던 푸른 오러가 한순간에 검게 변한다. 검은 오러는 붉은 검기를 침식하여 없애버렸다. 유리아는 허공에 검을 휘둘러 검은 오러를 털어냈다.

"방금 뭐야? 처음 보는 기술인데?"

유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사수련원에서 비전 기술을 익히는 건 허락되고, 비전 기술을 다른 이에게 말해야 할 필요는없다.

"아르미나. 제가 졌습니다."

"…맥 빠지게 그게 뭐냐. 이제 겨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만."

아르미나가 투덜대거나, 말거나 유리아는 검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아르미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검을 내렸다.

그녀들은 바로 샤워실로 이동했다.

기사수련원에는 지켜야 할 규칙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대련 후에 몸을 씻는 것이다. 기사수련원은 청결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청결을 미덕이라 여길 정도다.

유리아는 샤워실을 걸어가며 아르미나의 몸을 힐끗 바라봤다. 흉터 하나 없는 깨끗한 몸이었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근육이 별로 없어 보였다. 대련장에서 괴력을 발휘하던 것을 떠올리면 놀라운 일이었다.

유리아는 아르미나 브레이버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아르미나는 불의 정령인 샐러맨더의 인자(지구)를 보유했다.

선천적인 것이다. 덕분에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불꽃과 관련된 이능도 가지고 있다.

"아까부터 내 몸을 뚫어져라 보는군? 이상한 거라도 묻었나?"

아르미나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커다란 가슴이 시야에 거슬린다는 듯이 한 손으로 잡아 옆으로 당기며 복부를 확인한다. 복부 아래에는 머리카락과 같은 붉은 음모가 타오르듯이 자라있었다. 제법 수북했다.

"아뇨. 이상한 건 없습니다. 그런데 아래쪽 털의 관리는 그만뒀습니까? 저번에 봤을 때와는 좀 다르군요."

"아, 이거? 요즘 네오 런던에서 유행이라더군."

"…유행이요?"

"맞아.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더라. 어차피 남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고… 나중에 날 잡아서 한 번에 자를 거다."

아르미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샤워기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아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서 정면의 거울을 바라봤다. 정면의 거울을 확인한다. 흉터가 없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보지털은 역삼각형 모양으로 손질되어 있었다.

'주인님의 취향이… 흐으음.'

주인의 취향은 그때그때 달라진다. 약 한 달 뒤에 만나게 될 테니, 그때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보지털은 보류다.

샤워를 끝낸 그녀들은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르미나는 침대에 드러누웠고, 유리아는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마법을 사용하면 순식간에 머리카락을 말릴 수 있으나, 이 세상의 유리아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 세상의 아바타를 선택하며 딸려온 아바타였다.

"유리아. 네가 3급 기사 자격증을 따면… 같이 웨일스 기사단에 입단하자. 네오 런던 최고의 기사단으로 손꼽히는 만큼 빠르게 출세할 수 있을 거다. 특히, 웨일스 기사단은 가문이 아닌 개개인의 실력을 보고 평가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아르미나는 이미 3급 기사 자격증을 땄다. 그녀가 기사수련원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유리아와 함께 하기 위해서다.

아르미나는 유리아에게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유리아는 아르미나에 대한 유대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유리아의 머릿속은 단 한 명이 지배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기사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뭐? 갑자기?! 농담하지 마. 재미없다."

"아무래도 기사의 길은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3급 기사 자격증을 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나?!"

“실언이었습니다."

아르미나는 유리아를 빤히 바라봤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붉은 머리칼을 긁적였다.

“기사가 아니라면… 뭘 할 거지?"

"메이드가 되려고 합니다."

"…혹시 뭘 잘못 먹었나? 아니, 나도 같이 먹었을 테니 이상한 건 먹지 않았을 텐데…."

"메이드가 저의 천직입니다.”

"이미 결정을 내렸군. 내가 아무리 설득해 봤자 안 듣겠지."

아르미나가 힘없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괜히 시간만 버렸어."

"죄송합니다."

"됐다. 네 미래니, 네가 선택하는 게 옳다. 내가 널 고용하면 안 되나?"

"죄송합니다. 취직 계획은 이미 세워뒀습니다."

"수련원장이 많이 실망하겠군. 의회에 빚이 생기는 것도 알고 있겠지? 3억 5천만 크레딧이었나."

"네. 알고 있습니다. 모두 감안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그래. 지난 17년 동안 함께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헤어지게 됐군. 기분이 좀 묘하군.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겠지?"

"저도 네오 런던에서 생활할 겁니다. 만나려고 한다면, 언제든 만날 수 있겠지요."

"문제는 앞으로 1년간 만날 틈이 없다는 점이다. 웨일스 기사단에서 얼마나 힘들게 구를 지 벌써부터 두려워지는군."

"아르미나라면 이겨내실 겁니다. 늘 그래왔으니까요."

"사실 두려움은 없다. 오히려 기대되고 있다. 나는 반드시 원탁의 기사가 되어… 가문을 일으켜 세울거다."

일주일 뒤, 아르미나는 웨일스 기사단에 입단했다.

유리아는 캐리어를 끌고 네오 런던을 걸었다. 네오 런던의 날씨는 워낙 변덕스러웠기에 우산을 챙기는 건 필수였다.

드르륵. 드르르륵.

사흘째 네오 런던의 빅벤 주위를 걷고 있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주인님과의 운명적인 조우.

물론 그녀는 주인님의 집을 알고 있다. 허나 직접 찾아가는 건 너무 이상하기에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레이디. 혹시 직장을 구하십니까?"

정장을 입은 신사가 정중하게 물어왔다.

유리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직장은 이미 구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혹시 지금의 직장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이곳으로 연락주십시오."

남자가 명함을 건넨다. 벨라트 자작가의 총집사라는 직책이 적혀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지요."

남자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떠났다.

유리아는 받은 명함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녀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오직 단 한 명의 주인을 모시기 위함이었다. 그외의 다른 이유는 없었다.

드르르륵.

그녀는 다시 캐리어를 끌며 네오 런던의 우중충한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라던 때가 왔다.

저 멀리서 주인님이 보인다. 인파에 가려져 있어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으나, 존재감, 분위기, 걷는 방식 등 모든 게 주인님을 증명하고 있다.

두근.

유리아는 심장을 뛰는 걸 느꼈다. 우울한 회색 세계가 화려한 색을 머금은 컬러풀한 세계로 변모한다.

드르르륵. 드륵!

유리아는 너무 들뜬 발걸음을 주의했다.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며 거리를 걷는다.

주인님과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녀의 심장은 생동감 넘치게 두근무근 뛰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님과 만났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주인님에게 다가갔다. 주인님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심장 한편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과거, 자신이 기억을 잃었을 때 주인님은 주인님이었듯, 주인님이 기억을 잃었어도 주인님은 주인님이다.

유리아는 당장 뛰어가 주인님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혹시 메이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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