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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267화 (1,267/1,497)

< 1267화 > 1267. 다크문

"인간? 뭐지? 친숙함이 느껴진다. 계약자냐?"

그 말에 놈의 정체를 직감한 나는 옅은 신음을 흘렸다.

"악마 비오다. 너는?"

"악마 따위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응. 나랑 계약하지 않겠나?"

악마와의 계약.

원작 게임에서는 무조건 이득인 제안이다. 페널티를 얻는 대신 영구적인 스펙업이 가능했으니까. 따로 악마 계약자라는 전문 직업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여긴 게임 속 세계지만, 게임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체. 네 계약자가 아니냐? 계약자를 죽인 거냐?”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그는 힘을 원했고,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흑마법사는 이곳에서 악마를 성공적으로 소환했다. 그것만으로 대단한 업적이다. 어중이떠중이는 악마를 소환하지도 못한다.

문제는 악마와의 계약을 성공적으로 끝내지 못했다. 아마 악마 소환에 성공하고 잔뜩 흥분했겠지. 흑마법사는 힘을 원했고, 악마는 아마 대가로 신체 일부를 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손가락, 발가락, 귀 한쪽 등은 얻는 힘에 비하면 별거 아닌 대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악마가 계약자를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게약 했을 것이다.

악마는 계약의 대가로 흑마법사의 장기를 가져갔다. 악마의 아래, 복부가 텅 비어 있는 시체가 그 증거다.

"계약을 빌미로 날 죽이고 싶은 거냐."

"아니. 이놈과 너는 다르다. 이놈은 우연히 소환에 성공한 주제에 너무 거드럭대더군. 나와 계약할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래서 죽였나?"

"응. 장난 좀 쳤다. 생각대로 멍청하더군."

나는 악마에 관해 생각했다.

악마 비오.

원작의 지식을 알고 있는 내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아마 하급 악마일 것이다.

"저놈과 달리 나는 마음에 들었나?"

"보면 안다.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마나가 너를 축복하고 있다. 그런 인간은 매우 매우 드물지."

펄럭.

악마가 박쥐 날개를 펼치더니 위로 날아올랐다. 악마는 천천히 날갯짓하며 허공에서 부유했다.

"이해 안 가는 게 있다.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나?"

"응. 지금 나는 기분이 좋은 편이다. 해라."

"…저놈을 죽인 지 사흘 정도 된 것 같은데… 왜 이곳에 남아 있었던 거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 계약자가 죽었으니 이 세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을 텐데."

"시간에 얽매이는 건 필멸자들의 특징일 뿐이다. 이 세계도 내게는 아무래도 좋다."

악마에게도 성격이 있다. 당연히 성격에 따라 계약의 위험성도 달라진다.

'어지간하면 계약하려고 했다. 악마 계약을 통해 빠르게 강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계약을 둘째치고 이런 악마는 위험하다. 흥미를 잃는 순간 아무렇지 않게 내 뒤통수를 칠 것이다.

이미 결론을 내린 나는, 호기심이라도 채울 겸 악마에게 물었다.

"비오.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힘을 원하지 않나? 힘을 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힘?"

"네 몸에 다크홀을 만들어 줄 수 있다. 지금 네가 가진 마나의 2배 이상의 흑마나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흑마법사가 아닌 내겐 그다지 끌리지 않는 조건이군.”

"그럼 이 능력은 어떠냐. 모든 언어를 해석하는 힘이다."

"…모든 언어?"

"기계 언어는 물론이고 마법 언어까지 해석할 수 있다. 이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고대 언어, 악마 언어, 천사들의 언어도 해석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 혹했다.

특히 고대 언어와 마법 언어를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탐났다.

'고대 언어는 고대 유물을 찾을 때 도움이 될 테고, 마법 언어는… 마법 연구할 때 도움 될 테지.'

나는 악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대가는?"

"너의 소중한 것 중 하나를 가져가지."

"…어처구니없군. 그런 식으로 흑마법사를 죽였나?"

소중한 것.

즉, 놈에게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자기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인간은 없을 테니까.

"네 목숨을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악마가 말했다.

자기 이름을 걸었다는 건, 정말 계약의 대가로 내 목숨을 가져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약을 하는 편이 내게 이득이다. 이 세상 모든 언어를 해석하는 힘은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것이 확실했다.

입술이 떼지지 않는다.

소중한 것에 유리아가 떠올라 버렸다. 이어서 31호, 212호를 비롯한 동기들의 얼굴이 기억난다.

초월적인 힘을 가진 악마라면 분명 그녀들을 노릴 것이다.

"필요 없다. 네 힘이 없어도 나는 강해질 수 있다."

아스트랄을 개방하고 34개의 마나 로드가 가동한다. 서늘한 마나가 내 주위를 감싼다.

"거절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군. 목숨을 잃지 않고 강해질 기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내 걸 잃는 걸 지독히도 싫어해서."

"너는 아직 어리군. 힘이란 걸 모른다. 허나 비감할 것 없다. 내가 직접 너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주마. 힘이 무엇인지 네 영혼에 각인시켜 주마."

계산한 술식을 마법으로 발동하려는 때였다.

비오가 먼저 움직였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악마는 내 앞에 있었다.

비오의 몸에 변화가 일었다. 검은 박쥐 날개에 금이 가고, 원숭이 몸통은 갈라져 피와 내장이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염소의 머리는 점점 커지더니 두 눈이 새빨갛게 빛났다.

피와 내장이 모여 몸통을 이루고, 박쥐 날개는 사람을 휘감고도 남을 만큼 커진다.

눈앞에 진짜 악마가 있었다.

초월적인 존재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자, 나를 봐라. 네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달아라."

몸이 굳어졌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마법을 발동해야 하는데, 마나가 내 통제를 벗어났다.

저 아래에서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몸을 옥진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절망했다. 나는 눈앞에 있는 존재에 비하면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나와 계약해라. 필멸의 운명을 벗어나고 싶지 않으냐. 내가 너를 불멸의 길로 인도하마."

"…거절한다."

악마의 두 눈이 커졌다.

원작 지식 중 하나가 떠오른다.

평범한 존재가 초월적인 존재를 맞닥뜨리게 되면 십중팔구 미쳐버리게 된다는 설정이다. 극복하는 방법이 떠오른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저 버틸 수밖에 없다.

"호오.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들 것인데도 미치지 않는가."

악마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악마는 붉은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해할 수 없군. 너는 공포와 절망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정신은 멀쩡하다. 공포와 절망. 그 어느 것도 너의 굳건한 정신을 침범하지 못하는구나. 어느 상위 존재에게 보호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감히 필멸자가 가질 만한 정신이 아니다. 호기심이 생기는군. 정체가 무엇이냐."

악마의 흥미 가득한 목소리는 되려 나를 진정시켰다.

공포가 가라앉고 절망이 사그라든다.

냉철한 이성이 상황을 파악한다. 나는 그저 처음 보는 악마에 놀랐을 뿐이다. 공포 영화의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란 것과 비슷하다.

'초월자를 보면 미쳐버린다는 설정은 과장된 거였나?'

미쳐버리기는 개뿔. 내 정신은 멀쩡정하다. 공포와 절망도 없다. 나는 준비한 마법을 발동한다.

[라이트닝 그랩]

파지지지지지지직.

오른손에서 수천 줄기의 전류가 번뜩였다. 나는 악마의 어깨를 손으로 꽉 잡았다.

"크으음."

반응이 있었다. 악마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악마가 반격하기 전에 찰나를 사용했다.

[염력]

염력으로 목제 의자를 박살 내고 그 조각들을 들어 올린다.

[형태 변환]

의자 조각이 12개의 목검으로 변했다.

[물질 변환 : 미스릴]

12개의 목검을 미스릴 검으로 바꿨다. 12개의 검이 동시에 움직여 악마의 몸을 찔렀다. 악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까지인가. 너무 시간을 보냈군."

악마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악마는 끝까지 나를 보고 있었다.

땡그랑!

악마의 몸에 꽂혔던 12개의 미스릴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들은 모두 원래의 의자 조각으로 돌아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악마는 저절로 돌아간 거야. 아마 진짜 모습을 드러낸 것에 제약이 있었겠지.'

악마는 진짜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내 반격과 상관없이 거기서 이미 판가름이 난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널브러진 공간에는 낡은 책과 시약들이 널려 있다. 전부 챙길 수는 없다. 선별해서 가져가야 한다.

우선 흑마법사의 시체에 다가갔다. 흑마법사에게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건 다크홀이었다.

'복부는 텅 비어 있으니… 가슴을 갈라봐야겠군.'

[워터 블레이드]

손가락 끝에 작은 물의 칼날을 만들어 냈다. 수술용 칼보다 훨씬 날카로운 물의 칼날은 굳은 시체를 쉽게 베어 갈랐다.

썩은 심장 옆에 다크홀이 있었다.

'…오. 다크홀에서 느껴지는 흑마나가 상당하잖아. 다크홀만 보면 거의 6급 수준이야. 악마 계약의 영향인가.'

어쨌든 덕분에 나는 큰 이득을 얻었다. 이 정도 다크홀이면 암시장에 내다 팔아도 몇천만 크레딧은 우습게 벌 수 있을 것이다.

'팔 생각은 없다. 내가 써야지.'

나는 다크홀 몇 개를 수집하고 있다. 연구용인 동시에 비장의 수단이다.

다크홀을 챙긴 뒤에는 연구 자료를 살폈다.

'키메라를 연구하는 흑마법사였군. 오우거 오염체는 본래 키메라였던 건가.'

흑마법을 이용한 키메라 제작법과 유전자 조작, 생물체 합성 등이 적혀 있었다. 단순한 흑마법이 아니라 이해하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이것도 챙기고'

다른 책들을 살펴봤다. 흑마법 관련 책들이 보인다. 쉬워 보이는 것들은 그 자리에서 암기하고 책을 태웠다.

'악마와 관련된 책들이 많군. 대충 훑어보니 쓸만한 건… 별로 없군.'

줄이고 줄인 끝에 책 8권을 선택했다.

나머지 쓸만한 것들은 없었다. 흑마법사가 악마를 소환하며 키메라를 비롯한 재물들을 의식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크홀 하나만으로도 본전 이상을 뽑았으니 만족해야지.'

염력으로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가 바이크 탑박스에 넣었다.

부르르르르르르.

품 안에 넣어 두었던 회중시계가 진동한다.

신사의 품격을 보이듯 느긋하게 회중시계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X 인력소의 소장인 로즈였다. 통화를 받았다.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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