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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259화 (1,259/1,497)

< 1259화 > 1259. 다크문

신분증은 두 장이었다.

하나는 네오 런던 3급 시민증. 다른 하나는 스콰이어임을 증명하는 2급 기사 자격증.

원작 게임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클래스가 엄청나게 많았다. 마법사 내에서도 흑마법사, 연금술사, 원소 마법사 등으로 나뉘듯이 전사 클래스도 상당히 나뉘어 있다. 바이킹, 나이트, 워리어, 블레이더 등.

기사는 전사 클래스 내에서도 최상위에 속했다. 힘만 있다고 해서 아무나 기사가 되지 못한다. 기사는 전사 중에서도 인정받은 전사만이 될 수 있는 직업이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기사는 대단한 만큼 급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다른데, 기사라고 하면 대개 3~6급이다. 1급은 호너, 2급은 스콰이어라 부른다. 7급 이상의 기사는 마스터 나이트라 한다.

"…2급 기사, 스콰이어인데 메이드가 되겠다고?"

기사는 어딜 가나 환영받는다. 특히 네오 런던에서는 준귀족 대우를 받는다. 마스터 나이트쯤 되면 장군이라 할 수 있다.

"기사의 길은 저의 길이 아닌 듯하여 포기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무슨 사정이라도 있어?"

"딱히 그런 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질렸다고 할까요."

말하기 싫은 건가.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녀가 기사의 길을 포기한 건, 그녀의 선택이다. 그리고 기사 자격증이 있으니 어떻게 보면 기사가 전혀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소속 없는 기사일 뿐이지.

무엇보다 나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지 않은가.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 과거.

"자기소개서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말로 설명해도 될까요?"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유리아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고아입니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 네오 런던 공립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이후 전사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원장께서 네오 원탁에 저를 추천해 주셨고, 그들의 후원을 받아 여성 기사수련원에 들어갔습니다."

"과연 그런 제도가 있었나…."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추천서를 살폈다. 수련기사원장이 직접 써준 추천서다. 그녀가 매우 뛰어나고 유능하며 성실하다는 내용의 칭찬이 잔뜩 적혀 있었다.

"기사수련원에서 17년을 수련했습니다. 2급 기사 자격증을 발급받은 건 2년 전이었습니다."

"스콰이어면 꽤 괜찮은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예. 실제로 평판 좋은 기사단에서 제안을 해왔습니다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왜?"

"기사수련원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기간을 이용해 3급 기사 자격증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스콰이어와 나이트의 차이는 엄청나니까요."

"그러다 마음이 바뀌어 기사의 길을 포기했다?"

"네."

그런 이유로 기사를 포기하고 메이드가 되다니… 조금 어이없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기사수련원은… 후원하던 원탁 의회에서는 널 그냥 놓아줬고?"

"원탁 의회에 약 3억 5천만 크레딧의 빚이 있습니다. 상환기간은 7년. 갚지 못한다면… 원탁 의회에서 일하게 되겠죠."

3억 5천.

터무니없는 금액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메이드로 일하며 그 빚을 갚으려고?"

"1년 동안 메이드로 일한 뒤, 메이드 자격증을 따려고 합니다."

"1년?"

"메이드 자격증의 기본 조건이 메이드로서의 1년 경력이에요. 노리는 건 트리플 이상의 등급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드 자격증은 그 위력이 대단하다. 메이드 자격증도 기사 자격증처럼 등급이 있는데, 그중 트리플 등급은 귀족 가문이나 대기업에 취직해 1억 이상의 연봉을 받을 수 있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늦어도 5년 내로 빚을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비전은 알겠어. 그럼 이제 남은 건 연봉 협상인데…"

"연봉은 200만 크레딧으로 만족합니다. 대신, 숙식을 제공해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주인님을 곁에서 모시고 싶어요."

"다른 건 다 좋지만, 연봉 200만 크레딧은 안 돼. 그건 메이드의 기본 연봉보다 못하잖아."

"그럼… 주인님이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메이드나 집사를 고용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건 과시의 목적이다. 따라서 메이드는 외모가 뛰어날수록 그에 비례하듯 급료도 올라간다.

"…기본 1,200만 크레딧은 어때? 물론 성과금도 따로 챙겨줄게."

"좋습니다."

유리아가 웃었다.

이후 협의는 15분 더 이어졌다. 그 외에도 의논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개인 대 개인 간의 계약이기에 최소 2시간은 더 의논해야 정상인데, 유리아가 내가 내건 조건들을 반대하는 일이 없었다. 꼭 1초라도 빨리 계약해서 내 메이드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가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혹시 사기꾼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대체 뭘 노리는지 모르겠다.

'내가 가진 재산은 별로 없어. 암살자인가? …암살자가 왜 메이드를 하려는 거지?'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유리아를 경계하기로 했다.

"주인님. 계약서에 서명했어요. 주인님이 서명하실 차례입니다."

그녀가 내게 펜과 계약서를 건넸다. 계약서를 읽을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 조항을 내가 작성했으니까. 변호사가 본다면 욕을 하며 집어 던져도 이상하지 않은 조항 몇 개가 교묘하게 들어가 있다.

"…제대로 읽은 거 맞지? 계약서를 준지 5초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속독은 특기 중 하나랍니다."

"읽었다면 됐어."

계약서에 서명한다. 유리아의 서명을 힐끗 봤다. 필기체로 적혀 있었는데 감탄이 나올 정도로 유려했다.

'무슨 서명이 예술 작품 같냐.'

그에 비해 내 글씨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조용히 삼켰다.

계약서를 손에 쥔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었다.

"후훗, 이제 저는 주인님의 정식 메이드가 되었군요. 무척… 기쁩니다."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잘 부탁해, 유리아."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주인님."

유리아와 함께 카페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녀가 사용할 가구와 식재료를 구매하기 위해서다. 나는 요리를 할 줄 모르니 식재료는 그녀가 다루게 되겠지만.

"원하시는 요리가 있으신가요?"

"딱히 없어. 네가 자신 있는 요리를 해줘."

"자신 있는 요리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네요. 오늘은 무난하게 스테이크로 해도 될까요?"

"괜찮아. 대신 고급으로 사자. 싸구려는 못 먹어. 마실 것도 필요하니 와인도 사고."

"최상의 식재료만 사용하겠습니다. 제 안목을 믿어주세요, 주인님."

그녀의 안목은 대단했다. 무려 5만 크레딧을 식재료를 구매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식재료의 양이 일주일은 넉넉히 먹을 수있는 분량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5만 크레딧은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는 겉으로는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겨우 식재료 따위로 뭐라 하는 쪼잔한 고용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의문이 생겨 그녀에게 물었다.

"장어를 좋아해?"

"장어는 유명한 보양식입니다. 주인님을 위해 구매했어요. 네오 런던에서 자연산 장어는 무척 귀해요."

"장어 젤리는 내 취향이 아니야."

"네오 런던의 시민 중 90%는 장어 젤리를 싫어할 거예요. 저도 물론 90% 쪽에 속한답니다. 장어는 걱정 마세요. 맛있게 요리해 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어가 보양식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구매한 건.… 아무리 그래도 아니겠지.'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녀가 굴과 전복을 추가로 구매했다. 우연일 것이다. 그 외의 다른 해산물도 구매했으니.

구매한 식재료는 배달 서비스를 신청했다. 오후 5시쯤에 집으로 배달될 것이다.

"주인님. 이런 말하기 그렇습니다만. 정장을 새로 맞추시는 게 어떠신가요?"

"정장을? 이상해?”

나는 고개를 내려 내 몸을 바라봤다. 네오 런던의 남자들은 거의 필수적으로 정장을 입어야 했다. 정장을 입지 않은 성인 남자는 무례한 놈으로 찍히기 때문이다. 나는 군대에서 몸이 단련된 편이라 정장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무척 멋있습니다. 하지만… 네오 런던의 브랜드가 아닌 정장이란 점이 문제입니다."

"…겨우 그게 문제라고?"

"네오 런던 신사들의 자국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은 주인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입니다. 다른 국가에서 만든 정장은 싸구려이며 품위가 없다고 생각하죠. 대놓고 무시당하는 일은 적겠지만, 은근히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내게 친절하지 않던 이유가 있었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사소하면서도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는 누구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깨달을 때까지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워치도 바꾸는 편이 좋겠군요."

"워치도? 이건 멀쩡한데?"

"현재 네오 런던에서 유행하고 있는 건 회중시계형 워치입니다."

유리아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회중시계의 뚜껑에는 화려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고, 황금색의 워치 체인은 고급스러운 멋이 있었다.

"별게 다 유행이네."

"네오 런던은 유행에 무척 민감해요. 조금만 유행에 뒤처져도 은근한 조롱과 멸시를 받죠. 전 주인님이 그런 대우를 받는 걸 원하지 않아요."

"내가 무시당하는 건 또 못 참지. 사업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참아. 네 말대로 하자. 내게 맞는 정장을 골라주겠어?"

"물론이에요, 주인님."

추가로 10만 크레딧이 깨졌다.

다음은 가구 가게에 들렀다. 금속 가구는 거의 없고 목제 가구가 대부분이었다. 가구도 유행을 타는 것이다.

유리아는 신중하면서도 꼼꼼하게 침대를 살펴봤다.

“이 침대가 괜찮군요. 잠깐 확인 좀 해보겠습니다."

"확인? 뭐, 원래 전시용이 그런 용도니까."

그녀는 전투화처럼 생긴 부츠를 벗고는 침대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네 발로 엎드렸다. 치마가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가렸다. 물론 허벅지는 그대로 드러났다. 허벅지를 감싼 검은색 나이프 홀스터가 섹시하게 느껴졌다.

"유리아…? 침대에는 보통 눕지 않아?"

"그래서는 침대의 성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유리아는 손과 무릎에 힘을 주었다. 침대와 그녀의 몸이 출렁인다. 화들짝 놀란 나는 그녀의 뒤로 바짝 붙었다. 남들이 그녀의 엉덩이를 보게 둘 수 없었다. 나만 볼 거다.

검은색 팬티였다.

아까 보여준 보라색 팬티만큼 야하지는 않지만, T팬티인지라 하얀 엉덩이가 노출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명한 도끼 자국이 보였다.

침대와 함께 엉덩이가 흔들린다. 나는 하반신으로 점점 피가 몰리는 걸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그녀는 침대에 만족한 듯 곧바로 내려왔다.

"성능이 좋네요. 이 침대로 하겠습니다. 침대의 모델명은 기억했으니 직원을 찾아가… 주인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침대 가장자리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나를 본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내게 물어왔다. 나는 일부러 다리를 꼬아 살짝 발기한 자지를 가렸다.

"나도 침대의 성능을 확인 중이야. 잠깐만 기다려 봐. 침대는 1분 정도 앉아봐야 좋은 침대인지 알 수 있어."

"그런가요. 그럼 저도 옆에 앉아 확인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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