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8화 > 1258. 다크문
"안녕하세요, 주인님. 혹시 메이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가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확인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어·. 그게.… 일단, 전 당신의 주인님이 아닙니다. 메이드는.…."
필요하지 않다.
현실 지구의 메이드와 달리 네오 런던에서 메이드는 고급 인력이었다. 중산층 가정에서 무리하게 메이드를 고용했다가 임금 때문에 갑을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도 있다. 일을 시키려고 고용했던 메이드가 상전이 돼버리는 것이다.
내가 산 S구역의 2층 주택은 낡았으며 좁은 곳이었다. 가구나 장식품도 별로 없다. 메이드가 없어도 나 혼자서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지금 내겐 돈이 그리 많이 없었다.
70만 크레딧.
시민 한 달 월급이 10만 크레딧이다. 달리 말하면 월급 7개월분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막 네오 런던에 자리 잡은 나다.
앞으로 지출할 곳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니 단호하게…
"필요합니다."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나는 이미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아니, 그녀를 본 순간부터 마음을 굳힌 것이다.
경제적 문제는 괜찮다. 나는 5급 마법사다. 반쪽짜리라 하더라도 4급 마법사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 있다. 돈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벌 수 있다.
"여기 마침 일자리를 구하는 메이드가 한 명 있습니다, 주인님. 고용하시겠나요?"
"물론이죠. 지금 당장이라도 제 메이드로 고용하고 싶습니다만, 메이드를 고용하기 위해선 절차를 밟을 필요가 있습니다. 계약서를 준비해야 하고… 고용주로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제집으로. 아니."
나는 S구역에 있는 낡은 2층 주택을 떠올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집에 대해선 아무 감정 없었는데, 지금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낡은 집에 그녀를 데려갔다간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집은 부담스러우시겠죠.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요."
그녀를 데리고 근처 카페로 향한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갑자기 네오 런던이 활기차 보이는군. 과연 네오 런던. 프리셀 왕국도 무시 못 하는 유명한 도시 국가다워.'
드르르르륵.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스치는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습니다. 레이디. 제가 레이디의 짐을 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주인님. 저는 메이드입니다. 짐을 드는 것도 메이드의 일이지요."
“우린 아직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습니다. 레이디, 저를 무례한 놈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녀의 캐리어와 우산을 받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짝 내 뒤에서 걸었다. 나는 그 거리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슬쩍 걸음걸이를 늦췄다. 그녀도 덩달아 걸음걸이가 늦춰진다. 어쩔 수 없이 원래 속도로 걷다가, 기회를 틈타 다시 걸음 속도를 낮췄다. 물론 그녀의 반응은 아까와 같다.
이 해프닝을 3번을 더 반복하고 난 뒤에야 나는 그녀와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보통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말없이 걸으면 어색하기 마련이다. 허나 지금 나는 어색함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편안했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냥 편안했다.
"곤란하신 분이네요."
"저는 이게 좋습니다."
페어리 카페라는 유치한 이름의 가게에 들어갔다. 나무로 지어진 카페였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음료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홍차를 좋아해요."
홍차를 주문하고 그녀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1층 카페에는 칸막이가 없어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녀와 마주 보며 앉았다. 그녀의 보석처럼 파란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가 미녀라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이상하게 그녀가 낯설지 않았다.
"레이디,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유진 마이어라고 합니다. 일주일 전에 네오 런던에 왔습니다."
"루키시네요."
"네. 런던 루키입니다."
네오 런던에서는 처음 이곳에 와보는 사람을 루키라 부른다.
"…혹시, 제가 루키라 문제가 됩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누구나 집사와 메이드를 고용할 수 있어요."
"다행이군요. 그리고 저는.… 5급 마법사입니다."
이상하지 않게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대단한 남자라는 걸 어필한다.
"마법사…"
그녀가 입을 벌리며 놀랐다. 분홍색의 탱탱한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놀라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뿌듯해졌다.
"하하. 마법. 그거 사실 알고 보면 별거 아닙니다."
잘난 체하면서 손바닥을 펼쳤다. 일부러 작은 마법진을 그리고 파이어 마법을 사용했다. 촛불보다 조금 큰 수준의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대단하시네요!"
그녀가 손바닥을 치며 놀란다.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을 보니 내 어깨가 올라간다.
"저, 손님. 우리 카페에선 마법을 비롯한 어떤 이능도 사용이 금지되어있습니다."
홍차를 가져온 남자 종업원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뭐 시발놈아. 뒤지고 싶냐.
라는 욕설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고 손바닥을 흔들었다. 마법이 사라진다.
"죄송합니다. 이 카페는 처음인지라 몰랐습니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주의해 주십시오."
종업원이 테이블에 홍차를 올렸다. 그는 떠나기 전에 그녀를 힐끔거렸다. 한순간 짜증이 치솟았으나, 참았다.
그녀는 느긋하게 찻잔을 쥐고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별거 아닌 동작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는 귀족 출신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며 홍차를 마셨다.
'존나 맛없군.'
미간이 찡그려지지 않게 신경 쓰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홍차가 형편없군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와 내 생각이 일치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약간의 기쁨을 느꼈다. 나는 내 입맛이 남들보다 유별나게 까다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레이디. 홍차를 끓이는 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향이 너무 미약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 카페에서 홍차를 주문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뭐, 커피도 그다지 기대되지는 않습니다마는."
"후훗."
그녀가 웃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웃긴 농담을 했던가?
“실례했습니다. 주인님은 까다로우신 분이구나. 하고 잠깐 생각했습니다."
“어, 아, 아닙니다. 저 그렇게 까다로운 남자 아닙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신다니 다행입니다만,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시니 좀 이상한 기분이군요. 우리가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나요?"
"글쎄요. 어쩌면 그럴 지도요. 이제 제 소개를 이어가죠. 저는 유리아 그레이스입니다."
"유리아 그레이스…."
"네. 편하게 유리아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말도 놓아주셨으면 합니다. 그편이 제가 편합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레이디께서… 아니, 유리아가 그게 편하다면 존중할게.”
"감사합니다. 잠시 캐리어를 열어도 될까요? 제 신분증과 추천서가 캐리어 안에 있습니다."
"아. 물론이지. 자리를 비켜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이 맛대가. 아니, 맛없는 홍차는 옆 테이블에 옮겨 두도록 하지."
"후훗."
유리아가 또 웃었다. 미녀가 웃으니 보기 좋다.
'원래 잘 웃는 성격인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테이블에 캐리어를 올리고 잠금을 풀기 시작했다. 비밀번호만 16자리에 지문 인식과 홍채 인증 기능까지 있는 캐리어였다.
잠금이 풀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 들어 있길래 이 정도 보안인 거지?
가장 먼저 보인 건 무기였다. 권총과 총알. 검집에 들어가 있는 검. 그러나 진정 나를 놀라게 한 건 그 옆에 있는 옷이었다.
정확하게는 속옷이다. 보라색의 팬티와 브래지어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속옷도 아니다.
속이 살짝 비치는 속옷이다! 거기에 브래지어는 내 얼굴을 여유롭게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컸고, 팬티는 내 손바닥보다 면적이 작았다.
무심코 이 속옷을 입은 유리아를 상상하다가.… 유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크, 크흠. 미안해. 본의 아니게 봐버렸어."
"괜찮습니다. 관심 있으신가요?"
"어, 어느 쪽이라고 하냐면. 조, 조금 있는 것 같긴 한데…"
"알아보시는군요. 이건 최근 개발된 신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무척 가볍고 만지는 촉감이 좋습니다. 겉보기와 다르게 내구성도 무척 뛰어나죠. 한번 만져보세요."
"어, 어어?"
유리아가 싱긋 웃으며 내 손에 보라색 팬티를 건넸다. 그 행동이 너무 빨라서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내 손 위에 놓인 팬티를 조심히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굉장히 부드러웠다.
특히 팬티의 중심 부분의 촉감이 뛰어났다. 따뜻함까지 느껴졌다. 100% 기분 탓이겠지만.
"어제 입은 속옷이에요."
"……!"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농담이에요."
"…하, 하하. 깜짝 놀라게 하는 농담이네."
“사실 오늘 아침까지 입고 있었습니다."
"헉…!"
"이것도 농담이에요."
유리아가 웃는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니 의심이 들었다. 정말로 농담일까?
“이제 돌려주시겠어요?"
"아. 미안. 너무 만지고 있었네. 세탁이라면 내가 마법으로…."
“괜찮습니다. 더러워진 건 아니니까요. 자, 보세요. 깨끗하죠?"
그녀가 팬티를 양손으로 쥐고 펼쳤다. 팽팽하게 당겨진 팬티를 본 나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를 모르는 동정이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경험은 없었다. 유리아는 렉시나 동기 여자들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팬티를 캐리어에 넣고 내게 신분증과 추천서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