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6화 > 1256. 다크문
사무실에서 의자를 들고 와 복도에 앉았다. 앞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고, 등 뒤는 목욕탕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이 뒤는 일방통행이기에 여기서 막고 있으면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뒤로 가지 못한다.
나는 비누스의 머리통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누스를 죽였을 때는 약간의 통쾌함과 시원함이 있었다. 그건 비누스의 머리통을 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샤워를 한 뒤 몸에 묻은 물을 제대로 닦지 않고 나온 느낌이다.
'이유는 안다. 내 복수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비누스는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한 인물은 따로 있다. 비누스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은 직위를 가진 놈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중에 하나를 안다.
알파 티어(Alpha Tear) 제약 회사. 마나 진액을 만들어 군에 제공한 기업이다. 내게는 복수 대상이다.
무턱대고 놈들을 찾아가 죽일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나로선 알파 티어에 덤벼봤자 벌레처럼 짓밟혀 죽을 뿐이다.
'힘을 키워야 한다. 혼자서 알파 티어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9급 이상의 경지에 올라서야 해. 알파 티어 사를 대놓고 건드리면 십중팔구 프리셀 왕국이 나설 테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복수를 끝낼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여기서 만족하고 끝낼 수 없었다. 나는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와 관련된 놈들을 찾아내 복수할 것이다.
나는 비누스의 머리통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오버로드]의 도핑 효과가 끝나면서 극심한 피로와 통증이 한 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마나로드가 손상되었다는 점이다.
50개 중 멀쩡한 건 34개. 16개는 혼자서 수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파괴된 16개의 마나 로드를 수복하려면 특별한 치료사를 찾아가야 한다.
'심각하군. 이래선 장기전은 못 하겠어.'
5급 마법사의 마나 로드는 못해도 80개 이상이다. 그런데 나는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마약을 이용해 억지로 5급에 오르고, 오버로드로 마나 로드를 혹사한 탓이다.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절망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겐 원작의 지식이 있어. 마나 로드를 수복해 줄 치료사를 알고 있고, 이 세상에 잠들어 있는 보물의 위치와 얻기 위한 방법도 알고 있지. 내겐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야. 단지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지.'
한숨을 내쉬었다.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뚜벅뚜벅.
발소리에 눈을 떴다. 정면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 군복을 입은 31호가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은 살짝 젖어 있고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수면 가스에 당했는데도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조용히 감탄했다. 아마 그녀가 가진 마녀의 피 덕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비누스 교관을 죽였구나."
"응. 엄청 힘들었지. 31호. 날 죽일 거야? 솔직히 지금난 너랑 싸울 힘이 없어. 죽일 거면 깔끔하게 죽여줘."
나는 다시 정면을 보며 말했다.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지금 31호나 212호에게 죽는다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생각나네. 그때, 다크 문이 떴을 때, 폭주하고 폭포에서 떨어진 날 구해준 건 너였어. 그때의 빚은 지금 갚을게."
그랬던 적도 있었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 뜻이 아니야. 난 처음부터 널 죽일 생각이 없었어. 내가 빚을 갚겠다는 건.… 212호를 포함한 동기들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야."
놀라서 그녀를 돌아봤다. 31호는 팔짱을 낀 채로 도도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녀라면. 렐티어스 공작의 딸인 그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약간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고마워. 31호."
"조건이 있어.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 세상에 공표하지 마.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는 묻어버려."
"동기들을 위한 거야. 동기들이 매스컴에 시달리는 걸 너도 원하지 않잖아."
"…그 동기들에 나도 포함되는구나."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가 묻히면 가장 이득 보는 건 31호가 아닌 나였다. 나는 상사를 죽인 반란자이자, 테러리스트로 찍혀 현상금까지 걸릴 게 분명하니까. 프리셀 국군도 굳이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를 공개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된다면 국제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고, 하이에나 같은 인권 운동가들이 돈을 뜯어내려고 달려들 테니까.
"고마워.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볼게. 이 일의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서 확신할 수 없지만…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가 세상에 공표되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 고마워, 31호."
"이리나."
"응?"
"내 이름은 이리나야."
그녀가 몸을 돌려 목용탕 쪽으로 걸어간다. 나는 사라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말했다.
"이리나! 내 이름은 유진이다!"
일주일 뒤.
은신처에 루이스 빌슈타인이 찾아왔다. 참고로 지금 내가 머무는 중인 은신처를 그가 준비해 주었다. 프리셀 왕국 외곽 인적 드문 어느 마을에 있다.
"전에 봤을 때보다 안색이 훨씬 좋아 보이는군요. 다행입니다."
"일은 어떻게 됐지?"
"유진 씨가 원하는 대로 됐습니다. 저희는 프리셀 국군과 협상해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를 묻기로 했습니다. 아, 유진 씨의동기들은 모두 31호, 이리나 렐티어스의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군은 당연히 거부하려 했으나… 렐티어스 공작이 힘을 썼더군요."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군. 나에 대한 추적은?"
"아직은 어떤 반응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프리셀 왕국의 특수 요원들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래. 역시 이 나라는 떠나는 게 좋겠지."
루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 제국으로 오시죠. 신분증은 물론이고 좋은 저택도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 기업에 입사해 주십시오."
"그 이야기는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제국에는 안 간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나쁜 조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프리셀 왕국도 하이스트 제국은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제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 제국은 군의 힘이 너무 강하다. 군은 지긋지긋하다. 거기다 카이저가 반란 분자를 숙청 중이지 않나. 제국에 가서 숙청에 휘말릴 생각은 없다."
루이스가 내게 가방을 건넸다. 가방을 열고 물건들을 살핀다. 유리병에 들어 있는 다크홀 7개와 계좌 카드 하나. 네오 런던행 우등석 증명 서류. 그리고 네오 런던 3급 시민증.
"아쉽군요. 그런데 왜 네오 런던을 선택한 겁니까?"
"하페일 공화국은… 내가 거기 병사들을 제법 많이 죽였거든. 내가 공화국에 들어가자마자 날 노릴 테지. 디바인 프랑스는 네오 런던 이상으로 평화롭다지만, 종교에 연관되는 건 질색이다. 그 외의 다른 국가들은 프리셀 왕국의 영향을 크게 받으니 안전하지 않다."
"소거법으로 네오 런던을 선택한 것이군요."
나는 계좌를 워치에 연동해 재산을 확인했다.
"…왜 5,000만 크레딧밖에 없는 거지?"
"거기 가방 안에 있는 다크홀들을 구하느라 2억을 썼습니다. 또 저번에 플레이 로드 마약을 구하기 위해 6억을 썼고, 이번에 비누스의 머리를 완전 냉동 보존시키며 3억을 사용했습니다. 그 외에 유진 씨의 신분증, 열차 값, 은신처 이용료 등등을 제하고 남은 돈이 5,000만 크레딧입니다. 원래는 4,757 크레딧인데 제가 인심 좀 썼습니다."
"…계산이 지나칠 정도로 확실하군."
"하하. 기업인으로서 아주 기꺼운 칭찬이군요. 아, 시민증을 보시면 성씨는 제가 임의로 선택했습니다."
"유진 마이어. 나쁘지 않군."
"아돌프를 넣으려고 했는데… 유진 씨가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무난한 성씨를 넣었습니다."
“아돌프였으면 시민증을 네 얼굴에 집어 던졌을 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렵니까?"
"여기에 오래 있어봤자 할 것도 없으니까."
옷과 생필품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가진 물건이 없다 보니 짐 정리는 5분 만에 끝났다.
"루이스. 넌 전생을 믿나?"
"뜬금없이 전생입니까? 전 종교나 신화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전생의 기억을 꿈으로 떠올려서 그렇다. 놀랍게도 전생이 하나가 아니더군."
"하하. 그렇습니까. 혹시 전생에 귀족이셨습니까?"
"…어떻게 알았지? 난 전생에 백작의 자식이었다."
"호오. 가문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한 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글쎄. 꿈에서 깨어나고 보니 너무 흐릿해지더군."
"헤어지기 전에 하는 대화치고는 실없군요. 나중에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하십시오. 도와 드리겠습니다."
"공짜로?"
"제 사전에 서비스는 있어도 공짜는 없습니다."
나는 문을 나서기 전에 인피면구를 얼굴에 뒤집어썼다. 인피면구는 네오 런던에 도착한 뒤에 벗을 예정이다.
"간다."
"인사치고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성의 있는 인사를 할 사이는 아닐 텐데."
"매정하시군요. 뭐, 조심히 가십시오. 제 예감인데 우린 또 나중에 만날 것 같습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