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4화 > 1254. 다크문
17명.
연구실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죽인 병사의 숫자였다. 그중에 2명은 교관이었다. 교관을 상대로는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찰나가 없었다면, 제법 고전했을 것이다.
죽인 병사 중 절반 이상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직접 죽여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스스로의 냉혹함에 조금 놀랐다.
연구실 입구에서 또 아는 얼굴을 맞닥뜨렸다.
왼쪽 눈이 사시인 건장한 체격의 남자. 같은 내무실을 사용하는 202호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분노와 배신감이 엿보인다.
"211호! 네가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체 왜 우릴 배신 한 거냐?!"
202호가 고함을 터트리며 전투 자세를 취한다.
"너희를 배신한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거기서 비켜라, 202호. 비누스 교관을 죽이고 배틀 메이지 프로젝트를 없앤다. 그편이 너희 미래에도 좋을 거다."
"씨발! 대체 뭐가 불만이냐?! 넌 수도 방위군으로 배치받는 거 아니었나?! 엘리트 미래가 보장된 놈이 왜 나락으로 기어들어 가는 거지?!"
"내게는 그 미래가 나락이다. 비켜서라, 202호. 난 널 죽이고 싶지 않다."
202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와서도 그 태도를 유지하는군. 내가 우습게 보이나?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을 만큼?"
202호에게서 마나가 요동치는 걸 느꼈다.
"너무 흥분했군. 아직 늦지 않았다. 202호. 비켜라."
"나는 냉정하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은 네게 포함된다. 돌아가서 습격자들을 처리해라. 넌 처벌은 받겠지만, 죽지는 않을거다."
"…말이 안 통하는군."
앞으로 걸어갔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202호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내가 할 말이다. 너는 네 스스로가 잘났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근접전만큼은 내가 위다."
너클을 꽉 쥔 202호가 지면을 박찬다. 그는 내가 동기들 사이에서 가장 근접전을 못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내 접근전 실력은 동기들 사이에서 유명하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나와는 반대로 202호는 근접전이 전문이다. 육체를 강화하는 보조 마법으로 육체 능력을 끌어올리고, 인챈트 마법을 너클해 속성을 부여해 싸우는 인파이터다.
202호의 주먹이 날아온다.
[배리어]
오른손을 뻗어 그의 주먹에 손을 내밀었다. 그의 주먹이 내 손에 가로막혔다. 그의 너클이 시뻘건 불을 내뿜으며 타올랐으나 내겐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배리어를 오른손에 극소화해 내 주먹을 막았다고…?!"
"배리어의 범위를 좁히는 대신 강도를 높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가 여기로 주먹을 내지르는 게 보였고?"
"네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듯이, 나도 너에 대해 알고 있다. 너는 선제공격을 할 때 꼭 스트레이트로 시작하더군."
"빌어먹을!"
202호의 오른 다리가 움직인다. 허나 그보다 먼저 내 품에서 속성검이 움직였다. 염력으로 소리 없이 움직인 속성검은 정확히 그의 무릎을 꿰뚫었다.
"크으윽?!"
202호가 이를 악물며 뒤로 물러난다.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비티]
중력이 202호의 육체를 짓누른다. 202호의 마나가 거세게 요동쳤다. 그는 무릎에 박힌 속성검을 손으로 잡아 빼내고는 육체에 무리가 갈 정도로 강화 마법을 사용했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두 눈에 실핏줄이 생긴다. 그의 왼쪽 너클에는 불꽃이, 오른쪽 너클에는 바람이 휘몰아친다.
"잘난 척하지 마라, 211호! 나도 비장의 수단 한, 두 개는 가지고 있다!"
"비장의 수단? 아, 속성검을 말하는 건가. 뭔가 착각하고 있군. 그건 비장의 수단도 뭣도 아니다. 평범한 반격이었을 뿐이지."
"빌어먹을 새끼. 네놈의 그 잘난 듯한 태도가 항상 마음에 안 들었다!"
그가 주먹을 뻗는다. 나는 스스로의 몸을 염력으로 감싸며 그의 주먹을 모조리 피했다. 보이는 이상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게 어떻게…! 너 설마,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212호. 우린 마법사다. 네가 아무리 주먹을 단련한 듯, 진짜 전사에게는 못 미친다. 그리고!"
"뭐?"
"상처 입은 다리로 내게 너무 가까이 왔다."
[프로스트]
"아아아아아악!"
202호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상처 입은 무릎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출혈 상태에서 4급 마법인 프로스트의 냉기가 순식간에 스며들었으니, 그의 오른쪽 다리는 끝장났다고 보면 된다.
손가락을 까딱였다. 염력과 이어진 속성검이 날아와 202호의 등에 꽃혔다. 202호가 피를 토한다.
"202호. 내가 저번에 네게 미안하다고 했었지. 기억나나?"
".기억난다. 의미 모를 사과였지. 지금 상황을 예측하고 한 말이었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몇 개월 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때 말이다. 네가 좋아하는 99호와 관계를 가졌다. 알고 있나? 99호의 항문 옆에는 점이 하나 있더군. …아니, 네가 알 리가 없지."
"개자식이…."
202호가 부들거린다. 아스트랄을 몰아붙이며 한계까지 마법 술식을 짜낸다. 뛰어난 집중력이다.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의 등에 꽂힌 속성검이 한 바퀴 회전한다.
"아아아아아악!"
202호의 마지막 마법 캐스팅이 취소된다. 그의 입에서는 핏물이 울컥울컥 튀었다.
"사실 그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너한테 99호는 과분하다고 생각했지. 네게 미안하다고 말한 건 조롱의 의미였다. 의미를 깨달으면 좋고,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것대로 상관없었지."
나는 202호를 바라봤다. 이미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삶은 앞으로 기껏해야 30초다.
옛 기억이 떠오른다. 202호와 관련된 기억이었다. 가끔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나는 놈이었지만, 치가 떨릴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았다.
"널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슬프군. 88번을 죽일 때도 이런 기분이었지. 앞으로 3일 정도는 슬프겠어."
"끄르르르르…"
202호가 피눈물을 흘리며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나는 만의 하나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그가 죽는 꼴을 끝까지 지켜봤다.
"아, 마지막으로 네가 짝사랑하던 99호는 좋은 여자였어. 그 풍만한 가슴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고, 보지도 뜨거웠지. 99호는 내 머리를 끌어안는 걸 좋아했는데… 죽었나."
그의 등에 박힌 속성검을 뽑고 연구실로 향했다.
[물진 변환]
입구를 막는 금속 문을 나무로 바꿨다. 다행히 마나 저항력은 그리 높지 않은 문이었다. 나무 문을 발로 차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다. 부서진 나무 문이 다시 금속으로 돌아왔다.
연구실 안쪽으로 조금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휴게실에 앉아 있는 비누스 교관과 마주쳤다.
"211호, 왜 반란을 일으킨 거냐?"
"몰라서 묻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마나를 절반 이상 써버렸다. 이 점은 꽤 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더군. 넌 우수한 놈이었다. 실력은 물론이고 머리도 돌아간다. 거기에 충성스럽다. …그렇게 생각 했었다. 너는 위로 올라갈 놈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지. 대체 왜 나를 배신한 거냐?"
"배신은 무슨. 네가 날 믿은 적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다. 위로 올라가? 올라가겠지. 그래봤자 네 아래에서 개처럼 구른다는 건 변함없겠지만. 더 이상 네놈 뒤처리를 하는 건 사양이다."
"멍청한 놈."
비누스가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냈다. 노예 인장을 컨트롤 하는 마도구다. 구슬이 그의 마나에 반응해 빛났으나,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예 인장을 해제했다고?"
"꽤 고생했지. 암호화된 술식을 풀고, 마법진의 술식을 하나하나 해석하고 역순으로 해제하고, 새로운 술식까지 도입해야했지. 좆같아서 중간에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결국 풀었다."
"네가 풀었다고? 웃기지 마라! 이건 8급 대마도사가 만든 마법진이다!"
“이거 풀려고 2년을 개지랄 떨었다. 그 정도 시간을 마법진 하나에 투자했는데, 풀지 못하면 내가 더 억울하지."
비누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비누스는 분노만 느끼는 게 아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열등감을 읽었다.
지지지지직.
비누스의 어깨에 달린 무전기에서 노이즈가 들렸다.
-비누스 교관님! 지통실과 무기고가 장악당했습니다! 외부와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제 3 회의실에서 적들과 교전 중입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비누스 교관님!
비누스는 무전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211호. 지금까지의 일은 불문에 부치마. 해라, 그리고 적을 죽여라."
품에서 앰플을 꺼내 허벅지에 박았다.
콱!
"좆까. 내 적은 너다."
앰플의 약물이 몸 안으로 들어와 스며든다.
[오버로드]
아스트랄이 요동치고, 감각이 확장된다. 뇌가 처리하는 정보의 양이 순식간에 3배 이상 많아졌다. 또한 마나가 격렬히 들 끓는다. 50개의 마나 로드가 일순간에 활성화하며 과부하를 시작한다.
[일렉트릭 필드]
오른발을 굴렀다. 나를 시작으로 전류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휴게실이 시퍼런 전류로 가득 차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판이 깔렸으니, 다음은 판을 이용한다.
비누스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배리어를 중첩해 몸을 감싼다. 그러면서 얼음창을 만들어 내게 투척해 견제한다. 몸을 틀어 얼음창을 피하고 술식을 이어간다.
과부하한 마나 로드가 비명을 내지르며 통증을 유발한다.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는 각오한 일이다.
[썬더 볼트]
휴게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전류가 천장으로 모여들어 압축한다. 이어 갑자기 모든 것들이 정지하는 감각을 느낀 순간, 천장에서 거대한 벼락이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직격!
그러나 비누스는 멀쩡했다. 녹아내린 배리어 사이로 사납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보인다.
"준비 시간이 너무 길었다. 내가 분명 대놓고 준비하는 대마법은 위협적이지 않다고 예전에 가르쳐줬을 터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누구 가르침인데 잊겠나."
파지직.
식어버린 천장에서 푸른 전깃불이 튀었다.
전조현상을 느낀 비누스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천장 위에서 준비되던 두 번째 썬더 볼트가 천장을 박살 내고 비누스에게 떨어졌다.
"흐으으으읍!"
비누스는 반응했다. 그 짧은 순간에 왼손을 들어 올려 배리어를 손바닥 크기로 줄여 썬더 볼트를 막아낸 것이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으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의 왼팔은 새까맣게 타올랐다. 어떻게 봐도 왼팔의 회생은 불가능해 보인다.
'즉사시키지 못한 건 아쉽지만.…, 놈의 왼팔을 끝장냈다. 내가 더 유리하다.'
키이이이잉.
마나 로드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마법을 준비한다.